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가수 조용필’이 최근 역사적인 콘서트를 펼치며 다시 팬들 가까이로 돌아왔다. 어느덧 가수의 삶 35년. 그가 걸어온 길에는 누구의 인생보다 진한 세월의 흔적이 녹아 있다. 명성과 사랑, 고뇌와 방황이 고스란히 담긴 그의 인생은 그 자체로도 한 곡의 명가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파이브 핑거스’ 밴드로 데뷔한 것이 1968년 말이니 강산이 변해도 벌써 여러 번 변했을 세월이다. 그동안 그가 이룩해낸 업적은 굳이 설명하기가 무색할 정도. ‘그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를 따지는 우리들에게 조용필은 ‘앞으로 남길 것을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아직 은퇴란 것을 생각해 본 적조차 없다”고 단호히 말하는 그는 자신이 ‘영원한 현역’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미 조용필이 남긴 것은 너무도 많다. 그 자신이 언젠가 “내 노래가 70∼80년대를 살아온 이들에게 추억을 남겼다”고 한 말처럼 우리는 그와 그의 노래를 추억할 수 있어 행복하다.
조용필에 관한 프로필을 찾아보니 무려 A4 용지 10장을 빼곡이 채우고도 남는다. 공식활동과 수상경력만을 훑어보는 것만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한국 가요계의 최고봉답게 그에 관한 자료만도 방대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가요사적 위치는 논문으로 쓰여질 만큼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 가요계가 ‘조용필 이전’과 ‘조용필 이후’로 나뉘어진다면 그의 삶 역시 ‘가수 이전’과 ‘가수 이후’로 나뉘어질 수 있을 게다. 그의 가수 이전 삶을 잠깐 되짚어 보자.
조용필은 1950년 3월21일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염전업을 하는 부모 슬하의 3남4녀 중 여섯째였다. 어린 시절 조용필의 꿈은 군인이 되는 것이었는데 이는 6·25전쟁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한다. 가지고 놀던 딱지에 그려진 군인의 모습이 멋져 보여 막연히 군인을 동경했던 것.
워낙 내성적인 성격 탓에 남들 앞에 나서는 것조차 싫어해 가수가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그였다. 일곱 살 때에는 홍역을 앓아 그 후유증으로 왼쪽 눈 시력이 급격하게 나빠져 지금도 왼쪽 눈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가수라는 직업은 꿈조차 꾸지 않던 어린 조용필에게도 기억나는 ‘음악과의 조우’는 있었다. 조용필은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일곱 살 되던 해 가을의 달빛이 무척이나 밝았던 어느날 밤 들려왔던 하모니카 선율을 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음악이 나를 부르는 소리였고 음악과의 첫만남이었다”고 조용필은 그 순간을 기억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고향의 바닷가를 거닐다 우연히 들었던 라디오프로그램의 팝송이었다. 바로 레이 찰스의 ‘I can’t stop loving you’였고 이 노래를 들은 이후 조용필은 팝음악광이 되었다고 한다.
▲ 지난 94년 신혼시절의 조용필-안진현 커플(왼쪽). 10년을 함께한 아내가 올해 1월 남편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오른쪽은 아내를 잃은 뒤 허망한 표정의 조용필. | ||
그런 조용필이 가장 먼저 접한 악기는 기타였다. 어린 시절 벤처스의 내한공연을 보며 ‘하느님의 손가락이 있다면 바로 저들이 기타를 연주하는 손가락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
중·고등학교 시절 그는 둘째형이 치던 통기타를 들고 뒷산에 올라가 연습하곤 했다. 그러나 부모의 반대가 심각해지고 심지어 아버지가 기타를 부수며 매까지 들자 그는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물론 이 사건은 미수에 그치고 말았지만 더욱 음악에 집착하게 된 그는 고등학교 졸업식 날 가출을 결행하게 된다. 서울 경동고등학교에 재학하던 시절이었다.
당시의 가출사건은 이후 조용필의 회고에 종종 등장할 만큼 가수인생에 있어서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함께 가출했던 음악친구들과 함께 ‘악기는 각자 준비할 것, 용돈은 되도록 많이 저축해 둘 것, 팔 수 있는 물건을 집에서 갖고 나올 것’ 등의 ‘행동지침’까지 만들었을 만큼 그로서는 자신의 확고한 신념에 따른 행동이었다.
가출 이후 7년이 넘는 유랑생활 동안의 배고팠던 시절이 조용필에게는 ‘예술의 고달픔’을 처절하게 느끼게 해준 시간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앳된 젊은이가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불량배’나 하는 행동이었음에도 조용필은 하루에 세 갑씩을 피워댔다고 한다. 집에서는 이미 ‘내놓은 자식’ 취급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때 배운 담배를 아직 끊지 못하고 있는 조용필은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도 ‘줄담배’로 유명하다.
조용필은 가수로 정식 데뷔하기까지 겪었던 어려웠던 그 시절을 시련이 닥칠 때마다 떠올리곤 한다. 성공 이후 활동을 중단해야 했던 대마초 사건과 첫 결혼의 실패를 겪었을 때에도 그는 음악을 위해 목숨까지 끊으려 했던 당시를 생각하며 견뎌냈다.
조용필이 전 국민의 히트곡인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한 것이 1975년이었다. 이후 그가 가수로서 이룩한 업적들은 손에 꼽기 어려울 정도다. 미국 카네기홀 초청공연, 일부 언론에 잘못 알려지기도 했던 ‘한국가수 북경 최초공연’과 보아가 출연해 화제가 된 바 있던 일본 NHK <가요홍백전>에 한국가수로 최초 출연, <창밖의 여자> 앨범 1백만 장 돌파로 한국기네스 기록 등. 그간 집계된 앨범 판매량만 해도 무려 1천5백만 장이 넘는다. 한 통계에서는 노래방 곡 목록 중 가장 많은 수인 7백 곡을 조용필이 보유하고 있다고도 한다.
그의 노래를 이해하려면 불운했던 시대상황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고 음악평론가들은 말한다. 이 생각은 조용필 본인 또한 마찬가지다. 그의 노래들에 ‘노래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교도소에서 연인을 그리며 작사했다는 소문을 낳았던 ‘창밖의 여자’나 자전적인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는 ‘킬리만자로의 표범’, 인생과 사랑에 대한 물음을 뜻하는 ‘Q’ 등 그의 노래 한 소절마다 고뇌하던 한 인간과 암울했던 시대분위기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조용필 또한 자신의 노래가 장수하는 비결에 대해 “한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몇몇 곡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음반제작사의 압력이나 대중적 인기를 위해 발표되기도 했다. 그를 인기가수로 만들어준 ‘돌아와요 부산항에’ 또한 취입할 당시에는 그가 “록 음악을 하는 사람이 트로트를 부른 것을 자랑스레 여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곡이었다. 물론 이제는 그가 어떤 노래보다 더 사랑하는 노래가 됐지만.
그런가하면 한때는 운동권 사람들로부터 시대적 메시지를 전하는 노래를 불러달라는 요구를 받기도 했다. 정치권으로부터도 여러 번 손짓을 받았을 법도 한 그이지만 조용필은 줄곧 “오로지 노래 그 자체만 생각하며 살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그가 말했던 지론 하나는 “노래하는 사람은 노래만, 정치하는 사람들은 오로지 정치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용필이 자신의 인생 중 가장 가슴 아파하는 점 중 하나가 첫 번째 결혼과 실패에 대한 부분이다. 그러나 그 역시도 한 인간이기에 가수활동을 하면서 겪었던 이런저런 일들이 대중들에게 회고되는 것을 그리 원하지 않는다.
“지난날은 그저 묻어두는 것, 드러내고 싶지 않은 지난 시간에 대해 얘기하면 지금의 내가 초라해질 뿐이다. 난 과거는 돌아보지 않는 성격이다.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여유가 없다.”
▲ 8월30일 열리는 35주년 기념콘서트 포스터. 공연제목 ‘The History’처럼 그의 삶은 이제 역사가 되었다. | ||
그리고 조용필은 10년 세월을 함께한 안씨를 지난 1월 먼저 떠나보냈다. 조용필에게는 ‘처음 만났을 때 결혼을 생각할 정도로 특별한 사람’이었던 안씨는 그에게 ‘마지막 사랑’이었던 것 같다. 조용필은 “앞으로 다신 결혼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
슬픔을 접고 다시 일어선 조용필은 오는 30일 데뷔 35주년 기념콘서트를 갖는다. 이름하여 ‘The History’. 이미 1년 전부터 기획된 대형공연으로 35년간 변화해 온 우리 사회의 시대상을 그의 음악과 함께 보여줄 계획이다. 이 때문에 그는 최근 방송과 언론을 통해 오랜만에 얼굴을 드러내 팬들에게 반가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수 인생에 있어 큰 의미가 있는 이번 공연준비에 그는 남다른 각오로 임하고 있다. 워낙 무대 욕심이 많고 꼼꼼한 그이기에 무대에 설치될 작은 장치 하나까지도 일일이 직접 검토하고 있다.
조용필은 공연에 앞서 두 달 전부터 ‘몸관리’에 들어갈 정도로 완벽주의자다. 목을 보호하기 위해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음식도 철저히 가려서 먹는다. 즐기는 담배도 공연을 앞두고는 딱 끊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독감예방주사를 맞는 것도 잊지 않고 하는 ‘행사’다. 강행군을 하다 행여 팬들과의 약속을 어기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이렇듯 음악에 있어서만큼은 언제나 최고를 추구하는 조용필임에도 정작 자신의 음악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항상 한계를 느끼며 그때마다 괴롭다”는 그는 언제나 음악에 대해서는 갈증을 느끼는 것 같다. 더불어 자신에 대한 평가가 부풀려졌다고 조용필은 단호하게 말한다. 과연 그럴까. ‘가수 조용필’의 삶과 음악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의미일까. 조용필 본인이 말하는 것처럼 그에 대한 칭찬이 지나친 걸까.
그러나 서두에도 말했듯 조용필이 남긴 추억의 부피만큼은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을 듯하다. 그리고 소녀였던 그의 아줌마팬들이 할머니가 되어서도 추억의 무게는 점점 깊어질 것이다. 추억이란 본래 묵을수록 맛이 나는 법이니까. 그리고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다’던 그의 삶의 흔적도 그렇게 영원히 팬들 가슴속에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