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속 징용 한국인’ 흔적은 사라지고 없었다
죽음의 철도 시작점인 탄퓨자옛은 버마인들이 가장 많이 희생된 공사 현장이다. 이곳에 죽음의 철도 박물관이 조성돼 있다.
철도 구간은 강을 끼거나 가파른 절벽이 많고 험준한 산들을 통과해야 했기에 영국 군사전문가들은 최소 5년이 걸릴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겨울에 완공하여 14개월 만에 공사를 마쳤습니다. 손과 곡괭이만으로 했습니다. 상상하기 어려운 짧은 공사기간입니다. 27만여 명이 동원되어 하루 16시간의 중노동을 강행했습니다. 일상적인 고문 장면이 사진으로도 남아 있습니다. 과로사, 영양실조, 탈진과 고문, 말라리아 등의 질병으로 수없이 죽어나갔습니다. 그중에서도 탈진해 절벽에서 떨어져 죽거나 굶어서 죽은 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전쟁포로 1만 6000여 명, 민간인 약 10만 명이 희생되었습니다.
공사에는 전쟁포로와 인도차이나의 민간인들이 투입되었습니다. 영국, 네덜란드, 호주와 미국 등 전쟁포로와 버마 민간인, 태국의 죄수, 징용된 한국인 등. 그중 유럽인 중에서는 영국인이 6500여 명으로 가장 많이 희생되었습니다. 민간 노동자 중에서는 버마인들이 가장 많습니다. 사망자들은 태국의 깐짜나부리의 묘지와 미얀마의 탄퓨자옛에 각각 묻혀 있습니다. 태국 구간의 참혹한 공사과정과 자료, 사진들은 태국의 Hellfire Pass Memorial Museum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야간에도 공사를 위해 불을 밝힌 모습이 마치 지옥의 횃불처럼 보인다 해서 ‘Hellfire Pass’입니다. 가장 험난한 공사였던 탐파이와 힌톡 사이의 구간에서 생겨난 말입니다. 이 구간은 암석뿐인 언덕 사이로 선로를 냈습니다. 미얀마 ‘죽음의 철도’ 박물관에도 당시의 현장사진들이 남아 있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에는 미얀마와 태국 양쪽 노선은 거의가 폐허가 되었습니다. 죽음의 철도와 콰이강의 다리는 결국 연합군의 폭격으로 거의 폭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후 태국에서는 콰이강의 다리와 일부 철도를 복원하여 관광상품으로 개발하였습니다. 현재 운행중인 구간은 130km로 농뿔라둑에서 남톡사이욕노이까지의 구간입니다. 현재 콰이강의 다리는 관광객들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그대로 방치됐던 미얀마 구간은 최근 몇 년간 묘지를 단장하고 탄퓨자옛 역을 보수하고 박물관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한적하고 먼 시골마을이라 관광객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당시 죽음의 철도 공사에서 고문, 과로사, 말라리아, 영양실조 등으로 전쟁포로 포함 민간인 11만 6000여 명이 사망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인근 기념묘지를 가봅니다. 영국군과 네덜란드군 포로들이 묻힌 무덤입니다. 묘지 중앙 입구에는 ‘Their name liveth for evermore’라고 쓰여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우리에게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비내리는 묘지 사이를 걷습니다. 혹시 한국인 이름이 있을까. 이 공사에서 징용된 한국인도 많이 죽었다고 미얀마 직원들이 설명하지만 묘역은 따로 없습니다. 당시 한국인은 일본군 속에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찾을 수 없는 이름. 그들의 이름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희생당한 미얀마인의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가장 많이 동원되고 희생당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태국은 정치적으로 일본과 동맹을 유지했기에 피해가 덜했습니다. 버마인들은 태국 구간으로 끌려가 죽거나 돌아오지 못한 노동자들도 많았습니다. 관광열차가 달리는 태국 콰이강의 다리와 ‘죽음의 철도’ 주변에는 미얀마 몬족의 후예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아직도 태국 땅에서 이방인으로 비참하게 산다고 합니다.
정선교 Mecc 상임고문
필자 프로필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일요신문, 경향신문 근무, 현 국제언론인클럽 미얀마지회장, 현 미얀마 난민과 빈민아동 지원단체 Mecc 상임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