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 모르는 오뚝이 ‘부활은 이제 시작’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그와의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됐다. “군 생활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는 교과서 같은 답변이 그의 입을 통해 나왔다. 취재 수첩은 뻔한 말들로 채워졌다. 구름을 뚫고 따뜻한 햇볕이 잠시 국군체육부대(상무) 불사조 연병장을 비춘 순간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동료들은 해외에 나갔고 저는 입대했다고 해서 기죽지 않습니다. 이대로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2년 뒤에 좋은 모습으로 다시 설 겁니다. 반드시….”
그가 떠난 뒤 한 기자가 입을 열었다. “분하기도 하겠지. 발밑에도 못 오던 애들은 외국에 나가고 자기는 군대 갔으니….” 연병장을 나서며 다른 기자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동국이 재기할까?”
#추락한 천재
한-일월드컵 최종 명단 발표를 앞두고 있던 2002년 봄 파주트레이닝센터. 이동국이 대표팀 훈련을 마치고 센터 안에 있는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몇몇 기자가 그를 불렀다. 어두운 표정의 이동국은 ‘순순히’ 섰다. 그냥 갈 줄 알았던 이동국이 인터뷰에 응하자 기자들은 약간 당황했다. 임기응변이 강한 한 기자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트렸다. “히딩크 감독과 면담했다는 소리가 있던데요.” 그가 짧게 답했다. “하면 뭘 해요. (제 말은) 들어주지도 않는데….”
당시 이동국은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2001년 여름 독일 베르더 브레멘에서 포항 스틸러스로 돌아온 후 되는 일이 없었다. 부상과 부진에 연이어 발목을 잡히며 훈련장에서나 경기장에서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라이언 킹’의 위용을 잃은 지 오래였다.
이동국은 히딩크 감독이 자신을 ‘게으른 선수’로 생각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량한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설마 나를 뺄까’하는 대책 없는 희망도 있었다. 희망은 최종 명단이 발표되던 날 무참히 박살났다. 이동국은 한-일월드컵 열기가 한반도를 휘감았을 때 패배감과 싸워야 했다. 4강 영웅들이 영광과 찬사를 받을 때 실패한 선수라는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아야 했다.
#“C급이오”
히딩크 감독은 월드컵 최종 명단 발표를 앞둔 어느 날 밤 코치들을 불렀다. 다음날 훈련에 대해 이야기하던 히딩크 감독은 별안간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다. “전 세계 공격수들을 A, B, C급으로 나눈다면 이동국은 어디에 들까요?” 머리를 긁적이던 한국인 코치 한 명이 입을 열었다. “B급 정도에 들 것 같은데요.” 히딩크 감독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C급이오.”
‘C급 공격수’ 이동국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명예 회복을 노렸다. 월드컵 진출 좌절로 구겨진 자존심을 펴고 해외진출의 밑거름이 될 군 면제도 받으려 했다. 하지만 대표팀이 이란과의 4강전에서 패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영표의 페널티킥 실축으로 결승진출이 좌절된 순간 고개를 숙였다. 서럽게 울며 꼬일 때로 꼬인 인생을 원망했다.
#소년에서 남자로
이동국이 브레멘에서 뛸 때 통역을 맡았던 ‘풋볼파크’ 박종완 대표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이동국 선수의 브레멘 시절 동료였던 마르코 보데가 제게 축구 선수들을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하더군요. 비판과 질책을 받아들이며 성장하는 선수가 있고 칭찬과 격려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선수가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보데는 이동국 선수를 후자로 봤습니다. 정확하게 짚은 것 같지 않습니까?”
요하네스 본프레레 감독은 ‘태극호’를 맡은 외국인 감독 중 최악으로 꼽히는 지도자다. 독불장군 같은 지도방식과 개념 없는 전술로 갖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동국은 본프레레 감독 밑에서 다시 일어섰다. “한국에서 이동국보다 나은 공격수는 없다”는 본프레레 감독의 칭찬 속에 잃어버린 자신감을 찾아 ‘라이언 킹’으로 우뚝 섰다.
본프레레 시절의 이동국은 히딩크 시절의 이동국이 아니었다.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얘기했고 감독의 지적을 겸허히 수용했다. 내성적인 소년이 군대에서 ‘삶의 방식’을 아는 남자로 거듭난 것이다.
#운명의 장난
재기에 성공한 이동국은 딕 아드보카트 감독 밑에서도 대표팀의 간판 공격수로 활약했다. ‘히딩크 사단’의 수석코치 핌 베어벡이 ‘아드보카트 사단’에서도 같은 임무를 맡은 터라 이동국의 대표팀 내 위상이 달라질 것이란 말이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인생의 쓴맛을 경험한 이동국은 4년 전의 ‘게으른 C급 공격수’가 아니었다.
한-일 월드컵 출전 좌절을 평생의 한으로 여긴 이동국은 독일월드컵을 통해 울분을 씻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훈련장에서나 경기장에서나 4년 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동국의 바람은 이뤄지는 듯했다. 독일월드컵을 앞두고 그의 몸 상태와 골 감각은 절정에 올랐다. 매 경기 골을 터트리며 월드컵 골 잔치를 위한 리허설을 했다.
얄궂게도 불행은 독일월드컵을 불과 두 달 정도 남겨놓았던 2006년 4월 5일 찾아왔다. 인천 유나이티드의 골 그물을 찢으며 네 경기 연속 골을 신고한 그는 후반 38분 패스를 받기 위해 방향을 틀다 오른 무릎을 삐끗했다. 누가 태클을 건 것도 아니었다. 그냥 혼자서 뛰다가 귀신의 장난에라도 걸린 것처럼 쓰러졌다.
이대로 또 4년을 기다릴 수 없었다. 이동국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독일 프랑크푸르트 소재의 스포레크 스포츠 재활센터로 가기로 했다. 스포레크에서 수술을 미뤄도 좋다는 진단만 내리면 월드컵을 소화하고 수술을 받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진단 결과는 십자인대 완전파열. 결국 이동국은 월드컵을 포기하고 수술대에 올랐다.
한국-토고전이 열린 2006년 6월 13일 프랑크푸르트. 이동국은 아내와 함께 경기장을 찾았다. 담담한 표정으로 필드에서 뛰는 동료들을 관중석에서 지켜봤다. 4년 전만큼 쓰라리진 않았지만 가슴 한구석은 답답했다.
# 끝이 아닌 시작
연병장에서 이대로 쓰러지지 않겠다며 입술을 깨물었던 이동국. 그는 4년 만에 자신의 꿈을 이뤘다. 잉글랜드 프리미어십 미들즈브러에 입단하며 유럽 재진출의 소원을 푼 것.
꿈을 이루기 위해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한국 최고 공격수라는 자존심을 버리고 입단테스트에 응했고 목돈 대신 푼돈을 택했다. 하지만 그는 주저 없이 꿈을 좇았다. 가시밭길이라는 걸 알았지만 “지금이 유럽에 진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며 도전했다.
K리그에 잔류했다면 누구처럼 매달 1억 이상을 통장에 찍을 수 있었다. 스타 대접을 받으며 어깨에 힘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꿈꿔왔던 무대에 서기 위해 달콤한 유혹들을 모두 외면했다. 이동국은 미들브즈러에 입단한 뒤 “프리미어십 진출은 성원해주신 팬들의 힘이 컸다. 어렵게 진출한 만큼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라 생각하고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말했다.
#그에 대한 몇 가지 오해
적지 않은 팬들이 이동국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다. ‘잘 놀고 게으른 선수’라는 게 대표적인 선입관이다. 2001년 여름 이동국이 브레멘에서 포항으로 쫓겨나듯 돌아왔을 때 갖가지 소문이 불거졌다. ‘훈련에 몰두해도 모자랄 판에 연예인을 끼고 놀았다’거나 ‘워낙 게을러서 적응에 실패했다’는 식의 출처가 불분명한 소문이 나돌았다.
‘풋볼파크’ 박종완 대표는 이런 소문에 쓴웃음을 짓는다. “몸 상태가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브레멘에 갔죠. 경쟁자들도 워낙 강했고…. 피사로와 아일톤은 그 당시 분데스리가 어느 팀에 가도 주전을 꿰찰 수 있는 선수들이었어요. 이동국 선수가 노느라고 적응을 못했다고요? 내성적인 성격 탓에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파티장이나 나이트클럽은 물론 카페에도 가지 않았어요.”
박 대표는 한마디 덧붙였다. “이동국 선수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예요. 친한 사람들 앞에서는 농담도 잘 하지만 모르는 사람과 만나면 진짜 무뚝뚝하죠. 참 그때는 군대에 가기 전이니 요즘에는 성격이 많이 바뀌었겠죠. 얼마 전 기사를 보니 미들즈브러에 가자마자 탁구를 치며 동료들에게 다가섰다고 하더군요. 성실한 선수인데다 내성적인 성격도 많이 바뀌었으니까 이번에는 성공할 겁니다.”
전광열 스포츠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