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스는 영원하다? 후배들에 배운 것 많아”
영국 프리미어리그 리버풀의 전설적인 감독 빌 샹클리가 라이벌 에버튼에게 승리를 거두고 했던 말이다.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라는 발언에서 유래했는데 이 스포츠 명언은 어쩐지 축구보다 바둑에 더 어울리는 모양새다. 신예들이 득세하는 바둑판에서 노장들의 불꽃 투혼은 언제나 주목받기 마련. 올 여름은 서봉수 9단이 바둑판을 뜨겁게 달궜다.
서 9단은 제10기 지지옥션배 신사 대 숙녀 연승대항전에서 신사팀의 첫 주자로 나서 숙녀팀의 조연우 초단을 시작으로 박태희 초단, 김은선 4단, 오정아 3단, 송혜령 초단, 김혜민 7단, 박지은 9단, 김나현 2단, 김윤영 4단까지 무려 9명을 연달아 물리쳤다. 비록 9일 열린 10국에서 오유진 3단에게 패하며 길었던 연승무대에서 하차했지만 서9단이 보여준 무용(武勇)은 올드팬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지옥션배 신사팀 첫 주자로 나선 서봉수 9단이 숙녀팀 9명을 연달아 물리쳐 올드팬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오정아 3단과의 대국 모습.
지지옥션배는 여류 vs 시니어 대결에서 올해부터 신사팀 vs 숙녀팀의 대결로 문패를 바꿔달았다. 문패뿐 아니라 대회방식도 손을 봤다. 기존에는 50세 이상 시니어 기사들만 출전이 가능했는데 올해부터는 참가 연령을 대폭 낮춰 40세 이상 기사들도 출전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최근 수년간 시니어 선수들이 여자선수들에게 계속 열세를 보였기 때문. 여류 팀이 매년 새로운 입단자를 통해 전력을 업그레이드한 반면 시니어 팀은 뚜렷한 전력상승 요인이 없었다. 하지만 시니어팀의 출전 연령을 확 낮추면서 이제는 이창호 9단까지 출전이 가능해졌다. 이 9단은 75년생 마흔둘이 됐으니까 출전이 가능하다. 하지만 과연 이 9단이 여자 기사들을 상대하는 제한기전에 참가할 것인지가 관건이었는데 흔쾌히 받아들였다는 후문. 신사팀은 이창호 9단 외에도 유창혁 9단, 서봉수 9단이 특별 시드를 받았고 한국기원 사무총장에서 기사로 돌아온 양재호 9단이 후원사 시드를 받아 전열을 재정비했다.
원래는 서봉수 9단이 첫 번째 주자로 나올 짬밥(?)은 아니었는데 후원사 지지옥션의 강명주 회장이 서 9단에게 개막전 출장을 권하면서 일이 묘하게 흘러갔다. 거기에 마침 서 9단이 출전 오더를 결정할 수 있는 주장의 자리에 있었고, 정말 본인이 첫 주자로 나오면서 지지옥션배는 첫 판부터 불타올랐다.
서 9단은 그간 지지옥션배 성적은 좋지 못했다. 조훈현 9단이 8연승을 거둔 데 비해 3연승이 최고 성적.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개막전에서 조연우를 셧아웃시킨 것을 시작으로 숙녀팀의 맹장들을 줄줄이 베어나갔다. 박태희, 오정아, 김혜민, 박지은은 흐름만 타면 5연승은 문제없을 기사들이었지만 올해는 서 9단의 연승행진에 희생양이 됐다.
사실 서봉수 9단은 농심신라면배, 지지옥션배와 같은 연승전의 원조 스타다. 서 9단은 1996년 12월 12일부터 1997년 2월 23일까지 열린 제5회 진로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중국과 일본의 대표 9명을 연거푸 쓰러뜨리고 혼자서 한국의 우승을 결정지었었다. 지금까지도 ‘진로배의 기적’으로 회자되는 바로 그 신화의 주인공이 서봉수 9단이었던 것.
그런데 그로부터 꼭 20년이 흐른 2016년. 서봉수는 ‘반상 성대결’로 불리는 지지옥션배 신사 대 숙녀 연승대항전에서 다시 숙녀 고수 9명을 차례로 격파했으니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말이 이처럼 꼭 들어맞는 경우도 찾기 힘들 것이다.
오유진 3단과의 대국이 끝나고 기자에게 환한 웃음을 보여준 서봉수 9단. 그는 이제 진정 홀가분해졌다고 말했다.
오유진 3단과의 대국이 끝난 후 서봉수 9단을 단독 인터뷰했다.
―무려 10판이었다. 꽤 힘들었을 것 같다.
“괜찮다. 매일 하는 게 아니고 월요일과 화요일에만 대국했으니 체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10연승 달성에 실패했다. 무척 아쉬울 것 같은데.
“아니다. 할 만큼 했지 않은가. 저 친구(오유진 3단), 무척 세다. 사실 연승이 길어지는 바람에 주최측에 미안한 감도 있었다. 이창호 9단도 처음 참가했으니 볼거리가 많을 텐데 혼자서 이기다 보니 ‘나이 먹은 사람이 눈치가 없다’는 말도 나온 것으로 안다(웃음). 정말 홀가분하다. 남은 기사들이 잘 해주리라 믿는다.”
―최근 성적이 무척 좋다. 무슨 비결이라도 있는가.
“다른 사람들이 영화감상을 좋아하듯 나는 기보감상 하는 것을 좋아한다. 요즘은 매일 새로운 기보가 나오기 때문에 좋은 공부재료가 된다. 대국이 없는 날에는 한국기원에 나와 국가대표팀 상비군들의 연구를 옆에서 구경하는 게 낙이다. 지켜보다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묻기도 한다.”
―후배에게 묻는 것이 창피하지 않는가.
“나는 평생 내가 뭘 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은 내가 모르는 것 투성이다. 그래서 난 ‘아무 것도 모른다’를 기본 전제로 하고 생활을 한다. 그러니 오히려 묻는 것이 취미가 됐다. 나보다 실력이 강한 후배들에게 묻는 것이 왜 창피한 일인가.”
―오늘 바둑은 어땠는가.
“초반은 좋았는데 결과적으로 우변에서 괜히 어렵게 뒀다. 마지막 팻감이 엉터리였다. 뒤에서 모는 촉촉수를 보지 못했다. 백 몇 점이 떨어져서는 거기서 승부가 끝났다.”
―바둑외길 인생이 50년을 넘었다. 본인에게 바둑이란 어떤 존재인가.
“난 어려서 공부를 못했다. 그래서 무얼 해서 평생을 먹고살지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좋아하는 바둑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직도 바둑은 재미있다. 바둑이 나를 살렸다고 생각한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서 9단이 9연승을 했으니 이젠 신사팀이 유리해졌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7연승을 하고 나오는데 동료 김수장 9단이 이제 겨우 비슷해졌으니 더 긴장하라고 하더라. 그래도 그때보다 두 번 더 이겼으니 우리가 조금 유리해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오유진과 최정이 무척 강하기 때문에 안심하기엔 이르다. 남은 기사들이 잘 해주리라 믿는다.”
서봉수 9단의 맹활약에 대해 <월간바둑> 이세나 편집장은 “초일류를 경험한 기사는 그만의 기세가 있는데 서 9단의 경우 그것이 이번에 오랜만에 한꺼번에 분출된 것”으로 분석했다. 그는 “역시 큰 경기 경험이 많은 기사라 흐름을 탈 줄 안다. 반면 여자 기사들의 경우 단체전에서 한번 밀리기 시작하면 부담감이 커져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도 그랬다. 반면 시니어들은 올해 처음 열린 시니어리그에서 스튜디오 대국과 속기를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실력 상승의 효과가 분명히 있다. 최정과 오유진이 강하지만 앞으로 5국 안에 끝난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봉수 9단의 연승을 저지한 숙녀팀의 쌍두마차가 과연 어떻게 도산검림을 헤쳐 나갈지, 주목되는 지지옥션배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