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서울시장(왼쪽), 손학규 경기지사 | ||
이런 와중에서도 정중동의 행보로 자신들의 길만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정치인도 있다. 이명박과 손학규. 이들은 한나라당 중진 의원이었지만 지난 2002년 서울시와 경기도를 이끄는 행정가로 변신한 뒤 그 살림살이에만 전념하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완전히 정치판을 떠났다고 보면 오산이다.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라는 자리가 가지는 상징성 때문이다. 정치권에서는 이들이 수도권의 광역단체장으로서 ‘예비고사’를 잘 치른 뒤 차기 대권의 ‘본고사’에 도전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본인들은 현재의 진흙탕 정국과 일정한 거리를 두며 이런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 있지만 누구도 그 가능성까지 부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 신화의 주역이자 청계천, 뉴타운 프로젝트를 뚝심으로 밀어붙이며 차기를 준비하고 있는 이명박. 민주화운동과 정치학 박사 등 화려한 경력에 ‘세계 속의 경기도’를 외치며 글로벌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는 손학규.
이 두 사람은 2007년 대통령 선거로 가는 길목에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어 있다. 과연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까. 물밑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들만의 때 이른 대권 경쟁을 들여다봤다.
“내가 박 의원 선거운동을 다 해주고 있는 것 아냐. 한턱 내야 돼.”
이명박 서울시장이 며칠 전 한나라당 박진 의원을 만난 자리에서 건넨 농담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장이 지난해 말 종로구 평동 164번지 일대(6만9천 평)를 비롯해 서울 시내 12곳의 ‘2차 뉴타운 사업지역’을 개발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종로가 지역구인 박진 의원에게는 이 ‘선물’이 가뭄 속의 단비나 마찬가지다. 17대 총선을 앞두고 지역의 오랜 숙원사업을 이 시장이 나서서 뚝딱 해결했기 때문이다.
이 시장으로서도 이런 지역 개발이 자신의 차기 행보와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아직 당내에 뚜렷한 지지기반이 없는 그로서는 이런 ‘작업’을 통해 자신에게 우호적인 의원들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 그리고 이들은 차기 대권 행보에서 이 시장의 잠재적 지원군이 될 것이다.
여기에다 이 시장이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 청계천 복원 개발 사업이다. 서울시 예산만 3천7백억원이 투입되는 대형 공사가 별 문제 없이 착착 진행되자 그의 추진력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이 시장이 ‘청계천=이명박’의 등식을 국민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켜 대권으로 가는 배를 타겠다는 전략을 펴고 있다고 보고 있다. 2005년 9월 서울 도심에 강이 생기면 많은 이벤트들이 벌어지게 되는데 이것보다 이 시장을 더 잘 알리는 ‘용비어천가’는 없을 것이라는 진단이다.
이 시장 소식에 정통한 관계자 A씨는 이에 대해 “청계천 개발 사업은 청와대 국무회의 때도 4개 부처 장관이 들고일어나 강력하게 반대했을 정도로 초반부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 시장은 특유의 뚝심뿐만 아니라 상대를 설득하는 논리적인 언변으로 좌중을 휘어잡았다”고 밝히면서 “남들은 아무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지 모르나 청계천 복원 같은 사업은 확고한 철학, 추진능력이 없으면 결코 밀어붙일 수 없다”면서 이 시장을 높게 평가했다.
이에 반해 손학규 경기지사는 일관되게 ‘경제를 살리는 지도자’란 이미지를 쌓아가고 있다. 특히 기업의 투자 환경 개선과 외자유치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며 ‘글로벌 리더’로서의 외연도 넓히고 있다.
이 시장처럼 이벤트성 정책에 치중하기보다 ‘세계 속의 경기도’를 모토로 서울시의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 행정에 역점을 두고 있다. 손 지사측은 이 시장의 청계천 복원 사업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런 식으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건설의 시대가 아니다”라며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 2002년 4월 한나라당의 ‘부패정권 청산’ 장외집회에 참가한 이명박 당시 시장 후보(왼쪽)와 손학규 지사 후보(오른쪽). 가운데는 박관용 당시 총재권한대행. | ||
손 지사는 “수도권의 경쟁력이 대한민국의 경쟁력”이라고 말하면서 광역단체 경영을 발판으로 국가 경영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이다. 이렇듯 두 사람의 차기 대권 경쟁은 ‘장외’에서 이미 정책 대결로 불이 붙고 있다.
정책 경쟁과 함께 정치력 대결도 물밑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주목받고 있는 것이 이 시장과 손 지사의 차기 대권을 향한 경쟁이 최병렬 대표와 서청원 전 대표 간의 ‘대리전’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해석이다.
먼저 이 시장은 한나라당의 ‘재선 3인방’과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재오 정개특위원장은 서울시장 선거 당시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고 홍준표 전략기획위원장은 홍보위원장을 맡아 이 시장의 당선을 위해 발벗고 뛴 바 있다. 또한 김문수 공천심사위원장도 이-홍 의원과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친분이 깊기 때문에 이 시장과도 통하는 사이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이들 재선 3인방은 당이 대선자금 파문으로 위기에 빠져 있을 때 소방수로 차출돼 급한 불을 꺼 최병렬 대표의 신뢰를 받고 있다. 자연히 ‘최병렬-재선 트리오-이명박’으로 이어지는 ‘커넥션’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하지만 최 대표도 아직 대권의 꿈을 접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재선 3인방의 친 MB(이명박) 행보를 경계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또한 재선 3인방도 “우리는 친 최병렬 계보가 아니라 독자적인 그룹”(이재오)이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런 복잡한 상황 속에서 이 시장과 재선 3인방이 지난해 말 서울시내 ㅇ음식점에서 만찬을 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 배경을 두고 당시 많은 뒷말이 오갔다. 이 시장의 사정을 잘 아는 A씨는 이에 대해 “한나라당 재선 트리오는 모두 ‘MB 계보’다. 지난해 말 토요일의 음식점 회동은 ‘MB 대통령 만들기’의 첫 출발점이었다”고까지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이재오 위원장은 이런 시각에 대해 “개인적으로 친한 것과 정치적으로 뜻을 같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서로 친하니까 그런 오해가 나올 수 있다”며 지나친 억측을 경계했다.
일각에선 재선 3인방을 앞세운 최병렬 대표측이 서청원 전 대표측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손학규 지사 진영을 선제 공격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홍준표 위원장은 사석에서 종종 당내 초·재선 개혁파 의원들에 대해 “행동은 하지 않고 말로만 개혁을 떠들고 있다. 소장파도 물갈이 대상이다”며 반감을 드러내곤 한다. 재선 3인방이 손학규 지사를 견제하기 위해 그를 지지하는 초·재선 개혁파 의원들에게 ‘모진 소리’를 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실제로 손 지사는 서청원 전 대표의 지지 그룹으로부터 측면 지원을 받고 있다. 남경필 박종희 의원 등 서 전 대표 측근들은 경기도에 지역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손 지사와 뜻이 통한다. 그리고 손 지사는 서 전 대표가 당 대표 경선 당시 경기도에서 승리를 거두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최근 서 전 대표가 검찰의 칼날에 쓰러져 손 지사에게도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이에 대해 “서 전 대표 구속으로 손 지사는 정치적으로 타격을 많이 받았다. 자신의 당내 라인이 유명무실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공천 탈락자가 늘어날수록 타격은 더 클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최근 박종희 의원 등을 중심으로 서 전 대표에 대한 국회 석방동의안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이 시장과 손 지사 사이의 대리전도 복잡한 양상을 띠어가고 있다.
손 지사측은 당내 취약한 기반을 극복하기 위해 이번 총선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손 지사의 측근들이 4월 총선에 대거 출마한 뒤 여의도로 입성, 그의 당내 입지를 더욱 넓히겠다는 계산이다.
‘손학규 사단’으로 알려진 한현규 경기도 정무부지사는 수원에서, 이철규 경기도개발연구원장은 시흥에서, 정성운 경기도 서울사무소장은 광명에서 여의도 등원을 노리고 있다. 이들은 당내 소장파 의원들과 경기도 모처에서 회동하며 공천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손 지사는 또한 간부 회의를 여의도 근방에서 열고 경기지역 의원들과 수시로 골프 모임을 가지는 등 정치권의 동향도 예의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차명진 경기도 공보관은 이에 대해 “제발 우리를 정치권과 연결시키지 마라. 손 지사는 도정에만 전념하는 것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라며 총선과 관련한 행보에 대해 적극 부인하고 있다.
이-손 두 사람의 이런 때 이른 ‘차기 하마평’에 대해 당내 일각에서는 불만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당 대변인실의 한 관계자는 “아직 대선이 4년이나 남았다. 또한 이번 총선을 기점으로 정계에 대대적인 지각 변동이 있을 것이다. 이런 불확실한 상황에서 두 사람만이 대권 주자로 너무 부각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한나라당에 두 사람밖에 인물이 없나”라며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현재의 진흙탕 정국에서 한 발 뺀 채 행정에만 전념하고 있는 이명박 시장과 손학규 경기지사. 두 사람이 ‘공부’에만 열중하면 할수록 그들의 책상 밑에 놓여진 ‘히든 카드’에 더욱 눈길이 쏠리는 이유는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