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같이 ‘불평등 해소’ 내세웠지만 구체적 해법 미흡
손학규 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이 19일 오전 서울 강북구 수유동 국립 4.19민주묘지를 찾아 참배한 뒤 손학규계 20대 총선 당선자와 악수하고 있다.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어젠다는 대선 승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축이다. 역대 대선을 살펴보면 민심의 향방을 잡아낸 잠룡이 청와대 안주인이 될 수 있었다. 2002년 당시 비주류 정치인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힘은 ‘어젠다’였다. 노 전 대통령이 제시한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는 진보 진영 결집의 촉매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중론이다. 2007년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중도실용’주의는 참여정부의 경제 실정과 맞물리면서 압도적인 표차의 대선 승리를 이끌어 냈다.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대통령은 진보의 어젠다,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내세웠다.
더민주의 한 보좌관은 “내년 대선에선 불평등과 맞서는 후보가 통할 것“이라고 말을 꺼낸 뒤 “지난 대선은 경제민주화와 복지가 관건이었다. 추상적이고 거대한 관념이었지만 내년은 다를 것이다. 이제는 양극화와 저출산이 국가적 과제다. 시대정신이 더욱 구체화됐다. 삼성이 수십 조를 벌었다는 기사에 박수칠 만한 국민들이 드물다. 대기업이 아무리 돈을 벌어도 자신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어떤 잠룡이 국민들을 상대로 ‘디테일’하고 진정성 있게 메시지를 던지느냐에 따라 왕좌의 주인이 가려질 것”고 말했다.
대권잠룡들도 최근 ‘어젠다’ 선점에 본격적으로 나선 모양새다.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는 8월 30일 “빈부격차, 수도권과 지방 간 격차, 대기업과 중소기업 격차 등 사회 곳곳이 격차확대로 사회갈등 비용이 커지고 있다.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국가과제다”고 말했다. 김 전 대표는 8월경 ‘격차해소 경제교실’ 공부모임도 발족시켰다. 여의도 정치권 일각에선 “김 대표가 ‘좌’클릭으로 산토끼를 공략하는 전략을 쓰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김 전 대표의 ‘격차해소’는 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가 강조해온 시대과제다. 안 전 대표는 6월 22일 국회 교섭단체 연설에서 “기득권이 만들고 제도화한 것이 격차다. 격차를 해소하지 못하면 우리 공동체의 내일을 장담할 수 없다”며 격차해소를 위한 로드맵을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안 전 대표 측 일각에서 “김 전 대표의 ‘좌’클릭 욕심이 너무 과하다. 어젠다 베껴쓰기를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까닭이다.
이에 대해 김 전 대표 최측근은 “일부가 겹칠 수밖에 없지 않나. 어차피 국민들이 지금보다 더욱 잘 살기 위한 방법론의 차이일 뿐이다. 국민들이 통합하길 원하는 대선주자라면 어느 누가 어떤 말해도 비슷하다. 경제민주화든 경제정의든 원론적으로 보면 경제를 잘 돌아가게 하자는 것이다. 다만 용어만 다를 뿐이다. 안 전 대표가 썼다고 하는데 총론은 같을지 몰라도 각론에서 차이가 있다. 각론이 어떻게 다른지를 김 전 대표가 차츰 보여드릴 것”이라고 반박했다.
손학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상생과 통합’을 내년 대선의 시대정신으로 꺼내들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손 전 고문은 2011년 4월 분당을 재보궐 선거에 출마했을 당시 “우리가 함께 상생하고 잘사는 사회가 돼야 한다. 제가 막말로, 국회의원 한 번 더 하겠다고 나왔겠나.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것이다. 분열과 대립의 사회가 아니라 함께 화합하고 통합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 전 고문은 꾸준히 ‘상생과 통합’을 시대정신으로 강조해왔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꺼내든 어젠다도 ‘공존과 상생’이다. 최근 오 전 시장은 최근 ‘왜 지금 공존과 상생인가’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오 전 시장의 최측근은 “공존과 상생을 줄여 공생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 사회가 빠른 시간 안에 세계적으로 손가락 안에 꼽히는 선진국으로 성장했지만 그런데도 ‘헬조선’ 얘기가 나오고 있다. 평소 오 전 시장은 ‘나라는 전보다 잘 살게 됐는데 스스로 행복하다는 사람은 많지 않는 이유’에 대해 고민해왔다. 그 해법으로 성장과 함께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 기회를 공평하게 부여받지 못한 사람들을 챙길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고 전했다.
하지만 정치권 일각에선 “‘상생과 통합’과 ‘공존과 상생’이 무슨 차이가 있나”라는 물음이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오 전 시장의 최측근은 “소득 불균형과 양극화문제에 대한 중요성과 심각성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내놓는 사람은 없다. ‘해야 한다’는 구호만 있지 방법론에 대해 다른 주자들은 여전히 준비 중이다. 하지만 오 전 시장은 책이나 인터뷰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고 말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최종병기는 ‘대동경제’다. 박 시장은 최근 “모든 구성원이 인간다운 삶의 질을 함께 누려야 한다”며 위코노믹스(WEconomics·대동경제)를 제안했다. 박 시장은 불평등 극복의 해법이 담긴 대동경제에 관한 책 발간을 준비 중이다. 하지만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더 평등한 경제’와 ‘공정한 세상’을 시대정신으로 제시할 것으로 알려졌다. 문 전 대표와 박 시장의 어젠다 사이에 뚜렷한 차이가 없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이에 대해 전계완 정치평론가는 “대권잠룡들도 나름대로 고민이 많겠지만 불평등 문제를 뛰어넘는 어젠다를 제시하기 어렵다. 다만 각 후보들의 격차해소 내세우는 해법에 특별한 부분이 없다. 어젠다가 후보의 특징과 장점으로 연결되는 것이 중요한데 구체적인 해법을 내놓는 사람이 없다. 대권잠룡들의 어젠다를 보면 충분한 학습과 정치적 성숙도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비판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