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폐장 유치를 신청한 김종규 부안군수가 지난 8일 성난 주민들에게 폭행당해 입원해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전화선을 타고 흘러오는 현지의 목소리들은 여전히 격앙과 분노 그 자체였다. 지난 9월8일 김종규 부안군수(51) 폭행사건 이후에도 현지 분위기는 전혀 반전의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핵 폐기장 반대’의 노란 깃발 아래 울부짖는 군민들의 분노속에 김 군수는 여전히 속수무책으로 그렇게 내던져져 있었다. 노도와 같이 들고 일어난 군중들의 성난 함성을 군수 한 명으로 감당토록 한 것 자체가 애초부터 너무나도 무모해 보였다. 김 군수가 “도대체 정부는 뒷짐지고 뭘하고 있느냐”며 애타게 도움을 요청하던 그 순간, 결국 군민들에 의한 군수 폭행이라는 전대미문의 불상사가 터지고 말았다.
지난해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 전국 최대 이변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김 군수. 취임 5개월 만에 우수단체장으로 선정되는 등 군민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던 한 군수가 하루아침에 자기 고향을 팔아먹은 ‘매향노’로 추락하는 과정은 책임회피에 급급한 우리네 공직사회의 한 단면을 너무나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6월13일 밤. 제 3대 지자체 선거 개표 결과가 속속 드러나던 당시, 국민들의 관심이 미처 미치지 못하는 전북의 한 작은 군에서 이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민주당의 아성으로 불리는 부안군수 선거에서 민주당 공천의 현역 군수를 누르고 무소속의 김종규 후보가 당선된 것이었다.
이처럼 김 군수의 등장은 작지만 화려했다. 비록 군민수가 6만 명에 불과하고 재정 자립도가 20%에도 못 미치는 가난한 시골 군수였지만, 그의 파격은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군수에 취임하자마자 그는 군청 2층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 문을 투명유리로 교체했다. 그의 집무실은 복도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 오고가는 숱한 공무원들과 지역 주민들이 군수실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관사를 개조해서 저소득층의 전담보육시설로 용도변경했다. 지역민원 해결을 위해 직접 서울과 전주의 중앙부처를 수시로 들락거렸으며, 기업체 후원 및 계약, 요트경기장 조성과 바둑대회 등 스포츠 문화 사업 유치, 심지어는 방송국 촬영지까지 직접 섭외하며 부안 알리기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그는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 점심 식사는 구내 식당에서 직원들과 함께했다. 군수가 직접 꽃다발을 들고 다니며 불시에 읍·면사무소를 찾아서 전달하는가 하면, 직원들과 함께 2백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뽑아마시며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런 노력으로 그는 지난해 11월 행자부가 발표한 전국 지방자치단체장 평가에서 더블A 등급을 받아 전국 2백32개 지자체 중 우수자치단체장으로 뽑히기도 했다. 경남 남해 군수 출신인 김두관 전 행자부 장관을 빗대어 어느덧 지역에서는 ‘부안의 김군수’란 말까지 회자될 정도였다. 김 군수가 이처럼 지역 주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주민들과 함께 맞춰나갔기 때문이라는 것이 지역의 평이었다.
김 군수는 1951년 전북 부안군 위도면 대리에서 가난한 어부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위도초등학교 졸업생인 그는 요즘도 사석에서 “위도는 내 탯줄을 묻은 곳이며 내가 반드시 되돌아가야 할 고향”이라고 말할 정도로 강한 애착을 보이고 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위도를 방사성폐기물처리장 후보지로 선정한 것에 대해서도 “내 고향인 만큼 당당하고 떳떳하다”고 말하고 있다.
▲ 김종규 부안군수 폭행사건이 벌어진 이후에도 핵폐기장에 반대하는 부안 민심은 여전하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김 군수는 이제 부안에서 발 붙이기 힘들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 ||
지난 96년 고 위원장이 총선에서 국민회의 김진배 후보에게 패한 이후 그는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DJ의 황색바람이 거세던 지난 98년 부안군수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할 때만 해도 주변에서는 그를 “무모한 신출내기” 정도로 여겼다. 결과는 8천여 표 차의 완패였으나, 그래도 무명에 가까운 첫 도전치고는 비교적 선전했다는 것이 주변의 평이었다. 김 군수의 끈질긴 집념은 이때부터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낙선된 이튿날부터 바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군민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어망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문화봉사단체인 ‘부안사랑나눔회’를 만들어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다시 주민들과 동화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의 별명은 ‘사탕 아저씨’로 통했다. 주머니 가득 사탕을 넣어 갖고 다니면서 주민들에게 나눠준 데서 비롯된 것. 이에 대해 김 군수는 “어느날 마을 일을 거들어드린 후 새참을 먹는데, 한 할머니께서 이가 안좋으셔서 아무것도 씹지를 못한다며 사탕만 녹여 드시는 것을 보고는 거기에서 착안하여 사탕을 갖고 다녔다”고 전했다. 약 1억5천만원 정도의 재산을 가진 김 군수에게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일이라곤 주민들과 함께 어울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마을 일이라면 궂은 일을 마다않고 4년 동안 쫓아다녔고, 주민들은 이런 ‘사탕 아저씨’를 용케 기억해 주었다. 이미 밑바닥 기반을 확실히 다져나간 김 군수의 사정을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지난해 선거에서 오히려 김 군수가 떨어졌으면 이변이었을 것이다. 성실성 하나만큼은 타고난 사람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군청 앞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한 주민은 “이번 일이 있기 전만 해도 군수님의 인기는 단연 최고였다. 존경과 인기를 한몸에 받았는데 이런 일을 당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라고 안쓰러워했다. 지금도 많은 주민들은 김 군수가 왜 갑자기 입장을 바꿔서 방폐장 유치불가에서 찬성으로 돌아섰는지 의아해하고 있다. 사실 전북 지역에 방폐장을 건설해야 한다는 데에 누구보다 집착했던 이는 강현욱 전북도지사였다. 그리고 군산시가 여기에 부응했다. 신시도가 유력한 후보지로 등장했다. 이때만 해도 부안은 남의 일 쳐다보듯 했다. 그러나 군산 시민의 반발이 거세게 일면서 강근호 군산시장은 갑작스레 유치계획을 철회해 버렸다. 그때가 7월10일. 서울에서 도내 출신 국회의원들과 환담하던 강 도지사는 이 보고를 받고 전주로 내려오던 중 급하게 핸들을 틀어 부안군으로 향했다.
다음날인 11일 새벽 1시께 강 도지사와 김 군수는 마주앉았다. 이 자리에는 산업자원부와 (주)한국수력원자력 관계자들도 함께했다. 이 자리에서 강 도지사는 “전북의 미래가 이제 당신의 손에 달렸다”며 김 군수를 끈질기게 설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군수는 전날인 10일까지만 해도 분명하게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런 그가 이날 만남 이후 돌연 유치 신청 의사를 밝혔다. 왜 그랬을까.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간 것일까. 당시의 상황에 대해 김 군수는 이렇게 해명하고 있다.
“이전까지 반대의사를 보였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은 고민중이었다. 미리 덜컥 유치신청을 했다가 다른 시·군의 들러리나 서서는 안된다는 생각도 했다. 군산시의 유치 철회를 보고서야 부안이 신청을 하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강 도지사와 면담한 끝에 결정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결심이 바뀐 건 절대 아니다. 솔직히 부안의 지역발전과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 대안이었다. 1년 전 군수 취임 이후 날로 줄어드는 군민 수와 미래가 보이지 않는 군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지금까지 많은 고민을 해 왔지만 이와 같은 대형 국책사업의 유치밖에 더이상 방법이 없다는 현실이 너무 괴로웠다. 주민들의 반대를 예상했지만, 누구 하나가 책임을 지고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