‘큰절’ 잘못하면 ‘따귀 석대’
▲ 전두환 씨에게 세배한 일이 논란을 불러일으키자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이 지난 4일 해명 기자회견을 열어 사과인사를 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원희룡 최고위원은 전두환 전 대통령 세배에 대해 사과한 뒤 기자들과의 대화에서 그와 나눈 이야기의 일부분을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대화의 대부분은 전직 대통령 집권 때 불가피하게 국민 여론과 다르게 갈 수밖에 없었던 점에 대한 ‘해명’, 그리고 정치 권력의 생리, 예방한 대권 주자들과 현직 대통령인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자신들의 집권 과정 노하우와 그에 따르는 여러 조언을 해주는 것, 그리고 가족들과 대통령 본인의 건강 등이 주된 화제에 오른다고 한다.
원 전 최고위원은 전 전 대통령과 나눈 대화에 대해 “(전 전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충성하던 사람들이 암살 주역이 되었으면서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모습을 보고 여러 가지를 느꼈다고 했다. 또한 그런 과정에서 (전 전 대통령) 본인에게 영향력과 권한이 갑자기 몰려와 결과적으로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집권을 하다 보니 많은 무리가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래서 지금도 나들이를 못할 정도로 그 후유증이 매우 심해 많이 불편하다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원 최고위원은 “전 전 대통령은 한국 정치 권력의 생리가 얼마나 비정한지 자신의 경험 속에서 많은 얘기를 해주었다”며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 정치의 속성상 대통령 임기 말이면 여당도 말을 안 듣고 자기에게 정말 충성하는 사람 외에는 말을 듣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노 대통령은 하루 빨리 그것을 인정하고 욕심을 버려야 한다. 임기말을 잘 마무리해서 가겠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나머지 1년이 걱정된다”는 전 전 대통령의 말을 전했다. 또한 전 전 대통령은 5공화국 당시 지지도와 관련된 이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대화를 통해서 대권 주자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2007년 신년 세배정치의 손익평가에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1위를 차지했다는 게 중론이다. 그는 1월 2일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예방했고 3일에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집도 방문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정치원로를 예우한다는 차원에서 새해 인사를 한 것이지만 이번에 이 전 시장이 얻은 정치적 이득도 적지 않다. 본격적인 대선 정국을 앞두고 영남 호남 충청을 대표하는 정치지도자를 직접 만났다는 점에서 그 지역에 좋은 인상을 심어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전직 대통령들의 집권 및 통치 ‘노하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좋은 경험이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 전 시장의 행보가 다분히 지역주의에 편승하려는 측면이 있고 전직 대통령들의 후광에 기대 표를 끌어 모으려는 안일한 생각에 젖어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이 전 시장은 세배정치 첫 일정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YS)을 예방했는데 이 만남에서 크게 고무되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특히 이 전 시장측은 YS의 대세론 언급에 매우 기분이 흡족한 모습이다. YS는 세배정치 과정에서 여권의 정계개편에 대해서는 “그러다 또 깨진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반면, 올해 대선은 “대세대로 흘러갈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부분은 바로 이 전 시장의 지지율 1위 독주를 지지하는 발언으로 해석돼 이 전 시장 측은 내심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
이 전 시장은 이어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DJ)을 예방하고 1시간 10분여 동안 북핵 사태, 한·미동맹, 안보 문제 등을 얘기했다. 이 전 시장은 이 자리에서 “(서울시장 재임 때) 국무회의에 8개월간 참석해서 기억에 많이 남는다.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하자, DJ는 “언론 보도를 보니까 인기가 아주 높던데 축하한다”며 후한 덕담을 건넸다.
특히 두 사람은 호남 민심 변화를 놓고 여러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알려진다. 이 전 시장이 “올해 호남에 여러 차례 가봤는데 많이 변한 것 같다”고 하자, DJ는 “호남은 영남보다 많이 열려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 전 시장의 DJ 예방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향후 정계개편과 관련해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정치권도 뜨거운 관심을 쏟고 있다.
이 전 시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도 후한 대접을 받았다. 이 전 시장이 “건강하셔서 참 좋다”고 덕담을 건넸으며 이에 전 전 대통령은 “올해 황금돼지띠라고 한다. (이 전 시장이) 한 마리 잡으셨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전 전 대통령의 돼지 발언이 대권주자들 중 지지도가 가장 높은 이 시장에게 ‘대권을 잡을 것이다’ 혹은 ‘대권을 잡길 바란다’는 덕담을 한 것으로 이해하는 분위기다.
전직 대통령은 아니지만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JP)를 만났을 때는 JP의 ‘과공’이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JP는 이 전 시장에게 “5년간 하실 일이 있다. 그 이상은 욕심을 내지 마시고 다음 정권에서 계승해 줬으면 하는 것은 승계하시고…”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치권에선 “‘대승하기 바란다’는 말만 빼면 현직 대통령이나 적어도 당선자에게나 할 덕담이다. JP가 무슨 생각에서 그런 ‘오버’를 했는지 구구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는 반응이다.
반면 그 밖의 다른 대권 주자들은 대체로 ‘썰렁한’ 대접을 받았다. YS는 고건 전 총리에게 “고 총리 어때요, 요새?”라고 묻자 고 전 총리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마치 두 사람 사이에 선문답 같은 대화가 오갔다고 한다. 그리고 YS는 고 전 총리에게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일찍 다녀갔고, 내일 낮엔 이명박 전 시장이 오기로 했고 떡국을 함께 먹기로 했다”라며 사무적인 태도를 취하며 살갑지 않은 반응을 보여 분위기가 얼어붙었다는 후문이다. 그 뒤에도 한때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겨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도 했다고 한다.
이밖에 여권에서는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 김근태 현 의장, 그리고 한명숙 총리 등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차례로 예방했다. 북핵 문제 등의 주제가 오갔지만 여당의 낮은 지지율 때문인지 분위기는 착 가라앉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