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이 4일 여의도 당사에서 <일요신문>과 인터뷰에서 당 내외 현안에 대한 입장을 말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하지만 지난 9월 홍준표 원내대표가 추경 예산안의 한나라당 단독 처리 강행 실패로 리더십에 상처를 입으면서 박 대표의 존재감이 다시 부각됐다. 또한 이명박 대통령이 2주마다 당·청 정례회동을 하는 등 박 대표에게 힘을 실어준 것도 그의 정치적 위상을 높여주고 있다. 그러나 경제위기와 종부세 논란,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등 여당의 앞길에는 넘어야 할 고개들이 산적해 있다. 특히 수도권 규제 완화 조치를 둘러싼 당 안팎의 첨예한 갈등은 시급히 꺼야 할 발등의 불로 다가와 있다. <일요신문>은 박 대표를 지난 11월 4일 당사에서 만나 최근의 현안에 관한 그의 입장을 직접 들어봤다.
“아까 보니 뒤에 기자들이 앉아 있었던 것 같던데…. 뭣 때문에 기자들 오라고 했나. 또 무슨 얘기 쓰려고….”
박희태 대표는 대표실에 들어서자마자 비서진에게 따지듯 물었다. <일요신문>과의 인터뷰 전 한 행사에서 기자들이 있는지도 모르고 조금 민감한 사안을 얘기했던 것이 내내 걸렸던 모양이었다.
“기자들이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인터뷰를 시작도 하기 전에 박 대표가 기자들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터라 넌지시 물었다.
“최근에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달러 모으기 운동을 제안했다가 혼이 난 뒤로 정말 말조심해야 되겠더라.”
사실 박 대표는 취임 초반, 박근혜 전 대표의 대북특사론이나 어청수 경찰청장 사퇴론 등을 ‘주장’하다가 청와대에 앞서 나갔다는 당·청 갈등 논란에 휩싸인 뒤부터 더욱 몸을 움츠리고 있다. 박 대표가 사소한 일에도 언론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 싶었다. 하지만 당 일각에선 여전히 “대표가 좀 소신 행보를 했으면 좋겠다. 너무 청와대 눈치만 봐 위축되는 것이 당·청 관계의 올바른 모습은 아니지 않느냐”라는 의견도 많다.
이번 인터뷰가 이뤄진 것도 정부가 수도권 규제 완화 조치 계획을 발표한 뒤 당내에서 찬반 논란이 뜨겁게 일고 있을 때였다. 수도권 규제 완화(박 대표는 간혹 ‘규제 합리화’라고 호칭할 때도 있었다) 조치는 수도권에 주로 포진한 친이(친 이명박 대통령)그룹과 영남권이 기반인 친박(친 박근혜 전 대표)그룹 간 세 대결 양상으로 비화되면서 연말 박 대표가 돌파해야 할 난제 중의 난제로 꼽힌다. 먼저 이에 대한 입장부터 들어봤다.
─지난 11월 3일 청와대에서 당·청 정례회동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논의된 핵심 사안은 무엇인가.
▲수도권 규제 완화 조치와 관련해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때까지는 지방발전에 관한 여러 대책을 많이 내놓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수도권 규제 합리화를 통해서 수도권을 발전시키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이달 27일경 지방발전 종합대책을 내놓겠다고 했다. 이 대통령은 여러 가지 예를 들면서 지방발전 대책을 취하지 않고 수도권 합리화 조치를 내놓은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날 회동에서 사실은 내가 얘기를 많이 했다. 특히 정부가 수도권 규제 합리화 조치를 취했는데 지금 지방에서는 ‘지방발전 대책부터 내놓고 그 다음에 수도권 규제 완화를 추진해야 하는데 순서가 잘못된 것 아니냐’는 여론이 많다고 대통령에게 전했다.
─그래도 이번 조치는 너무 수도권 위주라는 반발이 많은데.
▲수도권도 발전하고 지방도 발전해야 한다. 흔한 말로 ‘윈윈’ 해야 하는데…. 이 대통령은 ‘수도권에 공장을 지을 때 거기다 조금만 더 증축을 하면 되는데 그걸 못하고 지방으로 가서 새로 지으면 경제적 손실이 크다’고 했다. 앞으로는 수도권의 규제 합리화를 통해서 생기는 이득은 그것을 모두 지방에 모두 재투자하는 형식을 취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번 수도권 규제 완화 조치 파문으로 당내 친이-친박 간 갈등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이번 사안과 관련한 계파 간 갈등은 없다. 있을 수도 없다. 어떤 계파를 어떻게 나누는지 모르겠지만 지역에 따른 의원들 간의 견해차는 있을 수 있지만 계파 간 갈등은 있을 수 없다.
─박근혜 전 대표가 이번 사안과 관련해 “선후가 잘못된 것”이라며 이례적으로 비판했는데.
▲그것은 박 전 대표가 얘기해서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그런 의견이 당내에 많아 나도 그런 의견을 전하러 청와대에 갔다.
▲(총론을 모을 수 있게) 그렇게 되겠지. 이런 문제는 지방 출신 의원 입장에서는 당연히 얘기해야 하는 것이다. 서로 상반된 의견들이 있지만 결국은 조율이 되지 않겠나.
경남 남해 출신인 박 대표는 인터뷰 며칠 뒤 “지방의 소망을 들어보기 위해 내주 초 전국 시도지사와 우리 당과의 간담회를 개최하겠다”, “지방에 ‘금융중심도시’를 두자”는 등의 추가 대책을 내놓는 등 수도권 규제 완화와 관련한 파문 진화에 온힘을 쏟고 있다. 이번 사안으로 자칫 당이 완전히 사분오열될 경우 자신의 리더십에도 심각한 타격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 대표의 이런 ‘중재안’이 얼마나 실효를 거둘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번 수도권 규제 완화 논란은 수도권과 지방 의원들 간의 정치적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에 양측 간의 타협안이 나오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박 대표의 고민도 깊어가고 있다.
질문은 다시 국정 현안으로 이어졌다.
─연말 개각설이 청와대 시스템 개편 등과 맞물려 계속 나오고 있는데.
▲모르겠다. 어제 이 대통령은 아무 소리 안 하더라. 그래도 다들 열심히 노력해서 미국과 통화 스와프를 체결해 외환시장도 좀 안정시켰다. 이것이 매우 획기적이기 때문에 개각 소리가 나오지도 않더라. 특별한 일도 안 생겼는데 무슨 개각이냐는 게 이 대통령 입장이다.
─최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건강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 따로 보고받는 라인이 있나.
▲나도 신문 보고 아는 것뿐이다. 전혀 정보보고를 받지 않는다. 국회 정보위도 아는 게 없더라.
─북한의 돌발 상황 발생 등 위기관리 차원에서 여당 대표로서 보고받을 필요성 느끼지 못하나.
▲아는 게 좋겠지만 알 길도 없고…. 워낙 북한이 철의 장막이라 어떻게 돌아가는지(휴~한숨).
─미국에 흑인 최초 대통령 당선이 유력한데 오바마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나(인터뷰는 개표 전인 11월 4일).
▲모른다. 다 그렇지 않나. 들어봐야 다들 언론을 통한 종합적 지식이지 개인적, 독자적 정보는 없다.
─당 차원에서 외교 채널 개설 등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문제는 오바마를 아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전혀 없다는 것이다. 누가 좀 안다는 걸 어제 듣긴 들었는데…. 매케인은 좀 인맥이 있는데.
국정 현안에 이어 말머리를 당내 현안으로 돌려보았다. 아무래도 가장 핵심 사안은 친이그룹과 친박그룹의 긴장관계 해소 여부였다.
─최근 당내에서 ‘월박’(박근혜 전 대표에게 넘어간 의원), ‘복박’(다시 박 전 대표에게로 돌아온 의원)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얘기했는데.
▲의원들이야 친소 관계에 따라 결집하는 것은 있지만 조직적으로 모여서 논의하는 것은 없다고 본다. 정치하는데 친소 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말과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
─최근 박 대표가 중심이 돼 재·보궐 선거를 선방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표가 선거 유세 지원 요청을 거절했다고 했는데 서운하지 않았나.
▲다 지난 이야기인데 얘기하고 싶지 않다. 다 잊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최근 “지금은 비상시국”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했을 때 현재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여권 내부의 단합도 매우 중요하고, 이런 점에서 박근혜 전 대표가 대승적 차원에서 이 대통령에게 협조할 것은 협조해서 계파 갈등을 줄여야 경제위기를 보다 효율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박 전 대표 본인도 당을 이끌어봤고 정치 경험도 많다. 앞으로 본인이 역할을 할 게 있으면 스스로 잘 알아서 할 것으로 본다.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판단해서 슬기롭게 처신할 것으로 믿는다.
▲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가 3일 이명박 대통령과 오찬을 겸한 정례회동에서 환담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실제 들어왔는지 아직 보고 받지 못했다. 당 재정 결재권이 없다. 납부했던가(웃음). ‘대통령에게 너무 과한 부담을 드려 미안하다’고 말했다. 너무 많지 않느냐는 말도 있었지만 당에서 논의해 건의한 사안이다.
─박 대표는 당비를 얼마나 내나.
▲비밀이다. 모르겠다.
─이 대통령 다음으로 많이 내야 하는 것 아닌가?
(박 대표는 곤란한 질문에 대해서는 못 들은 척 눙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이재오 전 최고위원의 복귀가 당내에 자주 거론되고 있는데.
▲‘오고 안 오고’는 본인 의사에 달려 있다. 누가 ‘오라, 오지 마라’ 할 수 있겠나.
박 대표는 여권 내에서 얼마 되지 않는 여당 경험자다. 그는 노태우 정권 때 이미 여당의 대변인을 지냈고 원내총무 등을 거쳐 김영삼 정권 때는 법무부 장관직에도 오른 경험이 있다. 그에게 당시 여당과 현재 여당과의 차이점에 대해 물었는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때와 지금은 너무 다르다. 지금 여당의 힘과 권한이 그때에 비해 많이 못한 것 같다. 지금의 여당은 힘이 약해 보인다.”
─왜 그렇다고 보나.
▲돈이 없어서 그렇다. 여당이 힘을 못 쓰게 조직을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지구당도 없애고. 원내와 원외의 이원체제로 만들고. 서로 갈라놨다. 기동성 있게 당이 강력한 힘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박 대표는 현재의 여당 시스템에 문제가 많다고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이에 대해 “사실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만들었던 열린우리당 시스템을 한나라당이 너무 있는 그대로 모방한 측면이 있다. 당이 스스로 힘을 쓰고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고 남한테 우리의 운명을 맡겨버렸다. 대표적인 게 공천 문제다. ‘중립 공천’ 한다고 외부인사 데려다가 공천위원장과 위원의 절반을 맡겼다. 당 생활을 해보지도 못한 사람들을 데려와서 어쩌자는 것인가. 당의 각종 위원회도 외부 사람들이 너무 많다. 정치 현안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선거도 치러보지 못한 사람들이 당에 들어와 너무 좌지우지하다보니 당의 자율 기능이 많이 떨어졌다. 당의 자결권이 없다는 것이다. 당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결정적 포션을 차지해선 안 된다”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앞으로 당 개편에 적극 나설 것인가”라는 질문에 “문제가 있으니까 언젠가는 공론화를 꼭 할 것이고 장기적으로 검토해볼 생각”이라며 당 개편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보였다.
박 대표의 이런 당 개편 의지는 듣기에 따라 친박 진영을 자극할 수도 있다. 특히 지난 2005년 당시 홍준표 혁신위원장이 만든 ‘당 공천 개혁안’은 박근혜 전 대표의 대표적 치적으로도 꼽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박 대표가 지적한 공천 문제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임기 2년의 박 대표가 현재의 공천 시스템을 개편할 경우 2010년 지방선거,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친박 진영의 필연적인 저항을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 지난 4·9 총선 공천 과정에서 외부인사가 공천위원이 됐지만 여전히 친박 진영에 불리한 공천이었다는 게 중론이었다. 그런데 박 대표가 비판했던 외부인사가 완전히 배제된 공천위원회가 구성될 경우 당내 주류인 친이그룹이 더욱 공천권을 좌지우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그의 당 개편 의지가 향후 친이-친박 간에 또 다른 한랭전선을 형성할 먹구름으로 작용할 개연성도 커 보인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