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갈이는 덩치로 하는 게 아냐
▲ DJ 차남 김홍업 후보와 박빙의 승부를 벌인 끝에 당선된 무소석 이윤석 후보가 지난 10일 부인 박정애 씨와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 ||
4·9 총선에서 통합민주당 텃밭인 전남 무안·신안에서 맞붙은 무소속 이윤석 후보와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차남 김홍업 후보 간의 혈투 결과다. 승자는 이윤석 후보(48). 이 두 무소속 후보의 피 말리는 한판 대결은 전국 245개 선거구 중 ‘5대 박빙 승부처’로 기록될 정도로 개표 막판까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의 텃밭에서 DJ의 아들이 고배를 마셨다는 점에서 18대 총선 최대 이변 선거구 중 한 곳으로 꼽히고 있다.
방송사 예측 여론조사에서조차 1, 2위권에 포함되지 않았던 무소속 이윤석 후보의 ‘신승’은 그야말로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민주당 후보와 DJ 아들을 따돌리고 금배지를 거머쥔 이 당선자. 그가 ‘무안 토박이’라는 점에서 “소지역주의에 편승한 승리”라는 비판적인 평가도 없지 않지만 DJ와 동교동계 등으로 대표되는 ‘세습·가신정치’를 종식시켰다는 점에서 그 정치적 의미는 남다르게 평가되고 있다.
“돈도 없고 특정 정파처럼 지지를 받는 것도 아니고 유명 인사가 와서 선거운동을 해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실제 일할 사람, 강한 추진력과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을 지역 유권자들께서 찾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민주당 텃밭인 전남에서 무소속 신화를 일궈낸 이윤석 당선자가 밝힌 소감이다. 전남도의장 출신인 그는 특정 정파의 조직력도, 정치 거물의 후광도 입지 않은 채 승리를 이끌어낸 주인공이 됐다. 그가 출마한 무안·신안은 통합민주당 황호순 후보에 맞서 DJ 아들 김홍업 후보가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광주·전남의 최대 격전지이자 전국적 관심이 모아졌던 곳이다. 특히 호남에서 DJ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당선자는 선거 초반부터 막판까지 당선권과는 무관하게 여겨졌다. 게다가 우여곡절 끝에 꼬리표처럼 달게 된 과거 전력(특가법상 뇌물 혐의로 집행유예 판결)도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 누구도 그가 당선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민주당 후보냐’ ‘DJ 아들이냐’가 주요 관전 포인트였을 뿐, 그는 경쟁 대상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듯했다. 그러나 선거 후 개표 뚜껑을 여는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선거기간 내내 3위권으로 처져 있었고 예측조사에서조차 거론되지 않았던 그가 불과 개표 한 시간여 만에 ‘당선유력’ 후보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이 당선자는 “이번 선거 결과는 깃발만 꽂으면 당선되던 과거의 ‘묻지마 선거’와 특정인이 지원한다고 해서 당선됐던 잘못된 관행을 버리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고 자평하면서 “지역민들은 이제 당과 특정인 지지가 아닌 오직 일 잘하고 능력이 검증된 사람이 누구냐에 한 표를 행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지난 보궐선거에서 압도적으로 김홍업 의원을 당선시켜 준 것은 지역을 대변해서 낙후되고 살기 어려운 무안·신안을 위해서 정말 열심히 일해 줄 것을 지역민들이 원했기 때문이고, 아버지의 후광에다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현역 국회의원들이 지역을 방문해서 열심히 뛰어줬기 때문”이라고 전제한 뒤 “하지만 당선된 이후 지역과 국민의 대표라는 명함이 무색할 정도로 무관심으로 일관해 지역민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당선된 후 11개월 동안 과연 (김 후보가) 이 지역을 위해서 한 일이 무엇인지를 반문해 본다면 안타까운 심정”이라며 “무안국제공항 개항 당일에 많은 기관장과 주민들이 참석해서 지역발전의 초석을 다지는 큰 행사를 축하하고 있을 때 이 지역 출신 현역 의원의 불참으로 많은 원성을 듣게 됐고, 타르 피해 어민들이 서울역과 여의도 등지에서 생존권을 보장하라고 절규하고 있을 때 나타나지도 않았다”고 지적했다.
‘DJ 아들이라는 막강한 후광을 입은 김 후보를 물리친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이번 선거는 누가 과연 지역을 위해서 일할 참 일꾼인가를 현명한 유권자들이 판단한 결과라고 생각된다”고 답했다.
이 당선자는 무안에서 태어나 경남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와 국회의원 보좌관을 시작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전남도의원을 세 번 역임한 뒤 제7대 전남도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주장처럼 중앙정치가 아닌 지방정치에 잔뼈가 굵은 토박이 일꾼인 셈이다.
이 당선자의 승리는 민주당 후보와 DJ 아들을 눌렀다는 점에서 텃밭에 기댄 안일한 정치·세습 정치에 대해 유권자들이 냉정한 심판을 내렸다는 데 남다른 의미가 있다는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 당선자의 승리에 대해 ‘소지역주의의 수혜자’라는 비판적인 시각을 보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당선자는 5만 2000여 명의 유권자를 가진 무안 출신이고, 김 후보와 황 후보는 그보다 2만여 명 이상이 적은 3만 9000여 명의 유권자가 있는 신안 출신이기 때문이다. 신안의 유권자 수가 턱없이 적은 데다가 김 후보와 황 후보 둘 다 신안 출신이다 보니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는 게임이었다는 분석에 힘이 실리고 있다. 김 후보가 비록 DJ의 막강한 후광을 입었지만 소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투표 당일 비를 동반한 강풍이 불어 섬 지역으로 구성된 신안의 투표율(57%)이 무안의 투표율(58%)보다 낮았던 것도 이 당선자가 간발의 차이로 승리하게 된 요인 중 하나로 분석되고 있다.
이와 함께 민주당이 합당과 공천 잡음 등으로 내홍을 겪고 있을 때 이 당선자가 바닥 표심 다지기에 전력투구했던 점도 승리의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처럼 이 당선자의 ‘이변’을 둘러싼 다양한 평가가 제기되고 있지만 그의 승리는 그 자체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만하다는 게 지역 정가의 중론이다. 커다란 정치적 흐름으로 볼 때 그가 세습정치를 종식시키고 ‘호남=민주당 텃밭’이라는 안일한 공식을 깨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전남=김미화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