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에 날개 꺾인 갈매기…사자에 화풀이
과학적으로 설명도 불가능하다. 특정한 법칙이 없다. 객관적인 전력이나 순위와는 무관하다. A 팀에 강한 팀이 B 팀에게는 맥을 못 추기도 하고, C 팀만 만나면 허우적거리는 팀이 D 팀을 딛고 올라서기도 한다. 1위 팀이 꼴찌 팀에게 유독 힘을 못 쓰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일례로 올해 하위권으로 처진 롯데는 유일하게 정규시즌 우승팀 두산을 괴롭혔다. 지난해까지 정규시즌을 5연패한 삼성은 두산 외국인 투수 더스틴 니퍼트만 만나면 꼼짝을 못했다. 설명이 불가능하니, 원인도 모른다. 심리적으로 한번 ‘말리면’ 끝. 철저히 상대적이다.
10월 2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NC와 벌인 마지막경기에서 11 대 6으로 패배한 롯데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나와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롯데는 올시즌 NC와 상대 전적 1승 15패에 14연패를 기록했다. 연합뉴스
# 천적이 한 해 농사를 망친다
올해 롯데는 천적 한 팀 탓에 한해 농사를 망쳤다. 과장을 좀 보태면 그렇다. 롯데의 올 시즌 NC전 성적은 1승 15패. 이 정도면 처참하다. 올 시즌 성적에서 NC전 전적만 삭제해도 승률이 5할을 넘는다. 포스트시즌 진출을 노릴 수 있었다는 얘기다. 만약 NC전에서 반타작을 했다면? 마찬가지다. 마지막까지 LG, KIA와 치열한 5강 싸움을 펼쳤을 것이다.
시즌 전에는 5강 후보로 꼽혔던 롯데다. 올해 우승팀 두산과의 상대 전적(8승 8패)에서 유일하게 밀리지 않은 팀도 롯데다. 그러나 NC전에서의 부진이 끝내 발목을 잡았다. 시즌 2번째 맞대결이었던 4월 17일 경기에서 8-5로 이긴 게 처음이자 마지막 승리. 이후 NC전 14연패로 시즌을 마감했다. 반대로 NC는 올해 10승 이상을 올린 팀이 롯데밖에 없다. 바꿔 말하면, NC는 롯데 덕분에 정규시즌 2위로 올라선 것이다.
롯데처럼 극단적인 케이스는 아니라도, 천적 때문에 울어야 했던 팀은 많다. NC에게 괴롭힘을 당한 롯데는 삼성에 화풀이를 했다. 올해 삼성의 롯데전 성적은 5승 11패. 사실 롯데는 그동안 삼성의 우승 ‘도우미’였다. 삼성은 지난 5년간 52승 2무 32패로 롯데전에서 6할이 넘는 승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올해 믿었던 롯데에 발등을 찍혔다. 롯데는 한화(10승 1무 5패)와 함께 삼성을 하위권으로 끌어내렸다. SK 역시 두산전(4승 12패)과 한화전(5승 11패)에서 2~3승씩만 더 했어도 가을야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어느 팀이 호되게 당했나
사실 과거에도 올해의 롯데와 NC 사이처럼 심각한 먹이사슬이 존재했다. 특정팀을 상대로 한 시즌 승률 1할을 넘지 못한 사례는 이전에 총 다섯 팀 나왔다. 역대 특정팀 상대 최저 승률 1위 구단은 프로야구 출범 원년의 삼미. 그해 한국시리즈 우승팀이던 두산의 전신 OB를 상대로 16전 전패를 당했다. 역대 최초이자 현재까지는 유일한 전패 팀으로 남아있다. 올해 롯데가 1승을 거두지 못했다면, 같은 굴욕을 당할 뻔했다.
상대 전적 1승에 그친 구단도 네 팀 있었다. 1986년 청보가 삼성전 1승 17패, 1993년 태평양이 해태전 1승 17패를 각각 기록했다. 승률이 0.056에 불과했다. 1999년에는 쌍방울이 두산에게 1승 1무 16패, 2003년에는 롯데가 KIA에게 1승 1무 17패로 각각 밀리면서 바닥을 쳤다. 2003년 당시 롯데 선수였던 조성환 KBS N스포츠 해설위원은 “광주 원정을 떠날 때는 버스에 타는 것도 싫었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사실 앞서 1할 미만의 승률을 올렸던 다섯 팀은 그해 전체 승률 역시 4할을 넘기지 못했다. 그러나 올해의 롯데는 4할대 중반의 승률로 시즌을 마감했다. 대 전적에서 앞서거나 동률을 이룬 팀도 많다. 한때 5강에 대한 희망도 품었을 만큼 상승세도 탔다. 그래서 NC전에서의 부진과 추락이 더 아쉽다.
# 천적은 왜 생길까
사실 천적과의 경기가 더 괴로운 것은 단순히 1패를 안기 때문이 아니다. 수도권 한 팀에 유독 많이 졌던 지방 구단의 한 선수는 “이상하게 천적 팀과 경기를 하면 경기 내용도 잘 안 풀린다. 순조롭게 이길 것 같다가도 믿었던 마무리 투수가 나와서 경기가 뒤집히거나, 평소에 안 나오던 실책 같은 게 나와서 허무하게 패하기도 한다”고 했다. 이럴 때는 팀이 받는 충격이 두 배다.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던 희망이 터져 버리는 것처럼 허무한 것은 없다. 특정 베테랑 타자에게 유독 약한 한 투수도 “평소에는 내 피칭에 집중해서 던지지만, 천적 타자가 나오면 내가 아닌 상대를 생각해서 내 페이스를 잃는다. 그러다 그 선수에게 한 방 맞으면 평정심이 흔들려서 이후 다른 타자들과의 승부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증언했다.
그렇다면 애초에 천적은 왜 생길까. 대부분 ‘첫 단추’에서 결정된다는 게 많은 야구인의 증언이다. 특히 투수들에게는 데뷔전의 좋은 기억이 향후 프로 생활의 명암을 가르기도 한다. 데뷔와 동시에 KBO리그를 평정했던 LA 다저스 류현진이 그랬다. 그는 한화에서 뛸 때 LG전에 특히 강했다. 개인 통산 99승 가운데 LG전에서만 20%에 가까운 19승을 따냈다. LG전 30경기 평균자책점이 2.45. 역대 정규이닝 한 경기 최다 탈삼진(17개) 기록과 7번의 완투(완봉 3회 포함)를 포함해 각종 역사를 LG전에서 쌓았다. LG 입장에서는 악연 중의 악연이다. 이 모든 게 류현진의 데뷔전부터 시작됐다. 류현진은 2006년 4월 12일 잠실 LG전에 처음 선발 등판해 7⅓이닝 3피안타 10탈삼진 무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됐다. 처음 보는 신인 투수에게 호되게 당한 LG는 그 후로 꾸준히 류현진에게 승리를 헌납했다.
SK 김광현도 그랬다. 그는 데뷔 시즌인 2007년 5월 13일 광주 KIA전에서 6이닝 무실점으로 인상적인 첫 승리를 따냈다. 이후 KIA전에서 유독 강한 면모를 보였다. 김광현과 포수로 호흡을 맞췄던 박경완 SK 배터리코치는 “광현이가 그 승리 이후로 구속도 더 나오고 심리적으로 편안함을 찾았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이후 김광현은 KIA전 10연승을 달리면서 2014년까지 KIA전에서만 17승 7패, 평균자책점 2.91을 기록했다. 세 차례의 완투도 그 안에 포함돼 있다.
물론 이들 외에도 특정팀에 유독 강한 투수들은 많다.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투수로 꼽히는 선동열 전 KIA 감독은 모든 팀에 다 강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더 강한 팀이 몇몇 있었다. 현역 시절 롯데전에서 20연승, 태평양(전신 청보 포함)전 14연승을 달린 기록이 있다. MBC·삼성·OB전에서도 각각 12연승을 질주했다. 앞서 언급했던 니퍼트는 2011년 한국에 온 뒤 지난해까지 5년간 삼성전에서 14승 2패를 기록했다. 니퍼트의 재계약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삼성 타자들이 울상을 지었을 정도다. 지난해 한국시리즈에서도 삼성은 니퍼트에게 꼼짝 없이 당했다. 두산 장원준은 데뷔 후 SK전 9승 무패 중이고, 같은 팀 유희관도 한화전 9승 무패로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삼성 윤성환도 KIA전에서 통산 14승 3패를 올렸다. 올해는 한화 장민재가 SK전 6경기에서 5승 무패, 평균자책점 1.30을 기록해 화제를 모았다.
‘선수 대 선수’ 천적도 당연히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SK 최정은 류현진의 공을 편하게 치는 몇 안 되는 타자였다. NC 나성범은 LG 류제국을 상대로 4할대 타율에 9할대 장타율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LG 문선재가 KIA 양현종을 여러 차례 무너뜨렸다. 올 시즌 선발 출장한 횟수가 20경기를 갓 넘었지만, 양현종이 등판하는 날엔 1순위로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올해 친 홈런 5개 가운데 3개가 양현종을 상대로 나왔을 정도다.
# 영원한 천적은 없다
그러나 한번 천적이 영원한 천적은 아니다. 계기가 생기면 극복할 수 있다. 한화는 올해 SK를 상대로 11승 4패를 올렸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SK가 한화를 이겼다. SK는 2000년 창단 이후 한화 상대 전적에서 밀린 시즌이 딱 2번밖에 없었다. 2002년 8승 1무 10패, 2004년 9승 10패. 밀렸다 해도 호각세였다는 얘기다. 그러나 SK는 올해는 이상하게 맥을 못 췄다. 무엇보다 SK가 4위 혹은 5위 자리를 굳히려 하는 중요한 길목에서 늘 한화를 만나 발목을 잡혔다. 앞서 언급한 장민재가 새로운 천적으로 등극한 탓이다. 다만 한화는 SK의 ‘도움’을 등에 업고도 하위권으로 처졌다. 두산에 4승 12패, 넥센에 5승 11패로 밀려서 그렇다.
반대로 SK도 극복한 상대가 있다. ‘천적’ 투수 가운데 한 명이던 NC 이재학을 마침내 쓰러트렸다. 9월 4일 경기에서 이재학에게 패전을 안겼다. 그 경기 전까지 이재학은 SK전 통산 18경기(선발 15경기)에서 8승 2패, 평균자책점 2.73을 기록하고 있었다. 2014년 10월 7일에 8⅔이닝 2실점으로 호투하고도 패전 투수가 됐던 게 마지막 패전이었다. 그러나 이날 SK는 1회 선두타자 박승욱이 이재학을 상대로 초구 홈런을 때려내면서 마침내 기나긴 터널을 빠져 나왔다. 한동안 김광현에게 맥을 못 췄던 KIA도 지난 2년간은 3승 3패로 균형을 맞추는 데 성공했다.
그래도 역시 올해의 가장 큰 성취는 넥센의 ‘NC 트라우마’ 탈출이다. 넥센은 지난해 NC전에서 3승 13패로 처참하게 밀렸다. 한 해 전인 2014년(5승 11패) 성적보다 더 안 좋았다. 올해 NC의 도우미가 롯데였다면, 지난해는 단연 넥센이었다. 그러나 넥센은 올해 NC전에서 8승 8패로 균형을 맞추는 데 성공했다. 제압은 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어깨는 나란히 했다. 넥센 선수들은 “이제야 마음의 짐을 하나 덜었다”고 입을 모았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메이저리그에선… ‘타자’ 범가너, 커쇼 잡는 킬러 LA 다저스의 슈퍼 에이스 클레이튼 커쇼에게는 천적이 한 명 있다. 타자도 아니다. 투수다. 샌프란시스코 에이스 매디슨 범가너다. 선발 맞대결에서 패한 게 아니다. 범가너는 타석에서 커쇼를 상대로 홈런을 날렸다. 메이저리그에는 커쇼를 상대로 홈런 2개 이상을 친 선수가 단 15명밖에 없다. 범가너가 그 가운데 한 명이다. 투수가 상대 투수에게 홈런을 맞으면, 중심 타자에게 허용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기분이 나쁘다. 다저스와 샌프란시스코처럼 지구 라이벌 사이라면 더 그렇다. 범가너는 올해 4월 커쇼와의 선발 맞대결에서도 홈런을 쳤다. 이날 샌프란시스코가 8이닝 동안 커쇼를 상대로 때려낸 4안타 가운데 하나가 범가너의 홈런이었다. CBS 스포츠가 올해 최고의 메이저리거로 뽑은 LA 에인절스 마이크 트라웃은 디트로이트 맥스 슈어저에게 약하다. 커쇼는 애리조나 주포 폴 골드슈미트를 까다로워 한다. 골드슈미트의 커쇼 상대 타율은 4할을 넘는다. 골드슈미트는 커쇼는 물론 범가너의 공도 잘 치는 드문 타자다. 아무리 잘 던지고 잘 치는 선수에게도 천적은 존재한다는 얘기다. 토니 그윈은 현역 시절 그렉 매덕스, 톰 글래빈, 존 스몰츠, 페드로 마르티네스에게 모두 강했다. ‘에이스 킬러’로 유명했다. 그러나 ‘괴물’ 랜디 존슨만은 넘어서지 못했다. 통산 타율 0.338로 은퇴한 그가 존슨에게는 18타수 2안타(타율 0.111)에 그쳤다. 그런 존슨은 앨버트 푸홀스에게 유독 약했다. 수많은 유명 타자들을 상대로도 끄떡없던 존슨이지만, 푸홀스에게는 피안타율이 0.452에 달했다. 홈런도 6개나 맞았다. 이뿐만 아니다. 메이저리그 역대 좌완 최다승 투수 워렌 스판(363승)은 윌리 메이스에게 14년간 홈런 18개를 맞았다. 그렉 매덕스는 루이스 곤잘레스에게 유일하게 두 자릿수 홈런을 내줬다. 한 경기에서 홈런 2개를 한꺼번에 맞은 적도 있다. 워싱턴 간판타자 브라이스 하퍼는 지난해 뉴욕 메츠 맷 하비와의 대결에서 13타수 무안타에 그쳐 타격왕을 놓쳤다.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자랑했던 데이비드 오티스는 보스턴 시절 LA 에인절스 바콜로 콜론에게 맥을 못 췄고, 빌 뮬러는 마이크 무시나만 만나면 쩔쩔 맸다. 호세 레이예스는 A.J. 버넷이 나올 때마다 헛스윙을 연발했고, 마크 벌리는 스즈키 이치로에게 공을 던졌다 하면 안타를 맞았다. ‘코리안 특급’ 박찬호에게도 물론 천적은 있었다. 메이저리그 시절, 오클랜드전에서 7년간 단 1승도 거두지 못하는 경험을 했다. LA 다저스 시절부터 시작된 천적 관계가 텍사스로 이적해서도 이어졌다. 하필 오클랜드는 텍사스와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라이벌 팀이었다. 텍사스가 박찬호를 샌디에이고로 트레이드한 결정적 이유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다. 타자들 가운데선 블라디미르 게레로에게 한때 상대 타율이 5할에 육박했을 정도로 약점을 보였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