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지킴이’서 ‘경기 도우미’로 일단 환승
▲ 이성태 총재는 정치권 외압에도 ‘노’를 외쳐 온 원칙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 ||
이성태 총재는 한국은행(한은)에서만 40년을 보낸 전형적인 ‘한은맨’이다. 1945년생 경남 통영 출신으로 지난 1968년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자마자 한은에 입행, 홍보·기획부장, 조사국장,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 위원, 부총재에 이르기까지 요직을 두루 거쳐 지난 2006년 4월 제23대 한은 총재직에 올랐다.
이 총재는 잘 알려졌다시피 부산상고 출신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교 2년 선배다. 이 총재는 한은 고위직에 오르기 전부터 부상상고 동문들 사이에선 유명 인사였다. 가난 때문에 장학금을 받고 부산상고를 다니면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과외를 했으나 전교 1등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1964년 서울대 상과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했을 정도로 지역사회에서 이름난 천재였다.
이 총재는 주변에서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모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석에서 “내가 노무현 대통령을 몰랐을 때도 노 대통령은 나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 자주 말했다고 한다. 서울대 상대 수석입학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모교에 무려 8개월 동안 걸려 있었다고 하니 노 전 대통령 관련 언급도 결코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이 총재에겐 늘 ‘노무현 정권 사람’ ‘부산상고 인맥’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이명박 정권이 출범하면서 노 정권 때 임명된 정부 산하 단체장들이 줄줄이 물러난 점이나 ‘MB노믹스’ 대변자로 불린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과 사사건건 대립해온 점은 그를 더욱 더 ‘노 정권 사람’으로 비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총재가 지난 정권 때 임명된 인사라는 점 외엔 그를 ‘친노’로 규정할 만한 정황은 그다지 많지 않다. 한은 내에서 이 총재는 소문난 원칙주의자다. 같은 학교 출신이라 해서 우대해 주는 법은 절대 없었다고 한다. 동문들이 이 총재에게 같은 동문을 키워달라고 하면 “글쎄…”라며 고개를 돌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동문회에 나가도 한은 정책과 관련된 질문에는 절대 답하는 일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 총재는 노무현 정권 당시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에도 망설임 없는 모습을 보였다. 2003년 6월 19일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법안심사 소위원회에서 이 총재(당시 부총재)는 ‘정부가 한은의 통화정책 결정에 외압을 행사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해 회의장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덕분에 재경부 당국자들은 한은의 통화정책 결정에 외압은 없었다는 해명성 발언을 하기에 바빠야 했다.
2006년 9월, 정부는 자본시장통합법(자통법) 초안을 마련하고 증권사의 지급·결제 기능 허용 추진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 이 총재는 “다른 나라에서 증권사 고객예탁금에 결제기능이 없어 자본시장 발전에 지장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며 정부의 입법 취지를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2006년 부동산 대란 당시 이 총재는 금리인상을 단행했다가 경기위축의 원흉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해 10월 23일 국회 재경위원들로부터 “아예 경기를 죽일 셈이냐”고 집중공격을 받은 이 총재는 “단기적인 경기부양에 나설 생각 말고 양극화 문제 등 성장잠재력을 갉아먹는 구조적인 문제부터 해결하라”는 입장으로 맞섰다.
이 총재는 정부와 정치권뿐만 아니라 한은 내에서도 철저한 원칙주의를 고수했다. 1990년대 초 정부가 증시 부양을 위해 한은이 투신사에 특별 융자를 지원토록 했을 때 당시 자금부 부부장이었던 이 총재는 지시가 부당하다며 끝내 서명을 거부했다. 결국 부부장 서명 없이 자금이 지원됐다고 한다.
관료조직인 한은 내에서 ‘예스’ 대신 ‘노’를 자주 외쳐온 성향 탓인지 승진속도가 그다지 빠른 편은 아니었다. 한은 인사들 사이에선 이 총재가 1996년 3월 홍보부장에서 관리부장으로 좌천됐던 일이 곧잘 회자되곤 한다. 1995년 5월 홍보부장에 오른 지 열 달도 지나지 않아 핵심보직에서 밀려난 배경이 상사들에게조차 지나치게 꼿꼿한 성격 때문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총재와 수시로 접하는 주요 포스트를 일 년도 채우지 못한 그를 두고 당시 “물먹었다”는 뒷이야기가 나돈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 2006년 한은 사령탑에 입성한 이성태 총재.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산상고 2년 선배다. | ||
그러나 1997년 이전까지 한은은 정치외풍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조직이었다. 지난 1997년 한은과 재경부가 한은법 개정과 금융감독체제 개편을 놓고 맞서던 때, 이 총재는 한은 기획부장으로서 관련업무의 실무 책임자였다. 재경부가 은행감독원을 한은에서 분리해 금융감독원을 만드는 것을 뼈대로 한 개편안을 만들자 그는 “정부안은 중앙은행의 존재 필요성 자체를 부인하고 있어 좌시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을 낭독해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중앙은행(한은)은 물가안정을 위해 통화량을 조절하는 곳”이라는 것은 평소 이 총재의 지론이다. 한은의 설립 목적에 입각해 외풍에 대해 항상 날을 세워온 것이다.
이 총재가 한은의 독립성을 주장하고 이를 실천에 옮겨온 배경엔 전임 총재들에 비해 정치적 운이 좋았던 점도 있다. 지난 1997년 이전까지 한은 총재들은 임기를 못 채우고 물러나기 일쑤였다. 조순(1992년 3월~1993년 3월) 김명호(1993년 3월~1995년 8월) 이경식(1995년 8월~1998년 3월) 등 전임 총재들이 대통령과 뜻이 안 맞거나 외압에 따른 입지 위축, 법 개정 등의 이유로 4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했다.
1997년까지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금통위 의장은 재경원 장관 몫이었으며 한은은 통화정책 집행부처였다. 그런데 1997년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 직후 한은법 개정안이 통과돼 금통위 의장이 한은 총재로 바뀌게 됐다. 실제로 1997년 이후에 한은 수장이 된 전철환 박승 총재 등은 모두 4년 임기를 채우게 됐다.
한은의 독립성을 강하게 주장해온 이성태 총재의 행보는 고성장을 공약으로 내건 새 정부의 눈에 곱게 비치지 않았다. 이명박 후보의 당선 직후 구성된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한은은 정부정책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는 발언이 터져 나왔다. 경제성장을 위해 어떻게든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의지였다. 동시에 통화권을 쥐고 있는 한은에게 보내는 경기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압력성 주문이기도 했다.
이 총재의 선택은 수긍이 아닌 반격이었다. 1월 10일 정기 금통위 회의 직후 기자회견에서 이 총재는 “새 정부 경제정책이 한은과 상충하지 않는다”며 아예 대놓고 날을 세웠다. 국가경제를 위해 중앙은행은 물가안정을 맡고 있기 때문에 새 정부가 들어선다 해서 한은의 자세나 사명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 못 박은 것이다. 특히 그는 새 정부가 고성장과 더불어 물가안정을 함께 주장하고 나선 것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 시각을 가진 것으로 전해진다. ‘경기를 자극하려면 금리를 내려야 하고 물가를 잡기 위해선 금리를 올려야 한다’는 경제이론을 새 정부와 한은이 정반대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었던 셈이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을 필두로 한 새 정부 경제팀은 수출이익 극대화를 위한 고환율 정책을 주장하며 경기촉진을 위한 금리인하를 주장했지만 이 총재는 물가안정을 우선시하며 금리동결 입장을 고수했다. 결과적으로 환율급등에 이은 물가대란이 일어나면서 힘을 얻은(?) 이 총재는 지난 8월 금리인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최근 들어 한은의 통화정책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지난 10월 9일 기준금리를 5.25%에서 5%로 인하한 데 이어 이 총재가 최근 추가 금리인하를 시사하는 발언을 한 것이다. 이 총재는 지난 10월 23일 국회 재정기획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내년도 경제성장률을 3%대로 보고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 총재가 3%대를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성장률 침체에 따른 경기 위축을 우려하는 듯한 이 총재의 이날 발언은 추가 금리인하 조치로 이어질 것이란 관측을 낳았다. 이날 이 총재는 “물가상승 압력이 환율 부문에서 발견되지만 국내 경기가 내년 상반기까지 안 좋을 것으로 보이고 유가와 원자재 가격이 많이 떨어져 이를 고려해 통화정책을 운용하겠다”고 밝혔다.
두 달 전만 해도 금리인상을 밀어붙인 이 총재가 통화정책 수정을 언급하게 된 배경으로 경제위기 책임론의 화살이 점차 한은에게도 옮겨오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그동안 환율상승과 물가대란의 주범으로 여론의 비난이 강만수 장관에 쏠려 퇴진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가 장기화되면서 한은이 늑장 대응으로 일관한다는 비판론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정부는 한은이 유동성 공급에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관계부처 장관들이 모인 회의 자리에서 이 총재는 “사고는 누가 치고 왜 우리가 뒤치다꺼리를 하느냐”고 화를 버럭 냈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 8월의 금리인상이 물가수습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대신 주택담보대출 금리만 끌어올렸다는 비판론에 봉착했다. 유수의 기업들이 유동성 위기에 놓이면서 한은이 진작 유동성 공급에 나섰어야 했다는 지적이 은행권 등에서 제기된 것이다. 강만수 장관과의 알력으로 정부에 독립적인 한은만을 고수하다보니 ‘통화대란’ 위기를 초래했다는 지적이다. 재계와 금융권 인사들은 “그동안 경제위기 주범은 주저 없이 강만수 장관으로 꼽혀왔지만 시장에서 현금 유동성에 대한 위기의식이 커지면 커질수록 통화정책을 주관하는 이성태 총재에 대한 시선이 점점 날카로워질 것”이라 입을 모은다.
이성태 총재는 10월 23일 국정감사장에서 추가 금리인하를 시사하면서 “현재는 1997년 환란 이후 가장 어려운 시기”라 밝혔다. 통화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이성태 총재가 곧 어떤 패를 꺼내들지, 그리고 경기부양과 물가안정이란 ‘양날의 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시선이 쏠리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