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을병 씨는 문학을 신으로 삼은 후 평생 하루 한 끼만 먹겠다고 서원했다고 한다. 한줌의 쌀과 김치 그리고 연탄 한 장으로 하루를 산다면 돈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칠십대 나이까지 쓴 칠십 권의 책이 그의 삶이었다. 그는 5·16혁명 후 국토건설단의 강제노동의 내막을 파헤친 대가로 문인간첩이 되어 감옥을 갔다. 뜨거운 라디에이터 위에 맨발로 선 채 곰처럼 양발을 엇갈려 들었다 놨다 하는 고문을 받았다고 얘기했다. 민중보다 한발자국 앞서가는 작가의 길인지도 모른다. 병든 사회를 고발하는 것은 작가의 사명이다.
‘인간시장’을 쓴 소설가 김홍신 씨의 집을 간 적이 있다. <대 발해>라는 소설을 쓰는 몇 년 동안 창문도 가린 채 어두운 방안에서 칩거했었다고 말해 주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문관 수행’ 같았다. 지명도가 높은 문인일수록 고뇌도 깊은 것 같았다.
정을병 씨가 하루는 나의 사무실을 찾아와서 이런 탄식을 한 적이 있다.
“나름대로 한국에서는 소설가로 과분하게 이름이 나 있어요. 그런데 속으로는 열등감을 느낍니다. 좋은 외국작품들을 보면 나는 3류도 못되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어떻게 하겠어요. 4류, 5류 라고 해도 마지막까지 이 길을 걸어가야지.”
그 한마디에서 나는 보석 같은 진리를 깨달았다. 왜 꼭 일류가 돼야만 하지? 왜 꼭 주인공이 되고 프리마돈나가 되어야지? 주어진 자기 모습대로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헛된 욕심을 비우면 그 자리에 행복이 들어선다는 걸 알았다. 교과서에 실렸던 <감자>나 <광염소나타>로 유명한 소설가 김동인의 변호를 한 적이 있다. 일제 말 그가 쓴 몇 편의 글이 친일반민족행위로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그 역시 ‘소설의 도’를 가기로 마음먹은 문학순례자였다. 문학지 발간에 물려받은 재산을 쏟아 부었다. 한국인 최초로 전업 작가 선언을 하고 큰 신문사 부장자리를 거절했다. 그는 암울했던 일제 시대 대원군을 조선의 메시아로 형상화한 글을 써서 민족의 영혼에 불을 붙였다. 문학적 순례자인 그에게 가난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그는 마지막에 병이 든 채 텅 빈 빈방에서 고독하게 굶어죽었다.
세상에 정신적인 영양분을 공급하는 작가들은 정작 물질적 결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경제대국의 반열에 들어선 우리나라지만 아직도 문학 분야는 척박한 환경인 것 같다. 글만 써서 먹고 살 수 있는 작가는 극히 미미하다. 진짜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자동차, 스마트폰을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소설이 세계시장에서 상품으로 팔릴 수 있어야 한다. 일본의 지폐에는 소설가의 초상이 찍혀있다. 러시아의 거리에는 시인들의 동상이 곳곳에 서 있다. 우리나라도 문화국가로 업그레이드가 되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시인대통령이 나오고 부자나 장관보다 소설가가 더 존경을 받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엄상익 변호사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