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난 유전자가 ‘괴물’ 낳는다
▲ 항암치료 중인 서울대병원의 소아암 환자들. | ||
현재 의학계에서는 약물 치료나 대체요법 등을 통해서는 모든 암을 근본적으로 치료하거나 예방할 수 없다는 잠정적 결론을 내리고 유전자에서 그 열쇠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일요신문>에서는 2회에 걸쳐 국내 의료진들의 암 정복을 위한 유전자 연구 실태와 유전자 변이를 막는 여러 가지 방법을 알아본다.
지난해 말 국내 연구진에 의해 한국인의 게놈 지도가 최초로 완성됐다. 이길여 가천의대 암·당뇨연구원(원장 김성진)은 한국생명공학연구원 국가생물자원정보관리센터와 공동으로 김성진 박사(54)의 게놈 지도를 만들어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게놈 지도와 그 해독 결과가 공개된 사람으로는 세계적으로 다섯 번째, 국가로는 네 번째가 됐다.
유전자(Gene)와 염색체(Chromosome)를 합성한 용어가 게놈(Genome=유전체, 미국식 발음은 지놈)으로, 게놈 지도는 인간의 유전자를 구성하는 약 30억 개의 염기 순서를 지도로 만든 것이다. 게놈 지도를 분석하면 당뇨나 고혈압, 뇌졸중, 알츠하이머병 같은 질병과 관련된 유전자가 몇 개나 되는지, 눈 색깔 같은 신체 특징과 관련된 유전자 돌연변이를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등의 정보를 알 수 있다. 김 박사의 게놈 지도를 분석한 결과, 약 30억 개의 염기 중 323만 개가 돌연변이를 일으킨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에 완성된 김 박사의 게놈 지도는 앞으로 한국인 표준 게놈 지도로 활용된다. 종전엔 한국인의 유전자를 연구할 때도 2003년 국제인간게놈프로젝트로 만들어진 미국인의 게놈 지도를 표준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앞으로는 일정 비용을 내면 자신의 게놈 지도를 해독할 수 있는 날도 머지않았다. 3~5년 뒤에는 100만 원 정도의 비용으로 해독한 개인 게놈 지도를 휴대기억장치(USB)에 넣어 다닐 수 있다는 다소 희망 섞인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한국인 게놈 지도에 대한 연구가 더 진행되고 대중화되면 환자마다 적합한 의약품을 처방하는 것은 물론 위험질환에 미리 대처하는 것도 훨씬 쉬워진다. 이른바 ‘맞춤의학’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현대의학의 숙원인 암 정복 역시 게놈 지도에 관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보다 앞당길 수 있다. 박양호 BRM연구소(www.brmrnd.com) 실장은 “암도 이제 유전자만 조절하면 부작용이 많은 화학항암제나 방사선 치료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며 “암 환자와 가족들이 유전자를 조절하는 여러 가지 방법에 관심을 갖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암의 발생과 진행이 모두 유전자의 이상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1980년대 초·중반 암 연구에 분자유전학이 접목되면서 밝혀지기 시작했다. 현재는 인간의 유전자 수가 대략 3만 개 정도이고, 모든 인간의 DNA가 99.9% 똑같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단지 0.1% 때문에 수많은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같은 암이라도 사람마다 발병 기전이 다른 것도 바로 이 0.1%의 차이 때문이다.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 몸은 ‘세포’라는 기본 단위로 이뤄져 있다. 세포가 분열하는 과정에서 잘못을 일으킬 확률은 4분의 1로, 어떤 요인으로 인해 세포의 증식과 죽음을 조절하는 유전자가 변이되면 암세포가 만들어진다. 정상적인 세포는 신체가 필요로 하는 경우에만 증식이 일어나고 성장신호가 사라지면 즉시 멈춘다. 또 게놈에 이상이 생기면, 성장을 멈추고 변이가 일어난 게놈을 교정해 복구한다. 이렇게 해도 게놈이 회복되지 않을 때는 세포 스스로 자살해 버린다.
▲ BRM연구소 박양호 실장은 “암도 유전자만 조절하면 부작용 많은 항암치료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한다. | ||
“이런 요인에 자주 노출될수록 유전자에 이상이 생겨 세포증식이 필요 없는데도 계속 증식이 일어나고, 이상이 생긴 게놈을 복구하지 못한다. 또한 세포자살 유전자에도 문제가 생겨 변이세포를 제거하지 못한다”는 것이 박양호 실장의 설명이다.
그동안 암과 관련된 것으로 밝혀진 유전자는 300여 가지. 물론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에는 암을 일으키는 암 유전자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암을 억제하는 유전자도 있다.
우선 ‘암 유전자’는 정상일 때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잘 조절되지만, 변형되면 신호를 무시하고 세포성장을 계속 촉진시킨다. 세포증식인자나 세포증식인자 수용체, 신호전달에 관여하는 인자, 핵 내에서 유전자의 발현 억제에 관여하는 인자 등의 유전자가 이상을 일으키면 암 유전자가 된다. 이런 유전자들은 한 가지 또는 그 이상의 발암요인에 의해 활성화되어 암 유전자로 변한다.
가장 흔한 암 유전자로는 신호전달에 관여하는 ras 유전자가 있다. 백혈병과 관련이 있는 N-ras, 위암이나 췌장암 대장암 등과 관련되는 K-ras, 방광암과 폐암 등에서 보이는 H-ras 등이 그것이다.
ErbB-2 유전자는 위암이나 난소암, 방광암 등에서 30~40%가량 많이 발견된다. 또 c-Myc 같은 암 유전자는 자궁경부암·유방암·폐암·위암 등 대부분의 고형암에서 증폭된 상태를 보인다. 교감신경에 생기는 암인 신경아종에서는 N-Myc 유전자가, 소세포 폐암에서는 L-Myc 유전자가 증폭돼 있다.
정상 세포에는 암 유전자와 달리 암을 억제하는 ‘암 억제 유전자’도 존재한다. 이들 유전자에 유전적 변이가 일어나면 세포증식이 조절되지 못해 암세포가 된다.
예를 들어 1979년에 발견된 p53이라는 암 억제 유전자는 DNA 이상을 막고, 이상이 생길 경우 회복 또는 세포자살(Apoptosis)을 유도한다. 하지만 p53이 변이되면 세포보호 기능을 상실하고 유전자 변이를 막지 못한다. 대장암의 70%에서 p53 유전자가 관찰되고 비소세포 폐암에서는 50%, 소세포 폐암에서는 100% 발견된다.
p53유전자를 포함해 여러 가지 암 억제 유전자를 제거한 쥐를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p53유전자 하나만 없어도 쥐는 암에 걸릴 확률이 높아졌다. 두 개의 p53 유전자가 없으면 생후 몇 주 지나지 않아 암이 발생됐다.
혈액이나 조직 등을 통해 암 관련 유전자를 검사하면 암을 조기에 진단하고 치료성과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백혈병 같은 혈액암은 주로 현미경으로 암세포의 모양을 구분해 진단하는데, 세포의 모양이 비슷한 경우가 많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DNA 칩을 이용해 유전자의 발현패턴을 분석하면 서로 다른 혈액암을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다.
네덜란드 암연구소에서는 DNA 칩을 이용해 유방암 환자들을 분석, 암 치료 후 재발률이 높은 환자에게 특히 발현변화가 심한 암 관련 유전자를 확인했다. 이 결과를 응용해 DNA 칩으로 유방암 재발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검사하면 치료 후에도 재발 방지를 위해 계속 치료해야 하는 환자와 그렇지 않은 환자를 구분할 수 있다.
분자 생물학과 유전학의 발달로 암세포만 골라 죽이는 ‘표적 치료제’도 속속 개발 중이다. 특정 암과 관련된 신호체계가 밝혀져 정상세포는 거의 죽이지 않기 때문에 기존의 항암제보다 부작용이 적다.
가장 대표적인 표적 치료제가 바로 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이다. 2001년도에 미국식품의약국에서 만성 골수구성 백혈병의 치료약으로 승인받은 약으로, 기존 항암 약물치료를 받은 경우보다 생존율이 높아 글리벡을 사용한 환자는 5년 생존율이 86%로 나타났다.
이후 다양한 표적 치료제가 개발돼 임상 시험 중이거나 치료에 쓰이고 있다. 이들 표적 치료제는 크게 암세포를 직접 공격하는 것과 주변의 혈관을 공격하는 두 가지가 있다. 암세포를 직접 공격하는 치료제는 암세포의 생성과 성장에 관여하는 단백질이나 효소를 차단시키거나 기능을 억제시킨다. 아니면 암세포 표면의 특정 항원에 항체가 달라붙게 만들어 암세포를 사멸시킨다. 암세포에 영양을 공급하는 주변 혈관을 공격하는 방식으로는 혈관성장인자 수용체 억제제를 쓴다.
다만 표적 치료제는 표적이 되는 특정 단백질이나 효소가 있는 경우에만 효과가 있다. 이것이 암을 유발하는 대표적인 단백질을 공격하는 현재의 표적 치료제 대신 개개인의 유전자에 맞는 맞춤형 표적 치료제를 개발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송은숙 건강전문 프리랜서
도움말=BRM연구소 박양호 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