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수롭지 않게 넘기다 간혹 고질병이 되거나 중병으로 발전하는 여름철 안면마비는 지나친 냉방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사진은 우신향병원 내과 김유성 과장의 침 시술장면. | ||
노인이나 임신부, 면역성이 떨어지는 당뇨병 등의 전신질환이 있을 때는 더욱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안면신경마비는 발생 조짐이 보이거나 발생 직후 적절한 조기치료를 받으면 대부분 잘 치료된다. 하지만 원인에 따라 지속적인 장애가 남을 수도 있으므로 증상이 나타나는 즉시 진단과 치료를 서둘러야 한다.
은행에서 근무하는 B씨(38). 하루종일 에어컨이 켜진 곳에서 일하다보니 여름에도 냉방병으로 감기에 잘 걸린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감기 기운이 있는 상태에서 갑자기 눈꺼풀이 안 감기고 눈물이 자주 났다. 뿐만 아니라 음식을 먹을 때 흘리고 입이 반대편으로 돌아가는 안면신경마비 증상이 생겼다.
평소 당뇨로 고생해 온 J씨(42)도 최근 같은 증세로 병원을 찾았다. 사업 때문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차에 갑자기 안면신경마비가 왔다. 며칠 전부터 불면으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는데, 그 날은 새벽에 잠깐 잠을 자고 나니 오른쪽 얼굴에 감각이 없고 입이 돌아간 것이다.
얼굴의 한쪽이 갑자기 마비되어 먹고 말하는 것은 물론 눈조차 마음대로 감을 수 없는 등의 증상으로 불편을 초래하는 질환이 안면신경마비. 뇌신경 12개 중 제7뇌신경인 안면신경이 마비되어 생긴다.
정확한 국내 통계는 없지만 미국의 경우 해마다 4만명 정도의 환자가 새로 발생한다는 보고가 있다. 여성보다 남성에게 더 많고 20∼50대의 연령에 흔하다. 하지만 간혹 어린아이나 노인에게서 발생하기도 한다.
서울 꽃마을한방병원이 지난해 안면신경마비 내원환자 5백명을 분석한 결과, 40대(41∼50세)가 26.6%로 가장 많고 30대 25.2%, 20대 22.4%도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뿐만 아니라 10대(11∼20세)도 14.8%나 되는 것으로 나타나 그동안 젊은 층에서는 드물게 발생하는 것으로 믿어온 상식을 무너뜨렸다.
“경제사정 악화나 실업난 등으로 젊은 층의 스트레스가 심해지면서 젊은 환자가 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꽃마을한방병원 침구과 박쾌한 과장은 설명한다.
계절적으로는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한 환절기나 기온이 낮은 겨울철에 상대적으로 많이 발생하는 것이 사실. 그러나 냉방이 보편화된 지금은 여름철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에어컨을 가동해 냉방이 잘되는 실내에서 오래 일하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냉방병으로 안면신경마비가 찾아온다. 또 저녁에 과음한 후 당장 시원하다 하여 찬 벽에 기대어 자거나 서늘한 아파트 (시멘트) 바닥, 찬 바위 위에서 무방비 상태로 잠을 자는 경우도 위험하다. 바닷가나 산 등 야외 캠핑 때에도 찬 공기와 찬 바닥에 노출되는 기회가 많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여름철에 신경마비가 덜 일어나는 것은 신체의 생리기능 대사조절 기능이 겨울보다 활발하기 때문이지만, 그에 비례하여 늘어나는 신체활동으로 땀 등 체액의 소모가 많아지는 것은 오히려 위험요인이 된다. 우신향한방병원에 내과 김유성 과장은 “체액소모가 많으면 체내에서 필요한 수분, 염분, 비타민C 등이 부족해지기 쉽다. 따라서 세포와 조직의 생리기능, 면역기능이 떨어지기 쉽다”고 말한다.
양방에서는 원인이 정확하지 않은 안면신경마비를 이 병을 연구한 의사의 이름을 따서 ‘벨 마비’라고 부른다. 벨 마비의 원인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바이러스 감염.
원인의 약 60∼70% 정도를 차지하는 헤르페스 심플렉스1이라는 바이러스다. 몸이 지쳤을 때 흔히 입술에 물집이 잡히게 하는 원인이기도 한 헤르페스 심플렉스1이 신경 내에서 활성화되면 측두골 내에 있는 안면신경에 염증을 만들어 붓게 되고, 이것이 신경을 눌러 마비가 온다.
한양대병원 신경외과 김영수 교수는 바이러스를 활성화시키는 요인으로 지나친 스트레스나 불면, 감기 등 가벼운 원인들과 외상, 에이즈 같은 면역억제 질환, 면역력을 떨어뜨리는 당뇨병 등 만성질환을 꼽는다.
람세이헌트 증후군이라고 해서 바리셀라 조스터 바이러스에 감염돼도 안면신경마비 증상이 온다. 벨 마비와의 차이점은 귀에 물집이 생기면서 아프고 어지럼증, 청력감소가 함께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밖에 중이염이나 청신경 종양, 안면신경 손상, 안면신경 종양, 측두골 골절 등도 마비의 원인이 될 수 있다.
한방에서는 크게 네 가지 원인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우선 차고 습한 바람이나 기운에 상하는 경우이다. 예를 들면 한쪽 얼굴에 찬바람을 계속 쐬거나 차가운 바닥에 얼굴을 대고 자고 나서 마비가 오는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다음으로 타박상이나 어혈로 생기는 경우. 안면에 외상을 입거나 치과치료, 발치 등을 한 후에 마비가 오기도 한다. 습열성이라고 해서 양방에서 말하는 바이러스 감염이나 중이염, 귀 뒤쪽의 유양돌기부의 비화농성 염증 등으로 생기는 마비도 있다. 마지막으로 기혈이 허약해 얼굴의 기혈순환이 잘 되지 않는 경우에도 마비가 올 수 있다.
처음에는 한쪽 눈이 감기지 않고 눈물이 많이 난다. 입술이 반대편으로 당겨지며 식사를 할 때 음식을 주르르 흘리게 된다. 이처럼 단순히 안면마비만 있는 경우보다 미각상실이나 귀 주변의 통증, 귓 속에서 소리가 나는 이명 같은 증상이 함께 나타날수록 증상은 더 심한 편이다.
간혹 한쪽 얼굴의 감각이 조금 다르게 느껴지거나 귀 뒤쪽이나 후두부에 욱신거리는 통증, 불쾌감이 느껴지는 정도의 예고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마비가 생기기 며칠 전부터 잠을 제대로 못자거나 몸살을 동반한 감기로 고생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런 예고증상 없이 갑자기 생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갑자기 이런 증상이 나타날 때는 초기에는 이상 부위를 손으로 부드럽게 마사지하거나 따뜻한 찜찔을 해서 순환을 도와주면 좋다. 그러나 신경이 재생되는 시기를 놓치면 얼굴이나 신체에 장애를 남길 수 있는 만큼 병원을 찾는 것이 가장 좋다.
안면신경마비의 종류에는 뇌경색 뇌출혈 뇌종양 등으로 생기는 중추성과 바이러스 감염, 염증이나 외상으로 인한 말초성이 있다. “중추성일 경우에 치료가 더 어려워 영구적으로 장애가 남을 수도 있으므로 자가진단이나 민간요법에 의존하다 치료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고 김유성 과장은 조언한다.
중추성과 말초성을 구분하는 쉬운 방법으로는 마비된 쪽의 이마를 찡그려 주름을 만들어 보면 된다. 만약 주름이 만들어지면 중추성, 주름이 안 되면 말초성일 가능성이 높다.
양방에서는 뇌종양이나 뇌출혈 등 뚜렷한 원인이 없으면 벨 마비로 진단하고 치료에 들어간다. 김영수 교수는 “원인에 따라 스테로이드제나 항바이러스제를 처방하고 비타민B 복합제를 먹는 것도 도움이 된다. 마비를 회복시키는 데는 안면근육 운동을 해주면 좋다”고 말했다.
눈이 감기지 않는 경우에는 각막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씻을 때 비누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하고 잠을 잘 때는 안대를 해서 눈을 보호해야 한다. 외출 때는 찬바람을 쐬지 않도록 마스크를 하는 게 좋다. 드물게는 치료가 잘 되지 않아 성형외과적인 수술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눈꺼풀이 적게 움직이거나 아래 눈꺼풀이 처진 경우 이를 바로 잡는 수술 같은 것이다.
한방에서는 기혈순환을 돕는 침 치료와 한약 복용이 주 치료법이다. 막힌 부위의 경락을 풀어주고 몸의 면역력을 높이기 위해 이기거풍산, 견정산, 가미귀비탕 등의 처방을 많이 사용한다. 이외에도 스트레스 해소를 돕는 기공치료나 찬 기운을 풀어주는 뜸치료, 적외선을 쬐는 방법, 전기자극치료, 마사지 등이 도움된다.
김유성 과장은 “안면신경마비의 원인이 뇌종양이나 뇌경색 뇌출혈 나병 매독 등인 경우는 치료성적이 나쁘다. 고혈압이나 당뇨가 있을 때도 치료기간이 길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치료기간 중 스트레스를 계속 받고 있거나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경우, 흡연 음주를 줄이지 못할 때도 치료가 더디다.
송은숙 건강전문 프리랜서
도움말/꽃마을한방병원 침구과 박쾌환 과장, 우신향한방병원 내과 김유성 과장, 한양대병원 신경외과 김영수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