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닭 외교관 ‘ 386과 통했다’
▲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 핵실험과 관련, 지난 10일 전직 대통령들을 초청해 기다리던 중 송민순 외교안보실장과 이야기하고 있다. 송 실장은 유엔 사무총장이 된 반기문 외교장관 후임 1순위로 거론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송민순 청와대 외교안보정책 실장과 관련해 인수위 위원들에게 했다는 얘기 한 토막이다.
한 고위 외교관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외국이라고는 거의 나가 본 적이 없다는 노 대통령이 이 말을 하면서 송 실장이 어디에 근무하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송 실장은 그때까지 노 대통령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노 대통령이 어떻게 송 실장을 알게 됐는지는 외교통상부 직원들 사이에선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노 대통령은 마산과 가까운 경남 진영 출신이며 경남 진양에서 태어난 송 실장이 마산고를 나왔다는 점에서 고향 지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게 됐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
노 대통령이 우리나라 외교관 중에서 ‘유일하게’ 알고 있었다는 송 실장은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어찌됐든 참여정부 외교의 기린아라고 할 수 있다. 참여정부 초기 야당 인사가 도지사로 있던 경기도의 국제협력 자문대사라는 한직에 있다가 차관보에서 차관을 건너뛰고 현재의 장관급 자리로 수직 상승한 외교안보 정책 분야의 실세가 송 실장인 것이다.
그는 대통령의 그림자라는 청와대 참모인데도 직접 언론이나 세미나, 강연회 등을 통해 빈번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또 그는 외교부 장관이나 국방부 장관, 통일부 장관처럼 국회에 불려나가 답변을 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관련 부처에서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 얘기가 나오면 곧바로 언론 등을 통해 바로 잡기 일쑤다. 막강 청와대 참모가 있었던 적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최전방에 나서 진두지휘하고 국민을 상대하는 일은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한 외교관은 그를 “미국 닉슨 대통령 때의 헨리 키신저 백악관 안보보좌관”이라고 말했다.
지난 9일 북한이 핵실험을 한 이후 송 실장의 힘이 어느 때보다 잘 드러났다. 그는 청와대 출입기자를 상대로 한 브리핑이나 세미나, 국회 답변 등을 통해 우리 외교정책을 설명하고 있다
송 실장은 지난 12일 청와대 브리핑에서 통일부와 외교부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결의안 초안을 볼 때 금강산 사업과 개성공단사업이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밝힌 데 대해 “외교부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요”라며 바로 반박했다. 지금 그런 소리 할 때가 아니라는 면박성 냄새가 난다.
그의 위력은 이달 초 외무고시 선배로 장관 후보 경쟁자인 이태식 주미 한국대사를 다루는 데서도 드러난다. 이 대사가 워싱턴에서 한·미 정상회담이 열린 뒤 특파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노 대통령이 미국의 폴슨 재무장관에게 미국의 방코 델타 아시아(BDA)에 대한 조속한 조사를 요구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자 바로 워싱턴으로 전화를 걸어 경위서 작성을 지시했다. 이 대사가 자신의 발언내용을 전면 취소하고 한발 물러선 것은 당연지사다.
현재 그의 위력은 노 대통령의 최측근이라고 불리는 이종석 통일부 장관의 전성기보다 훨씬 막강하다. 이 장관은 부처 장악력이 약하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송 실장에 대해선 그러한 얘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외교섭력도 마찬가지다. 정통 외교관 출신인 그는 경륜과 능력에서 학자 출신인 이 장관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치자. ‘외교의 달인’이라고 불리는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을 역대 어느 외교부 장관보다 왜소하게 보일 정도로 압도하고 있는 이유는 그런 이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송 실장과 반 장관 두 사람을 오랫동안 지켜보아온 외교관들의 중론은 경력과 능력 면에서 반 장관이 송 실장을 훨씬 앞선다는 게 중론이다. 여기에는 반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 선거에 몰두하면서 생긴 공백을 송 실장이 파고들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그럴 듯하게 돌아다니고 있다. 그렇지만 이 분석만으로도 충분치는 않아 보인다.
송 실장의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우선 그의 경력을 보자. 그는 대부분의 외무고시 동기보다 3~4세 많은 28세에 외무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외교부 안보과장, 북미과장, 청와대 비서관, 북미국장, 차관보 등을 거친 전형적인 미국통이다. 한마디로 그는 우리나라 외교관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최상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정통 외교관 출신이다.
그렇지만 그는 전통적인 외교관의 이미지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바꿔 말해 그의 어법이나 표정에서 전혀 ‘버터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에 싸우듯 몰아붙이는 그의 어투는 합의를 이끌어내기 보다는 오히려 상대방의 전의를 불러일으킬 정도다.
외교통상부 출입 기자 중에서 송실장이 실무책임자일 때 취재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기억이 있다. 그들은 첫 대면에서 한결같이 송 실장과 언성을 높이며 심한 말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한 기자는 “송 실장과 거의 주먹다짐 일보직전까지 갔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점은 한국인 최초로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된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과 완전히 대비된다. 반 장관은 송 실장과 비슷한 길을 걸어왔지만 완전히 다른 스타일이다.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된 후 반 장관과 인터뷰하던 미 ABC 방송의 아침 방송 앵커 빌 와이어는 반 장관에게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 대해 질문하다 미꾸라지 담 넘어가는 듯한 답변만 계속되자 “한국 언론이 당신을 ‘미끄러운 뱀장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겠다”고 몰아붙였다. 반 장관은 여전히 웃으며 “나는 언론에 항상 우호적”이라고 역시 핵심을 피해 갔다고 한다. 전형적인 외교관의 어법이다. 송 실장이라면 아마 그 자리에서 인격을 모욕하지 말라며 한판 붙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영어가 화려하지도 않다. 그의 영어는 간단하고 명료하다. 그는 춘천에서 탄약병으로 군복무를 할 때 <리더스 다이제스트>로 영어 실력을 닦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 반기문 장관(왼쪽)과 송민순 실장은 비슷한 경력에도 스타일이 너무 달라서 눈길을 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송 실장은 완전히 싸움닭 스타일입니다. 그렇지만 그 속에는 진실성이 엿보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정하고 친해질 수밖에 없지요.”
외교부를 오랫동안 출입했던 한 언론인은 싸우면서 친해진다는 우리의 옛말이 바로 송 실장의 경우에 해당된다고 설명했다. 또 그의 특장은 뚝심과 추진력, 그리고 승부사 기질에 있다.
그의 이러한 기질이 가장 잘 발휘된 것이 지난해 6자회담에서 채택된 9·19 공동성명이다.
그는 마지막 결정을 미루는 북측 6자회담 수석대표 김계관 외무성 부상에게 미국 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를 거론하며 “그 같은 친구를 도와야지, 아니면 다른 강경파하고 협상하고 싶냐”고 닦달했다. 심지어 “앞으로 송민순과 협의할 생각 말라”고 윽박질렀다고 한다. 미국에 대해서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미국과 반대편에 서는 것이지만 이렇게 나온다면 반대편에 서라고 강요하는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공격했다. 힐 차관보가 막판에 대북 경수로 지원 여부를 두고 망설이자 기자들에게 “북한이 경수로를 가질 기회의 창이 열려 있다”고 앞서 치고 나갔다. 그의 경상도식 간단 명료성과 저돌성, 화끈함 등이 비슷한 성향의 노 대통령과 일치했을 가능성이 높다.
송 실장의 특장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문학도답게 정곡을 찌르는 빼어난 비유가 그의 매력이다. 북·미의 대립으로 6자회담이 난항을 겪자 “광주리에 과일만 담아야지 물까지 담으려 했다”며 양측을 비난했다. 또 한반도 비핵화 원칙과 그를 위한 북핵 폐기, 미국의 상응조치를 “한 지붕 아래 두 개의 기둥”이라고 표현했다. 최근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필요하고도 적절한 수준의 대북 대응조치’에 대해서는 “물컵에 넘치지 않을 정도로 채워주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그의 독특한 비유 능력 때문에 그가 익명을 전제로 한 발언들도 쉽게 들통이 나 효과가 별로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송 실장의 개인적 성향이다. 외교부의 다른 관리, 특히 미국통들이 다분히 국제주의적 성향을 띠는 데 비해 상대적이겠지만 그는 상대적으로 민족주의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외교부 고참 중에서는 누구보다 노 대통령과 현 정부의 실세인 386과 코드가 맞는 것 같다.
여기에 그는 386 출신 청와대 비서관을 견제하지 않고 놓아주는 게 외교실세로서 장수하고 있는 비결로 꼽힌다. 그의 친정인 외교부에서는 386 비서관들의 행태에 대해 그가 견제를 해주길 바라지만 그는 그대로 둔다는 게 외교부 직원들의 불만이다. 단순히 생존술의 일환일 수도 있지만 실제 코드가 맞기 때문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북한이 협상을 통한 비핵화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말로만 해도 부시 행정부 정책이 움직일 수 있다”거나 “국제사회와 엇박자 내자는 것은 아니지만 유엔에 우리 운명을 맡기면 자기 운명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등 지난 18일 한 세미나장에서 나온 발언들은 그가 얼마나 의식 측면에서 386과 가까워졌는지, 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북미국장을 마치고 폴란드 대사로 갔다가 외시 동기인 이수혁 현 영국 대사에 밀려 경기도 자문대사를 갔을 때 ‘코드’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아이러니인 셈이다. 송 실장은 경기도 자문대사 시절 손학규 당시 경기지사를 도와 외자 유치에 상당한 기여를 했으며 지금도 손 전 지사와 빈번하게 교류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송 실장은 반기문 장관의 후임으로 외교통상부 장관 후보 1순위에 있다. 노 대통령이 자신과 배짱이 맞는 송 실장에게 계속 옆에 있어 달라고 얘기했다는 소문도 있지만 일단 누구도 그가 1순위라는 데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가 장관이 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나이에 비해 너무 늦게 고시에 합격하는 바람에 이른바 기수가 너무 낮아진다는 것이다. 외시 9기인 그가 장관이 되면 또 다시 외교관들의 세대교체 바람이 불가피하다. 정권 말기라서 외교관들의 대폭적 물갈이도 상당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걸림돌은 싸움닭 스타일인 그가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적격인가 하는 점이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 중에서 반기문 장관을 나쁘게 얘기하는 사람은 적지만 송 실장에 대해서는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이 다수 있다. 송 실장으로서는 마냥 안심할 수는 없는 상태다.
북한 핵실험 국면에서 대통령의 최측근에서 한국의 외교를 담당하고 있는 송 실장의 표정에 상당한 변화가 있다. 평소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상대방을 몰아세우던 어투도 많이 무디어졌다. 자신의 예상과 달리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이에 따라 자신의 작품이랄 수 있는 9·19 공동성명이 휴지조각이 될 위기를 겪자 일선에 직접 나섰던 실세로서 모든 부담을 송 실장이 지는 듯하다. 송 실장이 외교관의 꿈인 장관이 될지, 야당의 공격에 막혀 꿈을 접을지는 곧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그의 표정이 다시 펴질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정철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