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칸영화제 수상 후 박찬욱 감독과 함께. 로이터/뉴시스 /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귀국 1주일 만에 다시 돌아온 촬영 현장은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자그마한 탄광촌. 수상의 기쁨을 뒤로 하고 음악 선생님이 되어 다시 카메라 앞에 선 최민식을 직접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난 5월25일 칸에서 돌아와 영화 촬영이 재개된 31일까지 일주일 동안 최민식의 행보를 쫓으며 육체적인 피곤함보다는 배우 최민식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소탈하면서도 진솔한 인간적인 면면을 엿볼 수 있어 오히려 행복(?)했다. 광기어린 눈빛을 감추고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골 학교의 선생님으로 변신한 최민식을 만났다.
“우리가 받은 상이 무엇이고 몇 등인지의 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심사위원, 외국 영화 관계자, 관객들이 모두 우리 영화에 열광하였다는 점, 이로 인해 우리 영화가 전 세계인들과 교류하고 소통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우리의 이야기를 담은 한국 영화의 진정한 시작은 이제부터다.”
제 57회 칸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올드보이>의 주인공 최민식이 귀국 직후 밝힌 수상 소감이다.
지난 55회 칸 영화제에서는 감독상 수상작인 <취화선>의 주인공으로 레드 카펫을 밟았던 최민식은 이번 수상을 통해 한국 최고의 배우에서 세계적인 배우로 발돋움했다. 시상식을 세 시간여 앞두고 수상작 목록에 올랐다고 통보받은 <올드보이> 관계자들은 처음에 가장 유력한 수상 부문으로 남우주연상을 예상했었다고 한다. 칸 영화제의 관례상 이미 <취화선>으로 한차례 칸에 초대받은 바 있는 최민식의 수상 가능성이 높게 점쳐졌기 때문. 물론 <올드보이>에서 보여준 최민식의 연기 역시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쿠엔틴 타란티노를 비롯한 심사위원단에게 <올드보이>는 관례를 무시해도 좋을 만큼 훌륭한 작품이었다. 그 덕분에 남우주연상의 영광이 14세의 일본 배우 야키라 유야에게 돌아갔다. 더 좋은 상을 받은 것은 당연히 기쁜 일이지만 최민식 본인에게는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는 대목이다.
▲ 평범한 샐러리맨에서 15년 동안 이유도 모른 채 감금된 뒤 복수에 나선 ‘오대수’로 분한 <올드보이>(위), 관습과 세상을 조롱한 조선 최고의 화가 ‘장승업’으로 분한 <취화선>(아래)으로 최민식은 두 차례 칸영화제의 레드 카펫을 밟는 영광을 누렸다. | ||
최민식의 겸손 넘치는 얘기에 기자회견 당시, 박찬욱 감독은 “심사위원대상은 주연상과 감독상이 합쳐진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고 김동주 쇼이스트 대표이사는 “상장을 컬러 복사해서 한 장씩 나눠 갖기로 했다”고 화답했었다.
최민식이 뽑은 칸 영화제에서의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은 시상식장이 아닌 5월15일 칸 현지의 뤼미에르 극장에서 열린 공식시사회였다. “영화 상영이 종료된 뒤 10여 분 동안 계속된 관객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벅찬 감동을 느꼈다”는 최민식은 “순간 함께 고생한 동료 스태프와 배우들의 얼굴이 떠올랐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칸 영화제에서 10여 분이나 기립박수를 받는 영화는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는 세계적인 거장들이 <올드보이>에 대한 경이적인 찬사를 해왔을 때라고 말한다. 특히 질 자콥 위원장이 주최하는 파티에서는 황홀감까지 느꼈다고.
“파티에 참석한 서극 감독이 나한테 <올드보이>의 몇몇 장면을 거론하며 어떻게 촬영했는지를 물어와 성심성의껏 대답해줬다. 그랬더니 서극 감독이 흥분된 얼굴로 타란티노 감독을 비롯한 몇몇 영화 관계자들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뛰어가면서 ‘드디어 그 장면의 비밀을 알았다’라고 외쳤다. 다소 당황스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자부심 같은 게 생겼다.”
이번 칸 영화제를 통해 최민식에게 집중된 또 하나의 궁금증은 레드카펫 위를 빛낸 그의 아내 김활란씨와의 결혼 생활이다. 남편으로서 자신을 ‘나는 하자가 많아 AS 센터에 가야 하는 수준의 남편’이라고 표현한 최민식은 부인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자, “집사람에 대한 관심은 고맙지만 조용히 살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이유를 묻자 ‘괜히 쑥스럽다’는 게 그의 설명.
이번 칸 영화제가 최민식에게 ‘과거로의 여행’이라면 현실은 현재 촬영 중인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이다. 요즘 그는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자그마한 탄광촌에서 인근 중학생들을 주축으로 구성된 아역배우들과 함께 기악 연주에 한창이다.
▲ 촬영중인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에서 음악선생으로 변신한 최민식. | ||
지난 5월25일 귀국한 최민식은 단 하루를 쉰 뒤 27일 도계로 내려가 28일부터 <꽃피는 봄이 오면>의 촬영을 재개할 계획이었다. 다소 무리한 스케줄로 보였지만 최민식은 “내가 칸에 가는 바람에 촬영이 두 주 가량 지연되어 미안한 마음이 크다”면서 “빨리 도계중학교 학생들과 만나고 싶다”고 촬영에 대한 기대감을 밝혔다.
하지만 촬영은 예정보다 3일 늦춰진 5월31일에서야 다시 시작됐다. 시차 적응 등 몸에 무리가 따랐고 평소 매스컴 기피증이 있다는 얘기를 듣던 최민식이 칸에서 외국인 기자들을 상대로 2백여 회가 넘는 인터뷰를 소화하는 강행군 등으로 감기 몸살에 걸린 탓이었다.
5월30일 밤늦게 도계에 도착한 최민식은 숙소로 사용하는 B모텔에 짐을 풀었다. 태백을 지나 도계읍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위치한 B모텔은 칸에 가기 전부터 최민식이 숙소로 사용하던 곳. 강원도의 자그마한 탄광촌에서 몇 달 동안 지내야 한다는 점이 조금은 답답할 수도 있지만 B모텔에서 내려다보이는 멋진 전경이 최민식에게 큰 위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
촬영 재개의 분위기는 최민식이 도착 하루 전인 30일 도계중학교에서 울려 퍼진 기악 연주로 시작됐다. 도계중학교 본관 건물 뒤에 위치한 별관 건물 2층에 위치한 기악연습실에는 학생 30여 명이 모여 연주 연습에 몰두하며 최민식의 컴백을 기다렸다. 일요일까지 학교에 나와 연습을 해야 한다는 점이 조금은 힘들 법도 했지만 학생들은 “최민식 아저씨가 좋은 상을 받아서 기쁘다”는 말로 재개되는 영화 촬영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최민식이 칸에서 돌아온 뒤 이뤄진 첫 촬영은 5월31일 도계중학교 기악연습실에서 시작됐다. 기악반 학생들은 <효자동 이발사>에서 송강호의 아들 역할로 출연했던 이재응을 비롯한 몇몇 배우들과 인근 중학교에서 선발된 학생 배우들로 구성됐다.
촬영을 다시 시작하는 소감을 묻기 위해 기자는 인터뷰를 부탁했지만 최민식은 “촬영 준비에 집중하기 위해 곤란하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대신 좋은 연기를 통해 관객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남겼다.
<올드보이>의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은 배우 최민식에게 또 다른 출발을 의미한다. 하지만 칸의 영광과 기쁨에 도취돼 있기에는 그의 갈 길이 멀고 험난하기만 하다. 최민식도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화려한 타이틀’의 꼬리표를 잠시 떼어두고 이전의 노력하는 배우 최민식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강원도 도계에서 본 최민식은 <야망의 세월>에서 분한 ‘꾸숑’의 건들거림이나 <쉬리>에서의 규범화되지 않는 강인함, 그리고 <취화선>의 자유분방한 이미지가 한데 뒤섞인 가운데 인간적인 매력까지 풍기는 천상 ‘남자’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