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근씨가 다니던 대기업 직장을 그만두고 소위 ‘딴따라’판에 뛰어들었던 지난 85년 당시 그의 가족사는 큰 화제였다. 그는 고 문익환 목사의 아들이라는 점으로 더 유명세를 탔다.
보성중고등학교를 다니던 60년대 말 70년대 초 아버지는 늘 밖에만 계신 분이었다. 막내였던 문씨는 그런 아버지가 미웠다고 한다. 어머니가 꽤 고생을 많이 했고, 두 형과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일부러 무역학과를 지망하고 대기업을 선택한 것도 철저히 현실적인 사람이 되고자 함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아버지의 뒷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고, 아버지에 대한 인식과 사회적 가치를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 그는 추진력이 무서운 편이었다. 8년 간의 대기업 직장생활을 때려치우고 85년 극단 연우무대에 입단했다. 대학시절 극회를 기웃거린 전력도 있었고, 큰형의 영향력이 컸다. 작고한 큰형 문호근씨는 예술의전당 공연사업본부장을 역임한 유명 연극연출가였다.
그는 극회 선후배들의 아지트인 ‘연우무대’를 찾았다. 연우무대는 이후 연기파 배우들의 대명사격인 송강호 유오성 안석환 김여진 등 오늘날 스크린 스타들을 줄줄이 배출한 곳. 그의 데뷔작품은 분단 아픔을 다룬 사회성 짙은 작품 <한씨연대기>였다. 여기서 그는 주인공 ‘한영덕’역을 맡아 그해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신인이 비중있는 작품의 첫 출연작에서 주인공역을 맡을 만큼 그의 연기력은 대학시절부터 정평이 나 있었다고 한다.
86년 <칠수와 만수>에서 주인공 칠수역을 맡으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도 이 연극이 계기가 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89년부터는 영화와 TV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대중적 인지도를 단박에 끌어올린다. 그는 90년대 초 박광수 감독과 작품을 많이 했다. <그들도 우리처럼> <베를린 리포트> <그 섬에 가고싶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등 사회성 짙은 작품이 모두 박 감독의 연출작이었다.
문씨는 이후 한국영화연구소 이사, 생명의전화 홍보대사, 영화진흥위 부위원장,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이사장 등을 맡으면서 사회 활동에 적극 가담했고, 2002년 대선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정치판의 한가운데에 뛰어들었다.
현실정치 참여 가능성에 대한 그의 입장은 일견 단호하고 일관되어 보인다. 그는 “정치 참여 권유는 10여 년 전부터의 일이다. 나는 현실정치인이 될 수 없다. 나 자신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배우로 시민으로 남고 싶다”고 밝혔다.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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