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위기설’ 속에서 그가 안 보인다
▲ 말을 아끼던 박병원 경제수석은 뒤늦게나마 라디오 프로에 공개 출연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9월 위기설을 겪으면서 이제서야 소통의 중요성을 체험한 듯하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실제로 ‘9월 위기설’로 원화가치와 주식 채권 값이 동시에 떨어지는 ‘트리플 약세’가 발생, 금융시장이 초토화됐던 지난 1일. 박 수석의 예전 성격을 아는 기자들로선 당장 그가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상주하고 있는 춘추관에 달려와 9월 위기설의 허상을 단번에 날려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날 그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그나마 박 수석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금융시장이 다소 안정을 찾은 지난 4일, 그것도 라디오를 통해서였다.
박병원 청와대 경제수석은 지난 4일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저희들이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 9월 위기설이라는 게 근거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박 수석은 “우리는 1997년 말에 겪었던 외환위기 같은, 대외채무 지급불능 상태에 빠지고 IMF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하는 그런 상황에 ‘위기’라는 단어를 쓴다면 그 가능성은 0%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박 수석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경제라는 게 사람들의 생각이 한쪽 방향으로 쏠리면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는 속성도 일부 가지고 있다”면서 “주가가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고 모두 주식을 내다팔면 주가는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느냐. 환율도 마찬가지”라고 강변했다. 그는 “우리 국민들이 그런 위기설에 흔들려서 그렇게 행동을 하면 그 위기설을 현실화시켜주는 데 동조하는 꼴이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위기설이 도가 지나치면 실제 위기가 되는 것을 이처럼 잘 아는 박 수석이 왜 진작 나서서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기 않았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9월 위기설에 직격탄을 맞은 금융시장은 일단 진정되는 듯하지만 뒤늦은 박 수석의 발언은 ‘김빠진 맥주’처럼 타이밍을 놓쳐버린 셈이 됐다. 다들 예상했던 9월 위기설에 대한 청와대와 정부의 느긋한(?) 대처로 인해 ‘추석민심’을 잡겠다던 청와대의 계획은 사실상 물거품이 됐다.
베이징올림픽을 전후로 이명박 대통령은 민심을 잡기 위해 오찬과 만찬을 통해 각계각층을 청와대로 초청, 스킨십을 가졌다. 지난달 말에는 이 대통령이 부처 차관급 공무원 50여 명과 함께 직접 청계천 광장을 시작으로 청계천 산책로를 걸으며 대화도 가졌다. 정부도 이에 발맞춰 부동산 정책, 추석민생 대책, 생활공감 정책 등을 연이어 발표하며 거들었다.
이 같은 노력과 함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에 따른 촛불집회가 마무리되고 때마침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선수단이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두면서 이 대통령의 지지율도 본격 반등하기 시작해 일부 여론조사에선 30%선을 넘기도 했다. 청와대 입장에선 추석민심을 잡아 안정적인 국정운용이 가능한 40%선까지 지지율을 높이겠다고 욕심낼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9월 위기설로 촉발된 금융시장 불안으로 인해 추석민심을 잡겠다는 이 같은 노력이 사실상 허사가 된 것은 물론, 오히려 추석민심이 악화되지나 않을지 걱정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1가구 1펀드 시대로 전 국민이 직·간접적으로 주식시장과 연관돼 있어 최근 주가 급락에 추석이 반갑지 않은 사람이 많을 것”이라며 “폭락장은 대외 요인도 있지만 환율정책 실패에 따른 내부요인도 적잖게 작용, 다른 때와 달리 정부를 원망하는 투자자들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이 대통령이 지난해 대선 직전 ‘2008년 중 주가지수 3000포인트를 돌파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고 임기 5년 안에 5000포인트까지 가는 게 정상일 것’이라고 말한 것을 곱씹는 투자자들도 많다”고 덧붙였다.
어찌 보면 국가경제를 위해, 대통령을 위해, 자기 자신을 위해 박 수석이 가장 먼저 몸을 던져야 할 상황이었던 셈이다. 한데 재경부 시절 ‘낭만을 아는 천재’로 불리며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던 박 수석이 왜 그렇게 몸을 사렸던 걸까. 그것도 금융시장은 심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 정작 그의 한마디에 목 말라할 때 장막 뒤에 숨어 있었던 이유가 뭘까.
박 수석은 과거 재경부를 출입해 안면이 있는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조차 ‘팩트’만 확인해 줄 뿐 말을 아낀다고 한다. 이는 ‘청와대 비서관은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는 그의 지론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실제로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청와대 여민관(비서동)이 아직 개방되지 않는 관계로 비서관들과 점심 또는 저녁을 통해 스킨십을 가지며 취재활동을 하지만 박 수석과 밥을 먹어봤다는 기자들은 손에 꼽을 정도다. 평소에는 전화 통화조차 하늘의 별따기다.
▲ 지난달 28일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과 박병원 경제수석(맨 왼쪽). | ||
추석을 맞으며 박 수석이 또 하나 넘어야 할 산이 바로 이 대통령과의 ‘정책 코드’ 맞추기다. 특히 부동산 정책과 관련, 대표적인 ‘신도시를 통한 주택 공급론자’인 박 수석은 최근 이 대통령과 엇박자를 내고 있다. 박 수석은 노무현 정부 시절 재경부 차관으로 있으면서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고 공급확대를 통해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는 당시 세제 강화를 골자로 한 수요억제 중심의 부동산 대책에 줄기차게 반대하면서 청와대 내 386세력과 계속 부딪쳤다. 이 때문에 지난 2005년 다주택자 보유자의 양도소득세 강화와 고가 부동산에 대한 종합부동산세 강화를 골자로 한 ‘8·31 부동산대책’을 마련할 당시 그는 정책 수립 라인에서 배제되기도 했다.
하지만 박 수석의 ‘공급론’에 대한 의지는 꺾이지 않은 듯하다. 그가 청와대에 입성한 지 얼마 안 돼 정부는 인천 검단신도시와 오산 세교지구를 대폭 늘려 사실상 신도시를 추가 건설하기로 발표했다. 최근 지방을 중심으로 미분양이 속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신도시를 짓는 것은 민간 건설업체의 주택 공급이 줄어 2∼3년 후 주택시장이 크게 불안해질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던 중 지난 2일 이 대통령이 별안간 재건축·재개발을 들고 나왔다. 이 대통령은 당시 과천 정부청사에서 주재한 국무회의 모두발언을 통해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는 건설경기 활성화가 중요한데 신도시만 발표한다는 일부 비판도 있다”면서 “건축경기가 서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재건축·재개발의 활성화를 통해 일자리 늘리기에 속도를 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은 그동안 논란이 돼 온 재개발·재건축에 대한 규제완화를 시사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어 강남권을 중심으로 한 재건축·재개발 시장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이는 신도시를 통해 신규 주택공급을 늘리고, 재건축·재개발은 부동산 투기 바람이 불 수 있어 최대한 억제해야 한다는 박 수석의 지론과 맞부딪친다.
청와대 경제팀의 한 관계자는 “도심 재개발·재건축을 통해 공급을 확대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지금 규제를 완화하면 10평대 아파트가 10억 원을 호가할 수 있어 미루는 것”이라면서 “따라서 새로운 택지개발과 주택공급이 불가피하다”고 밝힌 바 있다. 박 수석 역시 최근 라디오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면 재건축·재개발에 대한 규제가 대폭 완화되면 재건축·재개발 부분은 언제라도 다시 투기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면서 “완전히 투기 가능성이 제거됐다는 확신이 설 때까지는 규제완화는 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 지난 7월 수석비서관 회의장에서의 박 수석 모습. | ||
이 대통령은 신도시의 대안으로 도심 재건축·재개발을 꾸준히 강조해 왔다. 이 대통령은 지난 3월 국토해양부 업무보고에서 “도심에 집을 지어서 공동화되지 않도록 하고 거기서 출퇴근을 하면 경제적 효과도 있다”면서 “재건축을 하면 복잡한 면도 있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또 “필요한 곳에는 물량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기존의 도시를 극대화시키는 것부터 하면서 신도시를 만드는 식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같은 이 대통령의 재건축·재개발 발언에 한나라당 임태희 정책위의장도 거들고 나섰다. 임 의장은 지난 4일 불교방송 라디오에 출연해 “수급 요인에 의해 주택 가격 상승 여지가 많은데 근본적인 해결방법은 도심지 재개발 혹은 주변 택지 공급을 통해 주택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이라며 “수도권에 주택을 안정적으로 공급해야 하는 측면에서 재개발·재건축의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부동산 정책에 대한 소신으로 인해 적잖은 굴곡을 겪었던 박 수석이 이번에도 소신을 밀고 갈지 아니면 타협할지 두고 볼 일이다.
박 수석은 ‘소통과 코드’ 이외에도 가야 할 길이 멀다. 박 수석의 취임 일성은 “대외적으로 경제여건이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기에 경제수석을 맡아 어깨가 무겁다”면서도 “그러나 제가 32년 동안 거시경제와 정책조정을 담당했는데 이보다 더 어려운 일도 많았다. 우리 경제와 국민의 저력을 믿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박 수석은 이 같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불황에 허덕이고 있는 국민에게 뭔가 보여줘야 할 입장이다.
그러나 이는 쉽지 않아 보인다. 올해는 물론 내년 상반기까지 경기 불황이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도 얼마 전 야후닷컴과의 인터뷰에서 “내년 연말경이면 경제가 회복될 것으로 보이는 만큼 국민들도 1년 정도는 힘들지만 함께 잘 견뎌나가자”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기업들에게도 “규제완화를 무작정 기다리지 말고 기업은 1년 반 또는 2년 후를 대비해서 선행투자를 하면 시기적으로 맞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때문에 당분간 박 수석은 ‘경제를 살리라’는 여론의 화살을 맞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박 수석 역시 최근 인터뷰에서 “새 정부의 경제정책의 핵심은 감세를 통한 내수회복, 그 다음에 또 규제개혁을 통한 투자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이라며 “이런 것들은 법이 고쳐지고 또 추가경정예산 안이 통과되고 해야 다 실천에 옮겨지는 것으로 아직 실천에 옮겨지지도 못했고 또 실천에 옮겨지더라도 효과가 나타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
전용기 파이낸셜뉴스 기자 courage@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