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발 검증바람 휘말리면 죽는다
▲ 2005년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서울 관문사 법회에 참석했다. 법명이 ‘선덕화’인 박 전 대표는 불교계의 지지가 높다. | ||
실제로 최근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리서치가 동아시아연구원(EAI) 등의 의뢰를 받아 전국 성인 남녀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도 이 같은 추세를 반영하고 있다. 조사 결과 기독교 신자와 천주교 신자는 이명박 전 시장을 가장 많이 지지하는 반면, 불교 신자들은 박근혜 전 대표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표의 경우 국내 최대 신자 수를 자랑하는 불교 신자들 사이에서 28%의 지지율을 기록, 20%에 그친 이명박 전 시장을 앞질렀다. 반면 이 전 시장은 기독교 신자와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서 각각 38%와 30%의 지지율을 얻어 1위를 기록했다. 이같은 결과로만 보면 차기 대선에서의 ‘이명박-기독교’ 대 ‘박근혜-불교’ 구도는 이미 가시화되고 있는 셈이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이 전 시장은 국내 대표적인 대형교회 중 한 곳인 서울 신사동 소망교회 장로를 맡고 있을 정도로 ‘신심’이 깊은 반면, 불교 신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박근혜 전 대표는 사실상 무교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다만 어머니인 고 육영수 여사가 ‘대덕화’라는 법명을 갖고 있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고, 박 전 대표 역시 ‘선덕화’라는 불교 법명을 갖고 있다. 하지만 박 전 대표가 가톨릭 세례명인 ‘율리아나’도 동시에 갖고 있다는 점에서 무교, 아니면 한 발 더 나아가 ‘다종교’로 보는 게 적합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실제로 박근혜 전 대표는 지난 2004년 한나라당 대표직을 맡았을 때도 성당과 교회를 찾아 참회했는가 하면, 조계사를 찾아 백팔배를 올리기도 했다.
유력 대선 주자 가운데 가장 종교적 색깔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인물은 단연 이명박 전 시장이다. 지난 1964년 작고한 모친 채태원 여사가 워낙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관계로 이 전 시장도 모태 신앙이다. 친형인 이상득 국회부의장을 비롯한 이 전 시장의 형제 대부분도 기독교를 종교로 갖고 있다.
이명박 전 시장은 지금도 틈나는 대로 전국 교회 초청 행사에 발 벗고 참석해 단골 연사로 등장한다. 이 전 시장은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은 새벽마다 제단을 쌓은 어머님의 기도 덕분”이라며 “나를 지켜준 것은 기독교 신앙”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종교에 얽힌 잡음도 다른 주자들에 비해 끊이질 않는다. 서울시장 시절 ‘서울시 봉헌’ 발언으로 곤욕을 치른 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최근에도 이명박 전 시장은 종교 문제로 엉뚱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작년 6월 부산 벡스코에서 한 기독교 단체 주최로 열린 ‘Again 1907 in 부산’ 행사에서 일부 행사 진행자가 부산 사찰 폐지론을 거론한 게 화근이었다. 이 전 시장은 이날 행사에 축하 영상 메시지만 보냈을 뿐인데 다른 참석자들이 타 종교(불교)에 대한 민감한 발언을 한 내용이 담긴 동영상이 ‘이명박’이란 이름 석 자와 함께 인터넷에 급속히 유포되면서 본의 아니게 억울한 ‘누명’을 쓴 꼴이 돼 버렸다.
그런 만큼 이명박 전 시장으로서는 오히려 ‘불심 잡기’에 주력하고 있다. 어느 지역을 방문하든 해당 지역 교회와 함께 사찰도 반드시 찾는 게 습관이 됐다. 이 전 시장은 같은 경북 포항 출신인 지관 조계사 총무원장이나 백담사 오현 큰스님과도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 기독교 장로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유력 주자들 중 가장 종교적 색채를 강하게 내고 있다. 오른쪽 건물은 이 전 시장이 다니는 서울 소망교회. | ||
하지만 이명박 전 시장을 경계하는 불교계의 눈초리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분위기다. 지난달 19일 대한불교천태종 총무원장 정산 스님의 발언은 이를 잘 반영한다. 정산 스님은 이날 기자 간담회를 갖고 작심한 듯 이명박 전 시장을 겨냥해 “경제 대통령보다는 화합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정산 스님은 “기업은 기업인들이 하는 것이고, 대통령이 화합을 잘 이뤄 분위기를 잘 조성하면 국민소득 3만 달러도 달성할 수 있을 만큼 우리 국민들에게 저력이 있다. 다음 대통령은 무엇보다도 국민을 전체적으로 묶을 수 있도록 지역 화합과 종교 화합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산 스님은 이어 ‘본론’으로 들어가 “지난 2004년 경북도지사 1순위로 거론되던 정장식 전 포항시장은 기독교에만 시 예산 1%를 지원하겠다는 발언을 했다가 불교도들의 반발에 부딪혀 떨어져 버렸다”고도 했다.
정산 스님의 이 같은 일련의 발언은 공개석상에서도 기독교 장로로서의 가치관을 스스럼없이 밝혀온 이명박 전 시장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유독 ‘불심 잡기’에 전력을 기울여 온 이 전 시장으로서는 불교계에서 나온 이 같은 지적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특히 정산 스님이 속한 천태종은 국내 단일 사찰로는 가장 신자가 많은 부산 삼광사를 비롯, 전국적으로 신자가 200여만 명에 이른다. 그래서 이 전 시장은 정산 스님의 발언이 있은 다음날 아침 곧바로 서울 관문사를 찾아가 “다른 종교를 배려하지 못한 일부 인사들의 지나친 언행 때문에 문제가 크게 불거졌다. 그 내용을 몰랐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송구스럽다”고 해명한 것으로 알려진다.
역대 선거에서 종교계는 대선 주자들이 결코 소홀히할 수 없는 ‘표밭’으로 인식되고 있다. 자신들의 영향력을 잘 알고 있는 종교계는 대선 후보들에 대한 ‘검증’을 하겠다고 나서는 경우도 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는 대선 후보들을 상대로 검증에 나서겠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한기총 대표 회장을 맡고 있는 성남성결교회 이용규 목사는 지난 20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5월 중 기독교계 인사들이 참여하는 정책포럼을 통해 기독교적인 정책을 마련하겠다. 이를 후보자들에게 제시해서 당선 후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검증절차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독교계가 생각하는 기준과 자질 그리고 현안 요구사항을 제시해서 그 실천 여부를 검증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기독교인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이명박 전 시장에게 유리할 가능성이 높은 검증으로 비칠 수 있음은 물론이다. 특히 한기총이 62개 교단이 참여하고 있는 국내 기독교계 최대 연합단체인 점을 감안하면 이 단체의 ‘기독교적 검증’이 대선에 가져올 파급 효과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용규 목사는 “한기총은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며 “후보가 신자인지 여부에 따른 지지도 없을 것”이라며 신중한 입장을 견지했다.
최 목사는 또 “후보자의 정체성과 통일과 민생문제 해결 방안, 도덕성 등 자질을 검증할 수 있는 정책을 제안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따라서 한기총이 그동안 북핵 문제 등에 대해 보수적인 색채를 견지해온 점을 볼 때 ‘이념적 정체성’과 ‘통일’ 등의 기준을 적용해 검증하겠다는 공언은 예의주시할 만하다.
그렇다면 그동안 벌어진 대선에서 기독교계가 보수 성향의 후보에게 가까웠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같은 가정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앞서 언급한 한국리서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 2002년 대선에서 기독교 신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를 얻은 사람은 ‘보수적’인 이회창 후보가 아닌 노무현 후보였다. 당시 기독교 신자 가운데 46%가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지만, 이회창 후보를 지지한 신자는 33%에 그쳤다. 반면 불교 신자들은 44%가 이회창 후보를 선택해 기독교인들과는 사뭇 다른 투표 행태를 보인 것으로 조사됐다.
일부에선 이 같은 현상을 놓고 ‘동불서기(東佛西基)’에 따른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즉 후보 개인의 종교 여부와는 무관하게 종교의 지역적 색채가 더 큰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영남 지역에선 불교 세력이 강한 반면, 호남 지역에선 기독교 세력이 상대적으로 강하다는 사실은 이 같은 평가를 뒷받침한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등이 영남 정서를 등에 업은 ‘불교신도’였다는 점과 이들 대통령 재임 당시 불교계가 전성기를 맞았다는 일부 해석도 같은 연장선에 놓여 있다.
이러한 해석과 관련, 한 정보 관계자는 “지난 1992년 이후 국내 대선의 향방은 ‘호남 기독교 세력’이 좌우해왔다”며 “2007년 대선 역시 이들 세력의 움직임을 주시하면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고 귀띔했다. 즉 호남 기독교 세력은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지난 1992년 대선에서 ‘장로’인 김영삼 후보를 지역주의에 앞서 더 많이 선택했다는 게 정치권의 분석이다. 이어 1997년 대선과 2002년 대선에서는 연거푸 이회창 후보 대신 김대중과 노무현 후보를 차례로 선택, 박빙의 승부에서 ‘보이지 않는 손길’을 행사해 왔다는 것이다. 이명박 전 시장이 호남 지역에서 한나라당의 일반 지지율을 훨씬 상회하는 지지도를 기록하고 있는 현상도 종교의 힘에 의한 측면도 없지 않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현재 이명박 전 시장은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데다 기독교 색채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박근혜 전 대표에 비해 상대적으로 종교계의 ‘혹독한’ 검증을 받고 있다고 봐야 한다. 특히 이 전 시장은 종교 네거티브에 대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후보 검증 논란과 함께 두 후보 간의 ‘종교 표심잡기 경쟁’도 더욱 뜨거워질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역대 대선의 고비마다 물밑에서 치열하게 작용해온 종교 세력간 이해관계의 대립이 이번 대선에서도 막판 승부를 가늠할 또 하나의 결정적 변수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만은 분명하다. 이번 대선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다.
민유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