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13세 이상 ‘성적자기결정권’ 제각각 해석…성범죄 피해 청소년 판결 ‘그때그때 달라요’
지난 6월 여성인권단체 소속 30여 명이 지적장애 여아를 성매수한 가해자에게 불법성이 없다는 법원의 판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연합뉴스
서울의 한 학원 강사 A 씨(여·32)는 지난해 10월 9일 오후 3시께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 B 군(당시 만 13·중2)을 자신의 오피스텔로 데려가 성관계를 가졌다. B 군은 처음에는 당황하고 거부하는 의사를 표현했지만 이후 같은 달 25일까지 3차례 더 A 씨와 성관계를 가졌다. A 씨가 법정에 서게 되자 B 군은 “성관계를 할 때 당황스럽고 부끄러웠지만 A 씨를 사랑하고 있다”며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인천지법 부천지원은 이 사건에 대해 A 씨에게 ‘성적 학대’의 책임을 물어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판사는 “피해 학생이 성인에 가까운 신체를 가졌더라도 성적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의 성적 가치관이나 판단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시했다.
A 씨는 B 군이 성관계를 거부하지 않아 합의 하에 이뤄진 것으로 무죄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린 B 군이 성적으로 무지한 상태에 있었고 A 씨가 이를 이용해 자신의 성적 만족을 채운 것이므로 일반인의 관점에서 ‘성 학대’로 보기에 충분하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었다.
이처럼 성인과 아동·청소년 간 성관계에 있어 처벌 여부를 가리기 위해서는 피해 아동·청소년이 사건 당시 ‘성적 자기 결정권’을 행사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현행 아동·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만 13세 미만 아동에 대해서는 성관계에 본인의 동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미성년자 의제강간죄가 적용된다. 그러나 만 13세 이상부터는 대가 없이 성관계를 가지거나 강제성이 없을 경우, 특히 피해 학생 본인이 “좋아한다”는 호의를 가지고 합의 하에 성관계를 가질 경우에는 이를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다시 말해 현행법상 미성년자의 성적 자기 결정권은 만 13세 이상부터 인정된다는 것이다.
사건 당시 중학교 2학년으로 만 13세 이상에 해당하는 B 군에게는 법적인 성적 자기 결정권이 인정된다. 그러나 재판부는 B 군을 “성적 가치관이나 판단 능력을 갖추지 못한 성적 무지 상태”로 규정해 성적 자기 결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합의 하의 성관계가 아닌 성 학대가 이뤄진 것으로 판단했다.
비슷한 사건이지만 피해 학생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인정해 ‘혐의 없음’으로 종결된 사건도 있다. 지난 2010년 10월 서울 화곡동 소재의 한 중학교 기간제 여교사(당시 35)가 자신이 담임을 맡고 있던 3학년 학생(당시 만 15)과 영등포 역사 내 지하주차장에 주차돼 있던 자신의 승용차에서 성관계를 가졌다. 이 사실은 교사가 피해 남학생에게 보낸 “좋았다”는 내용의 휴대전화 메시지를 학부모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하면서 밝혀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경찰 수사 단계에서 무혐의로 종결됐다. 당시 수사를 맡았던 서울 강서경찰서는 “피해 학생이 만 13세 이상이고 대가 없이 합의 하에 이뤄진 성관계로 판단되기 때문에 현행법 상 처벌할 근거가 없다”고 밝혔다. 피해 학생이 스스로 성관계에 응했고 강제성을 밝혀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성적 자기 결정권이 인정된 것이다.
‘떡볶이 화대 성매매’로 세상에 알려진 지적장애 아동 C 양(당시 만 13세 2개월)의 성폭행 사건은 하나의 사건을 두고 두 재판부가 상반된 판결을 내놨다. 한 쪽은 C 양이 지적장애를 앓고 있어 성적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능력이 부족하다고 보았고, 다른 한 쪽은 C 양이 자발적으로 성매매에 응함으로써 성적 자기 결정권을 행사했다고 판단했다.
IQ가 67~70으로 7살 아동 수준인 C 양은 사건 당시 엄마의 휴대전화를 가지고 놀다가 망가뜨린 뒤 혼이 날 게 무서워 무작정 가출했다. 이후 스마트폰 채팅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단순히 ‘잘 곳’을 찾던 C 양에게 10 여 명의 남성들이 접근, C 양을 성폭행한 뒤 도주했다. 뒤늦게 사실을 안 C 양의 어머니는 피의자로 특정된 6명의 남성에 대해 형사 소송 외에도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C 양 측의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린 서울서부지법 민사7단독 하상제 판사는 “C 양이 만 13세의 아동으로 그 지능지수에 비춰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C 양의 지적장애를 인정하고, 가해 남성이 이런 점과 C 양이 가출해 곤란한 상태였다는 점을 악용해 성적 만족을 얻은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같은 법원의 민사제21단독 신헌석 판사의 재판에서는 C 양 측의 ‘완전 패소’로 1심이 종결됐다. 이 재판에서는 C 양이 직접 채팅방을 개설해 숙식할 곳을 구했다는 점, C 양을 성폭행한 남성이 떡볶이 등을 사준 것을 ‘화대’로 인정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C 양이 성적 자기 결정권을 행사해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했다고 판단한 것. 신 판사는 “C 양이 지적장애아이긴 하나 이런 사유만으로 사건 당시 C 양이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상태였다고 볼 수 없다”고 C 양 측의 청구를 기각했다.
이처럼 동일한 법률을 놓고도 수사기관부터 사법기관까지 제각각으로 해석하고 있어 혼란을 심화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 한 성범죄 전문 법무법인 소속 변호사는 “법적 측면에서 엄밀히 따지면 미성년자의 성적 자기 결정권은 만 13세 이상부터 적용돼야 한다”라며 “재판에서는 사건의 구체적인 상황과 배경을 보고 판사의 가치관을 개입해 판결을 내리기 때문에 성적 자기 결정권에 대해 주관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국회 차원의 논의도 시작됐다. 김승희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7월 10일 미성년자를 상대로 한 의제 강간죄의 피해자 기준 연령을 만 13세 미만에서 만 16세 미만으로 상향 조정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발의한 것. 이렇게 될 경우 미성년자의 성적 자기 결정권은 만 16세 이상부터 인정된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