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리던트’들 차례상보다 책상 앞에
취업난을 뚫고 직장에 취업했어도 끊임없이 이직과 승진을 위해 자기 계발 경쟁에 내몰린 현실이 직장인들의 명절 풍속도마저 바꾸고 있다. 연합뉴스
“자, 102번 문제. 이런 문제를 보기 앞서 문법정리부터 하고 갈게요. 능동구조의 spend 동사. 보통 뒤에 목적어로 시간 금액이 나와서 얼마의 시간금액을 쓴다 그리고 뒤에 연결되는 내용이 in ing인데 여기서 in은 생략 가능하죠. 토익은 주로 spend 하면 시간금액 다음에 in이 생략된 형태로 ing가 정답처리되는 문제를 많이 출제해요. 올 초에는 spend 다음에 시간금액 주고 on+명사를 정답처리했던 문제도 있고. 여러분, 꼭 기억하세요.”
대학 입시학원 강의가 아니다. 평일 오후 7시 30분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토익 강의 풍경이다. 의류회사 마케팅 직군에서 근무하는 1년차 직장인 최 아무개 씨(29)는 이달부터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토익학원에 다니고 있다. 최 씨가 평일 오후 바쁜 업무를 끝내고 토익학원으로 향하는 이유는 바로 이직 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최 씨는 “이번 여름 토익점수가 만료돼 다시 높은 토익 점수를 받고 싶어 몸이 힘들더라도 이번달에는 일과 공부를 병행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최 씨는 오는 9월 25일 시행되는 토익 시험을 위해 추석 연휴도 반납할 생각이다. 그는 “학원에서 추석 특강도 예정돼 있어 연휴 기간에는 고향에 내려가기보다는 이곳(종로)에서 연휴를 보낼 예정”이라고 말했다.
지난 4월 한국토익위원회와 한 취업포털에서 남녀직장인 679명을 대상으로 자기계발 현황에 대해 조사를 실시한 결과, 자기계발을 하는 이유에 대해 응답자의 45.7%가 ‘더 나은 직장으로의 이직’을 위해 자기계발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기업 물류 부문에서 일하는 직장인 이승훈 씨(28)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낸다. 금융 관련 자격증을 따기 위해 매일 저녁 집에서 인터넷 강의를 듣는다. 강의가 끝나면 새벽까지 자기소개서를 쓴다. 이 씨는 “물류업이 적성에 맞지 않아 좀 더 안정적인 금융 공기업 입사에 도전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 씨는 평소 야근과 술자리가 잦아 자기소개서 준비를 제대로 못한 탓에 닷새간의 이번 추석 연휴를 최대한 살려보기로 했다. 그는 “10월에 원하는 금융 공기업 시험이 몰려 있어 이번 연휴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며 “추석 끝날 때까지 자기소개서 10개를 쓰는 게 목표다. 자기소개서 온라인 특강도 신청했고 지인들을 통해 첨삭도 받아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실제 한 온라인 취업준비 커뮤니티를 살펴보면, 이 씨처럼 직장인이면서 자격증, 외국어 공부 등 이직 준비를 하는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직장인들만 참여하는 단기 스터디그룹도 많다. 이들은 서로의 자기소개서를 서로 첨삭해주거나 공채시험 관련 정보를 공유한다. 이 씨는 “직장인 첨삭 스터디의 경우, 서로 다른 업종에 관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어 자기소개서 작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들은 온라인 강의도 함께 듣는다. 한번에 수십만 원 하는 인적성 평가 강의나 자격증 대비 강의를 듣는 게 아무리 직장인이라도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이 씨는 “한 아이디로 PC 두 대에 접속할 수 있기 때문에 스터디원과 돈을 나눠 내기로 했다”며 “인적성 같은 경우 유명한 사람한테 배우려면 그만큼 돈이 많이 들어 아무래도 혼자 내기에는 부담되는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카드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는 김 아무개 씨(29)는 이번 추석 연휴 동안 백화점 판매 단기 아르바이트를 해볼 생각이다. 다음달이면 그동안 선망하던 백화점 채용 공고가 뜰 것으로 예상돼 지원하기 전에 관련 직무 경험을 한 번이라도 쌓고 싶기 때문이다. 김 씨는 2년 동안 카드사에서 사무직을 보며 자신의 적성이 아니라고 판단, 얼마 전 이직을 결심했다. 김 씨는 “외향적인 성격인데 사무실에서 컴퓨터만 보고 있으려니 너무 힘들더라”면서 “영업관리 부문 지원 전에 이력서에 한줄이라도 관련 직무 경험을 넣고 싶어 백화점 단기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모 대학 경력개발팀 관계자는 “공채 시즌이 시작될 무렵이면 취업에 성공한 졸업생들에게도 취업 관련 문의가 자주 들어오는 편이다. 올해는 특히 상반기에 채용 공고가 많이 없었기 때문에 하반기에 기존에 취업을 준비하던 대학생들 외에도 이직을 준비하는 직장인들까지 많이 몰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평소 바쁜 업무로 준비가 소홀했던 직장인들은 추석이 이직을 위한 황금 같은 시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명절에 회사에 일부러 출근해 내부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는 직장인도 있다. 지난 7월 보험회사로 이직한 박 아무개 대리(30)는 이번 추석 연휴 근무를 자청했다. 업종을 바꾼 탓에 공부할 것도 많고, 업무 적응이 아직 안 됐기 때문이다. 그는 회사에서 요구하는 동영상 강의를 들으러 출근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박 씨가 연휴 근무를 자처한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경력 직원으로서 상사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 고과점수를 잘 받기 위함이다. 박 씨는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경력직이 연휴까지 반납하면 회사에 더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을 것이란 기대심리가 있다”며 속내를 밝혔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그는 추석 연휴를 회사에서 부장과 보낼 예정이다. 그는 “금요일, 토요일에 출근한다고 했더니 부장님도 회사에 나오신다 하더라. 알고보니 기러기 아빠였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대기업 5년차 직장인 홍 아무개 씨(32)는 이번 가을 진급 심사를 앞두고 긴장의 고삐를 바짝 죄고 있다. 홍 씨에게 이번 추석 연휴는 불행 중 다행이다. 10월부터 치르게 될 승진 시험에 대비해 공부할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관련 서적을 놓은 지 한참 됐다. 회계, 경영, 경제 등 어느 하나 쉬운 게 없어 이번 추석에 마음잡고 공부해 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의류수출업체 해외영업직에 근무하는 임 아무개 씨(33)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그도 홍 씨처럼 승진시험을 앞두고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다. 임 씨의 발목을 잡는 것은 영어 프레젠테이션. 그는 취업 전 해외연수도 다녀왔지만 임원들 앞에서 하는 영어 프레젠테이션은 아직도 부담스럽다. 이 때문에 임 씨는 요즘 일주일에 한번 영어 PT 스터디 모임에 나간다. 임 씨는 “영어 면접 준비 외에도 컴퓨터 활용 능력, 봉사 실적도 승진이나 연봉협상 자료에 이용돼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긴 추석 연휴를 이용해 성형을 하려는 직장인도 늘고 있다. 대기업 마케팅팀에 근무하는 손 아무개 씨(27)는 이번 추석 연휴 기간에 입꼬리 올리는 수술을 받을 예정이다. 올해 추석의 경우 이틀의 연차를 사용하면 최대 9일을 쉴 수 있어 평소 성형수술을 고민하던 손 씨는 이참에 실행에 옮기기로 결정했다. 손 씨는 “연휴가 시작되는 9일 수술 일정을 잡으려고 두 달 전에 예약했다”며 “평소 졸려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며 성형 이유를 밝혔다.
이들에게 추석 연휴는 외모 콤플렉스를 해결하기 위한 ‘골든 타임’이다. 이는 현실에 충실하기 위해 자신의 외모 경쟁력에 시간을 투자하려는 젊은층의 트렌드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추석 연휴는 이직이나 승진을 염두해 둔 직장인들에게 최적의 준비기간이 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 온라인 취업포털 <사람인>이 기업 인사담당자 880명을 대상으로 ‘채용 시 지원자의 외모 평가 여부’를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3.8%가 ‘평가한다’고 답했다.
취업난을 뚫고도 또 다시 무한 경쟁에 내몰린 직장인들의 이같은 현상은 직장 평균 근속연수가 짧아진 불안한 고용현실에 의한 결과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사회동향 2015’를 보면 지난해 임금 근로자의 52.8%가 3년 미만 단기 근속자로 조사됐다. 반면 10년 이상 근속자는 20.6%에 그쳤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경우 5년 이상 근속자 비중은 평균 53.4%다.
김원섭 고려대 사회학 교수는 “직장에서 오래 일할 수 있는 현실이라면 자연스럽게 직장 내에서 필요한 기술이나 능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겠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다보니 끝없는 자기계발을 통해 따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경향이 이어지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상훈 기자 ksangh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