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정’ 친일파 경찰 갈등·고뇌 조명…‘고산자’ 신념으로 뭉친 김정호의 삶 복원
물러설 수 없는 승부를 앞둔 두 영화의 주인공은 관객과 오랫동안 신뢰를 나눠온 배우 송강호(49)와 차승원(46)이다. 그동안 출연하는 대다수의 영화로 흥행에 성공한 송강호, 최근 TV 예능프로그램 출연으로 인지도를 한껏 높인 차승원은 각기 다른 개성과 경쟁력으로 관객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추석을 앞두고 이들 두 배우를 차례로 만나 각자 영화를 어떻게 완성했는지, 또한 그 작품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관객에 전하려 하는지 들었다.
# <밀정>의 송강호…회색의 시대 살아가는 일본 경찰
<밀정>(제작 워너브라더스코리아)은 1920년대 무장 독립운동을 벌인 의열단의 활약과 이들을 쫓는 일본 경찰, 그리고 이들이 한데 얽힌 채 서로를 속고 속이는 관계를 그린 영화다. 시대극을 차용한 스파이 장르로 볼 수 있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아픈 역사의 시대를 배경으로 택한 만큼 영화의 온도는 상당히 뜨겁다.
송강호는 과거 독립운동에 몸담았지만 지금은 변절해 일본의 경찰이 된 주인공 이정출을 맡아 또 한 번 자신의 역량을 아낌없이 펼친다. “나라가 독립될 것 같으냐?”라고 말하는 영화 속 그는 엄연한 ‘친일파 경찰’이지만 의열단의 포섭 대상이 되면서 내적 갈등과 함께 혼란을 겪는다. 보이지 않게 변화하는 그 인물을 맡은 송강호는 일찌감치 자신의 대표작으로 기록될 만한 작품을 완성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얻고 있다.
“영화 <밀정>은 선과 악의 구분이 아니다. 이분법적인 역사관도 아니다. 마치 회색과 같은 느낌이다. 붉은 색도, 검은 색도 아닌 그런 느낌. 아무리 좌절의 시대를 살지만 그렇게 시대를 관통하면서 사람이 갖게 될 현실적인 고뇌와 갈등을 조명하려 했다.”
그렇다고 송강호의 극 중 모습을 ‘독립투사’로 규정하기도 어렵다. 다만 영화에서 변화를 거듭하는 그의 모습은 오히려 현실적이고 진한 인간미도 풍긴다. 송강호는 “만약 실제 이정출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나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 아닌가, 그게 바로 인간적인 면모 아닌가 생각한다”고도 말했다.
사실 최근 영화계에서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삼은 영화가 2~3년 동안 꾸준히 이어졌다. 그 가운데 지난해 1200만 관객을 모은 전지현 주연의 <암살>처럼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도 탄생했다. 현재 상영 중인 손예진 주연의 <덕혜옹주> 역시 5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배우 김민희와 박찬욱 감독이 함께한 <아가씨> 또한 400만 관객의 선택을 이끌어냈다. 자주 반복된 탓에 더는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어려울 것 같은 이 시대는 <밀정>을 통해 또 다른 경쟁력을 과시한다.
실제로 <밀정>은 앞서 나온 여러 시대극과 분위기가 다르다. 항일의 메시지, 남녀의 사랑과도 거리가 멀다. 누가 과연 ‘내 편’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혼돈의 시대에 관한 이야기다. 송강호가 처음 이 영화의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 마음이 흔들린 이유도 “다르게 접근하는 시도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밀정>의 상영시간은 2시간 20분에 달한다. 최근 한국영화가 대부분 2시간을 꽉 채우고 있지만 그와 비교해도 분량이 상당하다. 자칫 관객이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영화는 단 한 장면도 허투루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완성도를 자랑한다.
송강호가 영화가 진행되는 도중 만들어내는 블랙 코미디의 상황 역시 관객의 긴장을 풀어주는 힘이다. 유머의 설정에 대해 송강호는 “의도라기보다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지는 웃음”이라고 했다.
“어떤 장면에서도 일부러 ‘웃겨야지’ 하는 마음은 없었다. 유머를 계산하지도 않았고. 다만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에는 희로애락이 있지 않나. 아무리 슬프고 아무리 기쁜 상황이라 해도 그 반대의 감정은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밀정>을 보다 웃게 된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자연발생적인 해프닝이라고 본다.”
송강호는 이번 <밀정>에서 자신의 오랜 영화 동지인 김지운 감독과 재회했다. 이들이 합작은 벌써 네 번째다. 첫 만남은 1998년 개봉한 김지운 감독의 장편 데뷔작 <조용한 가족>이다. 송강호는 이 영화에 출연하면서 비로소 영화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본격적으로 알리게 됐다. 연극무대에서 활동하던 그가 <넘버3>의 단역을 거쳐 이름 있는 배역으로 존재를 각인시킨 계기였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만남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2000년에는 영화 <반칙왕>을 함께 만들었고, 2008년에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통해 호흡을 이어갔다. 잦은 합작의 배경은 그만큼 서로를 향한 믿음이 강하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또한 배우와 감독이 서로의 실력에 갖는 기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만남의 연속이다.
송강호는 그런 김지운 감독을 “믿는 영화 동지이자 선배”라고 표현한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이후 이번 <밀정>까지 8년의 시간이 걸렸지만 믿음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송강호를 설레게 하기도 했다.
“김지운 감독님이 얼마 전까지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찍느라 잠시 자리를 비웠던 것뿐이다. <밀정>을 시작으로 앞으로 한국영화를 더 많이 할 것 같다. 나 역시 한 명의 배우이자 관객으로 감독의 영화를 더 자주 만나고 싶은 마음이다.”
영화 <밀정> 스틸 컷
송강호는 <밀정>을 완성하면서도 전적으로 감독의 의도와 시도에 동의했다. “김지운 감독은 어떤 얄팍한 계기에 따라 변화하는 인물을 그리지 않으려 했고 나도 그 뜻에 공감했다”는 송강호는 “사건과 경험이 하나둘씩 쌓이면서 변화하는 인물의 깊이를 그리려는 영화의 시도가 흥미롭다”고 했다.
송강호의 설명처럼 <밀정>은 단지 스파이를 쫓는 스타일리시한 첩보전에 그치지 않는다. 미처 알려지지 않았지만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곳에서 독립을 위해 싸우고 떠난 이들의 감춰진 삶을 비춘다. 한 세대가 또 다른 세대로 넘어가는 상황도 함께 담는다. 송강호는 그 과정을 관객이 주목해주길 바라고 있다.
“나는 늘 새로운 세상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 실제로 새로운 세상을 바란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내가 참여하는, 내 작품 속 세상을 통해서나마 새로운 세상을 완성해 보이고 싶은 거다. 배우로서 작품을 대할 때 갖는 나의 마음이 그렇다.”
# <고산자> 차승원…첫 실존인물 완성
차승원은 요즘 최고의 전성기다. 벌써 2년째 이어지는 인기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쌓아온 인지도가 있지만 지금 대중이 가진 관심을 촉발하게 한 원동력은 케이블채널 tvN의 예능프로그램 <삼시세끼>에서 보여주는 모습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차승원은 마치 요리의 ‘신’으로 불러야 할 것 같은 만능재주꾼으로 활약하며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 같은 영향력을 스크린으로도 옮겨가기 위한 준비도 마쳤다. <고산자>는 그가 연기를 시작하고 처음 소화한 실존인물이라는 사실에서부터 호기심을 자극한다. 물론 그만큼 부담도, 책임도 큰 상태에서 시작한 작업이지만 차승원은 “정직하게 그리려 했다”고 돌이켰다.
<고산자>는 조선후기 지리학자이자 실학자인 김정호의 삶을 그린 영화다. 단지 대동여지도를 완성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는 김정호는 실제로 당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왜 지도에 주목했는지 등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으로 남지 않았다. 영화를 촬영하기에 앞서 하나의 큰 숙제가 차승원 앞에 놓였던 셈이다.
차승원은 연출자인 강우석 감독으로부터 출연 제안을 받고 3주간 어떠한 답도 내놓지 못했다고 했다. 내심 “해야 한다”는 결심은 섰지만, 실존인물이 가진 상징성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은 탓이다.
“나만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영화에는 김정호 외에도 여러 인물이 나오고, 그들이 함께 이야기를 완성한다. 내가 엄청난 십자가를 짊어진다고 생각지 않았다. 김정호를 어떻게 그려야 할지 고민했지만 일단 촬영을 시작한 이후에는 전적으로 감독님에 맡겼다. 물론 어떤 부분에서는 아이디어를 제안하기도 했다. 그렇게 서로 맞춰가면서 하나씩 완성할 수 있었다.”
<고산자>가 영화로서 가진 미덕은 알려지지 않은 김정호의 삶을 ‘복원’하는 데만 있지 않다. 백두산 천지에서부터 제주도와 마라도에 이르기까지, 김정호가 밟았을 법한 여정에 따라 국토의 상징들을 빠짐없이 스크린에 닮았다.
차승원은 영화의 첫 촬영 날부터 당장 백두산 천지에 올라야 했고, 한겨울 얼음이 언 깊은 북한강을 홀로 걸어야 했다. 대동여지도를 완성하기까지, 김정호가 걸었음직한 발자취를 차승원이 그대로 따랐다. 1년의 시간을 온전히 <고산자>에 쏟아 부었다.
차승원은 확고한 신념으로 시대를 살아간 한 인물의 마음을 온전히 관객에 전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사람의 모습이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연기하다보니 김정호 선생은 일면 미친 사람 같기도 했다. 그런데 왜 대동여지도를 목판으로 만들었을까를 생각하면 답은 달라진다. 그분이 가진 신념이 느껴진다.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남을 위한 지도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목판을 택한 거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김정호의 마음을 한 번쯤 생각해보길 차승원은 원하고 있다. “올해 1월부터 지금 9월이 되기까지 뉴스에서 기분 좋은 소식을 접한 기억이 없다. 답답한 지금 사회에 김정호처럼 신념이 강한, 남을 위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 스틸 컷
차승원은 <고산자>의 관람등급이 ‘전체 관람가’로 나온 사실에 특히 반색했다. 가족 단위 관객을 포함해 다양한 연령대가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나 역시 어릴 때 역사극을 보면서 실존인물을 연기한 배우를 그 인물 그대로 받아들였던 경험이 있다. 그 잔상은 지금도 계속된다. 전체 관람 가 등급이다 보니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김정호를 만날 수 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를 보고 김정호의 잔상이 관객에 남길 바라는 마음이다.”
출연하는 작품의 수가 늘면서 자연히 경험이 쌓이고, 더불어 나이도 들어가는 차승원은 “나이 탓인지 요즘은 조금씩 변화하는 나를 느낀다”고 했다. 가장 달라진 점은 “철저한 시간 약속”이다. 과거와 달리 “촬영 현장에도 빨리 가려 하고, 시간을 철저하게 지키려 한다”며 “되도록 이른 시간이 일어나 하루를 일찍 시작하려고도 한다”고 말했다.
“혹자는 그런 나에게 나이 들어서 아침잠이 없어져서 그렇다고 한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지금 나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지금껏 해온 길을 돌아보는 일이 더 중요한 시기 같다.”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