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는 눈이 멀었다고 한다. 바이런은 그를 눈먼 노인이라고 했다. 물론 호메로스를 실제 인물이 아니라고 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렇지만 바람이 그를 가난한 음유시인이라 전해주는 데는 이유가 있겠다. 기나긴 이야기, 묵직한 이야기를 품은 대륙처럼 넓은 품, 그 품 속 이야기를 풀어내는 음유시인이 장님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우니까. 대륙이 전해주는 이야기에 집중하며 삶의 비밀을 들려주는 음유시인이 삶의 비밀을 엿본 대가로 신에게 눈을 바친 것은 아닐까.
실제로 북유럽의 제우스라 불리는 오딘도 지혜를 얻기 위해 미미르의 샘에 눈을 바쳤다. 델피 신전의 사제 테이리시아스도 눈 먼 장님이었다.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평범한 우리들의 뒤통수를 치며 심안으로만 보이는, 진짜 봐야 하는 것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래서 자신의 눈을 빼버린 오이디푸스가 영웅인가 보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로부터 테베를 구하고 인간 중의 가장 위대한 자가 되어 테베의 왕이 된다. 그러나 인간 중의 가장 위대한 자의 지혜도 그 자신을 구하지는 못한다. 세상의 비밀을 푼 오이디푸스의 지혜는 자기 삶에 대해서는 맹목이었으니까.
결국 오이디푸스는 자기를 보지 못한 자기 눈을 저주한다. 눈 멀어라, 눈 멀어라! 그렇게 눈을 빼버리고 그는 방랑자가 된다. ‘나’를 보지 못하고 왕으로 사는 것보다 내가 버려진 곳에서 다시 시작하며 ‘나’는 누구인지 물음을 던지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맹인 방랑자로 사는 삶을 선택한 오이디푸스를 통해 심안으로 보면 가진 것을 다 내놓는다 해도 아깝지 않는 세계가 있음을 배우게 된다.
그리스는, 고대 그리스는 르네상스 시대가 돌아가 보고자 했을 만큼 묘한 매력이 있다. 바로 ‘나’를 긍정하는 매력, 비극의 매력, 자유의 매력! 내게 그리스는 자유고, 비극이고, 그리고 “너 자신을 알라”다.
‘나’를 알아가는 대가로 모든 것을 내준다 해도 운명은 결코 내가 내준 그 대단한 것을 아깝다 하지 않는다. 그만큼 ‘나’는 위대한 존재다. 그리스는 지상에서 우리가 일궈내야 할 과제는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되는 것이라고, 그것이 자유라고 말하는 것 같다. 가혹한 운명으로 삶이 산산조각 나도 괜찮다. 산산조각 난 삶을 긍정하며 삶의 잔해 속에서 드러나는 진실을 감당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