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는 세월호·문재인·박원순…“증거 안남기려 규정 변경 등 교묘히 압박” 주장
지난 10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 현장. 박은숙 기자
지난 10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문예위 회의록에서 정부가 예술 지원에 앞선 정치 검열을 위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관리해 온 증거가 드러났다고 밝혔다. 문예위는 문화·예술단체를 선정해 정부 보조금을 지원해 주는 역할을 한다.
문예위가 선정하는 문화·예술단체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선정이 취소되거나 단체 관계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의혹이 줄곧 제기돼 왔으나 누구도 명확한 근거를 대지는 못했다. 심지어 문예위와 문체부 등 관계 기관은 의혹에 대해 “일부 간부 직원들의 부적절한 행위일 뿐”이라며 직원들의 개인적인 일탈로 치부하는 데에 그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엔 청와대와 문체부가 문예위 심사와 심사위원 선정에 개입해 문화·예술인들을 직접 검열해 왔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도 의원이 입수한 문예위의 회의록은 각각 2015년 5월 29일과 11월 6일자 회의록이다. 그에 따르면 2015년 5월 29일 회의에서는 기금 지원심의 운영 규정에 대한 안건이 진행됐는데, 당시 권영빈 문예위원장은 “우리 예술위원들이 추천해서 책임심의의원들을 선정하면, 해당 기관에서 그분들에 대한 신상 파악 등을 해서 ‘된다, 안 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탈락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 것으로 확인됐다.
문화·예술계에 정부가 지정한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사실은 그 이후의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권 전 위원장은 “책임심의위원을 선정해 놓고 보니까 여러 가지 문제 중에 지원해 줄 수 없도록 판단되는 리스트가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밝혔다. 정부 보조금 등 지원 심의 관련해서도 “심의상의 문제는 참 말씀 드리기가 힘든데, 심의를 우리 마음대로 할 수가 없게 돼 있다. 그런 점에서 자율적인 심의가 원만하지 않다”고 발언했다.
2015년 11월 6일 회의에서는 아예 “문예위 측이 선정한 심사위원을 청와대가 직접 배제했다”는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결국 문화·예술계 전반에 청와대가 깊숙이 개입하거나, 개입 의도를 가지고 움직였다는 것이다.
도 의원은 지난해 11월 진행된 국감에서도 청와대가 개입한 문화·예술계 검열 문제에 대한 의혹을 꾸준히 제기해 왔다. 그에 따르면 문예위가 장르별로 우수작 100편을 선정해 1000만 원씩 지원하는 사업인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에서 문예위가 직접 특정 작가를 거론해 “심사 결과를 조정해 달라”고 요구했다는 정황이 밝혀진 것. 이 때문에 당시 희곡 분야 심사에서 100점을 받아 선정 1순위였던 이윤택 감독(작가 겸 연출가)이 탈락했다. 이를 두고 그가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의 TV 찬조 연설을 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또 단체당 1억 원씩 지원하는 ‘창작 산실-우수 공연작품 제작 지원’ 사업에서는 이미 선정된 박근형 작가를 문예위 직원이 직접 만나 포기할 것을 종용했다고 도 의원은 밝혔다. 박 작가는 2013년 국립극단에서 연극 <개구리>를 공연했는데, 극의 내용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하했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박 작가는 결국 지난해 8월 지원받는 것을 포기했다.
이번에 밝혀진 청와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사들은 모두 9473명이다. 이들은 각각 4개 분야로 나눠져 있는데, ▲세월호 정부 시행령 폐기 촉구선언(문화예술인 594명) ▲세월호 시국선언(문학인 754명) ▲문재인 대선후보 지지 선언(지역 문화예술인 6517명)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지지 선언(문화예술인 1608명) 등이다.
널리 알려진 유명인으로는 영화배우 김혜수, 문성근, 문소리, 박해일, 송강호 등이 포함돼 있으며, 영화감독 김지운, 박찬욱, 작가 박범신 등도 이름을 올렸다. 당시 직접 선언에 참여했던 이들 외에 추가적으로 리스트에 오른 인사까지 1만 명에 가까운 인원을 정부가 직접 관리·감시했다는 말이 된다. 청와대는 이 리스트를 문체부에 내려 보내 관리하도록 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다만, 지난해 이윤택 감독·박근형 작가처럼 올해 문예위로부터 부당한 검열을 당하거나 심사 선정 외압으로 탈락했다는 관계자들의 증거나 진술은 아직까지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상태다. 문체부 역시 이 점을 이용해 문서 자체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조윤선 문체부 장관은 13일 국감에서 제기된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해 “그런 문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고 받았다”고 답변한 바 있다. 도종환 의원이 더불어민주당 의원 공동 명의로 조 장관에게 “블랙리스트 문건을 제출하라”고 요구했으나, 문체부 측은 “문서가 없기 때문에 제출할 수 없다”고 거부하고 있다. 현재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돌고 있는 ‘블랙리스트’에 대해서 이장우 새누리당 의원은 “어떤 사람이 어떤 의도로 이 같은 허위 사실을 유포했는지 검찰 수사 의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점에 대해서 도종환 의원 측은 <일요신문>과의 통화를 통해 “지난해와는 달리 올해 문체부와 문예위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교묘하게 관련 규정들을 변경하는 방식으로 문화·예술계를 압박해 왔다”라며 “선정 등에 개입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문체부 측도 이를 알고 블랙리스트가 없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블랙리스트 올려주셔서 감사” 너도나도 인증 청와대가 문화체육관광부에 1만 명에 가까운 문화·예술인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렸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문화·예술인들 사이에 ‘블랙리스트 인증’이 이어지고 있다. ‘공연계’ 블랙리스트에 오른 탁현민 성공회대 교수는 12일 오후 8시 자신의 페이스북에 요리 전과 요리 후의 생선 사진을 올렸다. 그는 사진에 “블랙리스트에 오른 4년 동안 연출 대신에 놀랍게 늘어난 (요리)실력, 박근혜에게 깊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을 적었다. 이에 앞선 12일 새벽, 탁 교수는 “정치적 색깔이 짙은 연출가에게 일이나 공연장을 줄 수 없다는 이 준엄한 ‘정치적’ 결정은 지난 4년간, 아니 이명박 박근혜(정권) 내내 유지됐었습니다. 특히나 나랏돈을 받는 공연장이나 행사에는 추호도 흔들림 없었습니다”라며 담담하게 자신의 경험을 밝히기도 했다. 탁 교수의 글에는 공지영 작가가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은 뒤 하이파이브를 하는 이모티콘을 댓글로 게시했다. 탁현민 교수는 2012년 12월 문재인 후보 지지선언을, 공지영 작가는 문재인 후보 지지선언과 2014년 6월 2일 문학인 세월호 시국선언 두 건에 이름을 올렸다. 이승환 페이스북 캡처 영화배우 문성근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민변께 여쭙니다. 이 사안, 박근혜 정권을 상대로 그동안의 물적·정신적 피해에 대한 배상 청구소송이 가능한가요?”라는 질의를 올렸다. 그는 2015년 5월 1일 세월호 정부 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에 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9473명에 아쉽게(?) 이름을 올리지 못한 문화·예술인들도 동참했다. 가수 이승환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거 참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나도 넣어라 이놈들아”라며 자신의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오르지 못한 것을 꼬집었다. 가수 오지은 역시 트위터에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나의 이름이 없다니 문화 헛했네…”라는 푸념글을 올렸다. [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