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5년 4월4일 민자당 입당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위)과, 99년 9월8일 김대중 대통령과 30대 그룹 의 오찬 간담회에 참석한 김석원 전 회장(아래 사진 왼쪽에서 두번째). | ||
30세의 젊은 나이이던 1975년, 재계랭킹 6위의 재벌 총수에 올랐던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 잘생긴 외모에 멋진 언변으로 뭇 여성들의 인기를 연예인만큼이나 많이 받았던 김 전 회장. 그래서 그의 사생활은 약간은 남달랐지만, 재계에서 그의 입지는 여느 재벌총수 못지 않게 탄탄했다.
그러나 그는 2004년 지금 실직자다. 10조원이 넘는 자산을 가진 재벌의 오너로 세계를 누비던 그였지만 지금 빈털터리다. 남모르게 숨겨논 재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에겐 드러난 재산이 별로 없다.
더욱이 그는 지금 옛 회장 시절 있었던 경영비리가 뒤늦게 밝혀지면서 법의 심판대에 설 운명이다. 재벌총수로, 또 국회의원으로 명성을 얻었던 그에게 오늘의 현실은 너무나 처참해 보인다.
어쩌면 그의 운명은 노태우 전 대통령과 연관된 자금을 사과상자로 보관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꺾이기 시작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에서 가장 잘나가던 재벌기업의 화려한 2세에서 피의자로 전락한 그의 기구한 운명은 인생무상마저 느끼게 한다.
그의 화려하던 기업인생은 지난 2002년 3월 일본 태평양시멘트의 자본유치를 통해 쌍용그룹의 모태인 쌍용양회의 정상화를 도모하면서 쌍용양회 대표이사직을 사임한 데 이어 지난 3월엔 쌍용양회의 등기이사직마저 그만두면서 종말을 고했다.
한때 쌍용정유(현 에스오일), 쌍용제지(현 P&G코리아), 쌍용증권(현 굿모닝신한증권), 쌍용자동차, 쌍용중공업(현 STX) 등을 거느리고 재계 6위권을 달리던 ‘쌍용그룹의 김석원 회장’이라는 오너 경영인의 시대가 끝난 것이다.
그의 비극은 여기서 멈추지 않을 모양이다. 대검 공적자금비리합동단속반은 지난 15일 김석원 쌍용양회 명예회장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및 횡령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구속수감했다.
김 회장이 받고 있는 혐의는 그가 쌍용그룹 회장으로 있던 98년~2000년 사이 자본잠식 상태였던 계열사 주식 40만여 주를 비싼 값에 쌍용양회에 팔면서 54억원을 챙기는 등 모두 2백62억원의 손해를 회사에 끼치고(배임) 회삿돈 49억원을 횡령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쌍용그룹 부실화에 따른 보증책임을 피하기 위해 주택 5채와 농장 1곳 등 모두 50억원대 부동산에 대한 명의를 변경한 혐의(부동산 실명제법 위반)도 받고 있다.
실상 그에 대한 구속은 지난 가을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지난 여름부터 대검 중수부의 공적자금 특별수사본부가 쌍용양회의 전현직 경영진을 소환조사하면서 김석원 전 회장과 그의 동생인 김석준 쌍용건설 회장(전 쌍용양회 회장) 등에 대해 비밀 소환조사를 벌였던 것.
또 2003년 통일그룹에 매각한 용평리조트와 관련해서도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김 전 회장측에선 용평리조트 매각 전인 지난 99년 용평리조트 내에 있던 김 전 회장가의 선산 부지 11만여 평을 김 전 회장의 누이인 김의정씨에게 ‘헐값 매각’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또 쌍용양회에서 분사된 용평리조트의 지분 50%가 팬퍼시픽리조트라는 페이퍼컴퍼니에 넘어가면서 김 전 회장의 아들인 지용씨가 등기이사에 오른 게 위장매각 의혹을 부풀렸다.
김 전 회장은 그룹이 부실화되면서 한남동의 자택을 팔고 서울 신문로의 선친 자택으로 이사갔다.
이것도 의혹의 도마위에 올랐다.
▲ 지난 96년 재계 서열 6~7위일 당시의 쌍용그룹. | ||
때문에 이번 그의 구속 혐의에서 용평리조트 내 선산 매각과 성곡미술관 소유권 문제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
이에서 보듯이 그에게 남은 것은 공식적으론 누나 명의로 넘어간 용평의 선산과 신문로 선친 자택, 그리고 쌍용양회의 지분 1.96%가 전부인 것.
지난 97년 외환위기 이후 10년도 안돼 30여 년 동안 국내 재벌 열 손가락 안에 끼던 재벌이 ‘자연사’를 한 것이다.
쌍용그룹은 김 전 회장의 부친인 김성곤씨가 금성방직이라는 회사를 차리면서 세워진 기업으로 김성곤 회장은 3공화국의 유명정치인으로 정·재계를 넘나드는 행보를 보였다.
김 전 회장은 부친 사망 뒤인 지난 75년 쌍용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가 취임한 뒤 쌍용은 레저산업(용평리조트)과 자동차산업(쌍용자동차)에 진출했다.
이 두 사업은 모두 김 전 회장이 의욕적으로 도전한 쌍용의 신규사업이었다.
하지만 이 두 사업은 결국 쌍용그룹이 김씨 일가의 품을 떠나게 만들었다.
특히 86년 부채 1조여원을 안고 의욕적으로 인수한 동아자동차는 이후 쌍용그룹의 ‘밑빠진 독’이 됐다. 자금력이 탄탄하던 쌍용그룹이 모태인 쌍용양회마저 포기하게 만든 게 바로 자동차 사업이었던 것.
이후 쌍용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다 김 전 회장은 지난 95년 선친의 기반이었던 대구지역 국회의원으로 변신했다.
나름대로 승부수를 던진 것. 그가 정계에 입문할 당시 여당은 민주자유당. 그는 민주자유당의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됐고, 그가 정계에 입문했을 당시에는 동생인 김석준 쌍용건설 회장이 그룹 회장을 맡으면서 쌍용그룹의 재기를 도모하기도 했다.
하지만 97년 말 대선에서 집권 세력이 사상 처음으로 여권에서 야권으로 넘어갔다.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 2선의 임기를 시작하던 ‘국회의원 김석원’은 98년 2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경영에 복귀했다. 사실상 그의 정계진출도 쌍용에는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사실 그가 국회의원으로 있던 시절인 96년은 김 전 회장 사업 인생의 고비였다. 96년 무렵만 해도 쌍용은 재계 서열 6~7위권이었다. 하지만 밑빠진 독에 물붓기식의 자동차 투자에 이미 내부적으로 자금이 고갈되고 쌍용차의 부채가 상당 수준으로 그룹 경영의 위협요소가 되던 시점이었다.
96년 말 승용차 사업을 추진하던 삼성그룹과 쌍용자동차의 빅딜이 협상 막판에 김 전 회장이 ‘미련’을 버리지 못해 이뤄지지 못했다. 당시 삼성은 백색가전을 쌍용에 넘기고 쌍용은 자동차 사업을 교환하는 방식의 빅딜에 대한 논의가 실무부문에서 상당한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97년 환란이 닥치면서 쌍용자동차의 부실은 쌍용그룹 전체의 부실로 이어졌다. 뒤늦게 김 회장은 자동차에 대한 미련을 접고 지난 97년 말 쌍용차의 부채 3조4천억원 중 절반을 나누는 조건으로 대우그룹에 쌍용차를 넘겼지만, 이미 실기한 뒤였다.
김 전 회장이 경영에 복귀했다고는 하지만, 곧이어 환란이 덮치는 등 내리막길의 연속이었다. 쌍용이 쌍용차를 대우에 넘기면서 인수한 1조7천억원의 채무는 5년여 만에 이자까지 더해져 2조7천억원대로 늘어나 결국 김 전 회장이 쌍용의 경영권을 포기하고 일본 태평양시멘트로부터 외자유치를 하게 만들었다.
결국 김 회장은 지난 99년 태평양으로부터 3천6백60억원을 유치해 숨통을 텄다. 태평양은 지난 2001년 전환사채 3천억원어치를 추가로 인수하며 쌍용양회를 접수하기 시작했다. 김 전 회장은 태평양과의 공동경영을 선언했지만, 지난 2002년 2월에는 공동의사회 의장직을 사퇴하고, 지난 3월에는 등기이사직에서도 물러나 사실상 쌍용양회와 이별을 고한 상태다.
게다가 김 전 회장측에서 선임한 명호근 공동 대표이사도 최근 부회장으로 한발 물러나고 일본 태평양측에서 지명한 스즈키 타다시 사장이 공동대표이사로 실무 경영을 담당하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 쌍용양회의 최대주주는 채권단이다.
태평양은 30% 정도의 지분을 지난 단일 최대주주일 뿐이다. 하지만 김 전 회장의 지분이 1.96%로 미미하기에 사실상 일본측으로 경영권이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쌍용정유, 쌍용제지, 쌍용중공업 등을 매각하며 기사회생을 노렸지만 쌍용차의 부실로 인한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쌍용그룹 김씨 오너 시대는 끝나게 됐다.
검찰쪽에선 지난해 8월 매각된 은화삼 골프장에 대해서도 조사를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과정에서 김 전 회장이 자신에게 적용된 혐의를 상당부분 벗을지, 아니면 추가적인 혐의가 더 드러날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