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 동기생들 ‘불똥 튈라’ 사건 무마 요구
또 다른 서울 소재의 한 이공계열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준비 중인 유 아무개 씨(여·33) 역시 불쾌한 경험을 했다. 결혼한 유 씨에게 담당 교수가 성적인 농담을 계속 던진 것. 그는 유 씨가 피곤해 하면 “남편이 잠을 안 재웠느냐”라고 물었고, 수업에 지각을 하면 “남편이 뽀뽀하느라 안 놔줬냐”고 성희롱 농담을 건넸다. 술자리에서는 유 씨를 지목해 “유부녀가 주는 술은 맛이 없다”며 석사 여학생들을 데려오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같은 과 선배에게 하소연했지만 그는 “무사히 학위를 따고 졸업하고 싶으면 어쩔 수 없다”며 참으라고 말했다. 유 씨는 결국 남편에게조차 말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아야 했다.
최근 들어 대학 교단에서의 성범죄와 관련한 뉴스가 비교적 자주 보도되고 있지만 현실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는 것이 피해자들의 공통적인 주장이다. 일부 교수들의 성희롱 및 추행 문제에 대해 단체 행동이 가능한 학부생들과 달리, 폐쇄적인 대학원 내에서의 성 관련 사건은 아예 공론화조차 되지 못한 채 사그라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피해자는 “직접적인 가해자인 교수뿐만 아니라 사건을 축소시키고 은폐하려는 다른 학생들도 간접적인 가해자”라고 울분을 터뜨리기도 했다. 직접 피해를 입지 않은 다른 학생들이 피해자에게 사건을 무마할 것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 이는 한 명의 교수가 여러 명의 대학원생을 맡아 논문을 평가하고, 박사 과정 추천 또는 취업 등 졸업 후 진로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피해자들은 설명했다. 특히 관련 학과에서 영향력이 큰 교수일 경우 사건 공론화는 상상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이야기다.
이와 관련해 교수의 ‘갑질’ 성추행 피해자인 대학원생 박 아무개 씨(여·27)는 “아무리 뉴스에서 성범죄 교수들에 대해 떠들어댄다고 하더라도 학업부터 취업이 일직선으로 연결된 대학 사회가 바뀌지 않는 한 음지에서의 범행은 숙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원생이자 조교로 일하고 있는 박 씨는 교수로부터 점점 강도 높은 스킨십 요구와 외모 지적 등 지속적인 성희롱을 당해 왔다. 참다 못한 박 씨가 알아본 결과 십수년간 같은 피해를 입은 여학생이 10여 명을 넘었지만 누구도 문제를 공론화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박 씨는 “교수가 학과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영향력이 크다면 학내 성범죄 관련 전담 기구가 마련돼 있고 법이 보호해준다고 해도 피해자가 나서서 피해 사실을 증언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 대학 내에서 오히려 피해자가 다른 학생들 앞날까지 망친 가해자가 돼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섣불리 교수의 성희롱이나 성추행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성범죄 사실이 확정되더라도 대학 자체에서 교수들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지난달 20일 교육부가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박경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전국 대학 교수 성범죄·성희롱 징계 현황’에 따르면 2013년부터 올 6월까지 3년간 144개 대학 가운데 서울대 등 38개 대학 교수 47명이 성범죄로 징계를 받았다. 징계 사유(복수 포함)로는 강제추행이 25건으로 가장 많았으며 ▲성희롱(20건) ▲강간 및 강간미수(5건) ▲성매매(2건) 순이었다. 이 가운데 24명이 중징계인 파면 및 해임 처분됐으며, 정직이나 감봉을 받은 3명은 스스로 사임했다. 그러나 전체의 43%에 해당하는 나머지 20명의 성범죄 교수들은 아직도 같은 학교에 재직 중이다.
징계는 사안에 따라 경징계인 견책과 감봉, 중징계인 정직·해임·파면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해임, 파면 처분을 받는 교수들은 자동으로 면직되지만 정직, 견책, 감봉 처분을 받는다면 이들이 다시 강단에 서는 데에 무리가 없다. 이 때문에 강간 등 성폭행이나 학생 강제 추행 등 큰 범죄가 아닐 경우에는 학생이 피해를 입더라도 또 다시 같은 학교에서 가해자인 교수와 마주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대학 차원에서 사건 처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국가인권위원회 등 관련 기관이나 사법기관의 판단을 받기 위해 소수의 피해 학생이 직접 고소·고발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 관계자는 “가해자가 교수일 경우 성폭력이라는 1차적인 피해부터 교수의 지위로 인한 학점이나 학위 취득 등 교육의 불이익 등 2차 피해로 영향이 미치기 때문에 대학에서 피해자를 보호하며 사건을 마무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교수-대학(원)생 간 성범죄 사건이 인지될 경우 반드시 피해자와 가해자의 공간분리가 이뤄짐으로써 이들의 권력 관계가 사건 해결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