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마술 풀린 ‘신데렐라맨’
▲ 지난 4월 21일 공금을 빼돌려 비자금을 조성한혐의로 구속된 정상문 전 비서관.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실제로 정 전 비서관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노 전 대통령 측에 건넨 600만 달러 돈 거래에 깊숙이 개입한 의혹을 받고 있는 데다 국가예산인 대통령 특수활동비 12억 5000만 원을 횡령한 혐의도 받고 있다. 정 전 비서관이 600만 달러 돈 거래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고, 그의 횡령 사실을 노 전 대통령이 인지하고 있었는지 여부는 사법처리 위기에 처한 노 전 대통령의 명운을 가르는 중요한 변수가 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오랜 친구이자 최측근으로 참여정부 안살림을 맡아왔던 정 전 비서관. 과연 그는 끝까지 ‘주군’을 보호하는 길을 선택할까, 아니면 ‘노무현 게이트’의 판도라 상자를 여는 장본인이 될까.정 전 비서관은 ‘노무현의 집사’로 불릴 정도로 노 전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한 사람이다. 7급 지방직 공무원을 시작으로 서울시 감사담당관을 지낸 정 전 비서관이 2003년 11월 참여정부 초대 총무비서관이었던 최도술 씨 후임으로 청와대 비서관에 발탁된 배경에는 노 전 대통령과의 특별한 인연이 자리 잡고 있다. 정 전 비서관의 청와대행을 놓고 당시 일부 친노 측근들이 반대 의견을 개진했음에도 노 전 대통령은 정 전 비서관에게 청와대 안살림을 맡기는 데 주저함이 없었을 정도로 그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각별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남다른 인연은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 초반 고향인 경남 김해의 불모산 암자인 ‘장유암’에서 사법시험 준비생으로 동고동락하면서 두 사람은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은 1975년 사시에 합격했지만 정 전 비서관은 사시에 낙방한 뒤 지방직 7급 공무원으로 공직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장유암에서 맺은 인연을 바탕으로 끈끈한 우정을 이어갔다.사석에서는 서로 말을 놓을 정도라고 한다.노 전 대통령이 2003년 불법 대선자금 사건에 연루돼 자리에서 물러난 최도술 씨 후임으로 당시 서울시 감사담당관(4급)이었던 정 전 비서관을 1급인 청와대 총무비서관에 임명한 사실에서 두 사람의 남다른 애정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청와대 일각과 노 전 대통령 주변 인사들조차 정 전 비서관의 발탁을 반대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두 사람의 과도한 친분이 자칫 권력형 비리 등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우려감 때문이었다.‘설마’ 했던 우려는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점차 현실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정 전 비서관은 현 정부 출범 이후 참여정부와 관련한 각종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구설수에 오르내렸다. 검찰은 지난해 노 전 대통령의 국가기록물 유출 의혹 사건이 불거지자 정 전 비서관을 피고발인 자격으로 불러 조사한 바 있고, 같은 해 청와대 비서진의 공사 수주 외압 의혹 사건 때도 경찰 조사를 받았으나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또 2004년 3월 사위였던 신성해운 이 아무개 이사에게서 현금 1억 원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지만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고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이처럼 정 전 비서관은 현 정부 사정기관의 전방위적 사정 칼날을 여러 차례 비켜 갔지만 ‘박연차 게이트’가 ‘노무현 게이트’로 확전되면서 결국 구속됐다. 특히 정 전 비서관의 검찰 진술은 노 전 대통령의 사법처리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입’에 정치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형국이다.실제로 정 전 비서관은 박 회장이 노 전 대통령 측에 건넨 100만 달러와 3억 원, 정대근 전 농협 회장이 권양숙 여사에게 보낸 3만 달러에 모두 관여했고, 노 전 대통령의 퇴임 이후를 논의한 이른바 ‘3자 회동’의 주역이라는 점에서 노 전 대통령의 포괄적 뇌물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핵심 당자자로 지목받고 있다.
▲ 2003년 6월 최도술 씨 후임으로 총무비서관에 내정돼 청와대를 방문한 정상문 씨. | ||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이 재임 중 사적인 행동이 제약돼 있는 상황에서 정 전 비서관을 자신의 분신이자 대리인으로 내세워 박 회장의 사업 전반에 직간접적인 도움을 줬고, 박 회장이 노 전 대통령 측에 전달한 600만 달러는 그 대가일 가능성에 힘을 싣고 있는 분위기다. 검찰은 정 전 비서관이 박 회장으로부터 받은 금품이 포괄적 뇌물로 인정될 경우 노 전 대통령 측이 받은 600만 달러 또한 같은 맥락에서 포괄적 뇌물로 인정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하고 있다.정상문 강금원 박연차 등 이른바 ‘3자 회동’의 주역들이 모두 구속됨에 따라 정 전 비서관의 역할론과 맞물려 이들의 회동 배경 및 논의 내용도 노 전 대통령의 사법처리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노 전 대통령의 오랜 후원자인 박연차 회장과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 정 전 비서관이 2007년 8월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만나 노 전 대통령의 퇴임 후 구상을 논의했다는 게 3자 회동의 골자다.박 회장은 이 자리에서 “해외 계좌에 있는 50억 원을 내겠다”고 제안했지만 강 회장은 “문제가 있는 돈은 안 된다”고 만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박 회장은 2008년 2월 홍콩 현지법인 APC 계좌에서 노 전 대통령 조카사위인 연철호 씨의 계좌로 500만 달러를 송금했다. 강 회장이 2007년 9월 봉하마을 개발사업 명목으로 설립한 ㈜봉화에 처음 투자한 액수도 공교롭게도 50억 원(2008년 12월 20억 원 추가 투입)이다.
두 후원자가 ‘3자 회동’을 통해 노 전 대통령 퇴임 지원금으로 각각 50억 원씩 내기로 합의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는 정황이다. 특히 이 자리에 정 전 비서관이 동석했다는 사실에 미뤄 노 전 대통령이 퇴임 전에 이 같은 사실을 보고받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정 전 비서관이 청와대 공금 12억 5000만 원을 횡령해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혐의가 모두 사실로 드러날 경우 노 전 대통령은 더 더욱 어려운 처지로 몰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홍만표 대검 수사기획관은 4월 20일 정 전 비서관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노 전 대통령과의 연관성은 아직 찾지 못했지만 단순 횡령으로 하기에는 더 수사를 해 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해 노 전 대통령과의 연결고리를 찾는 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음을 시사한 바 있다.
검찰은 비자금이 수차례에 걸쳐 뭉칫돈으로 만들어졌고 원금에 대한 이자만 일부 지출됐을 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점에 주목하고 노 전 대통령이 조성 과정에 묵시적으로 관여했거나 이 돈 자체가 노 전 대통령을 위한 자금일 가능성을 열어놓고 수사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검찰 수사를 반박해 온 노 전 대통령이 정 전 비서관 구속 이후 사실상 ‘백기투항’ 모드로 급선회한 사실은 이번 사건에서 정 전 비서관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과 무게감을 단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정 전 비서관은 4월 21일 구치소로 향하면서 청와대 공금 횡령 혐의는 시인하면서도 “노 전 대통령은 전혀 모르는 사안”이라며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과시했다.
하지만 정 전 비서관은 구속 과정에서 박 회장으로부터 1억 원대 상품권을 받은 사실을 시인하는가 하면 논란이 일고 있는 3억 원에 대해서도 “권양숙 여사에게 전달하지 않았다”며 기존 진술을 번복하는 등 약간의 심적 동요를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정 전 비서관에게 적용된 특가법상 횡령 등 국고 손실 등 혐의는 금액이 5억 원을 넘을 때 무기징역 또는 징역 5년 이상의 중형에 처하도록 돼 있다. 정 전 비서관이 혼자 모든 책임을 질 경우 최소 5년 이상을 싸늘한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극한 상황에 몰릴 수 있다.
검찰이 이러한 처벌 조항을 강조하는 동시에 노 전 대통령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각종 증거자료를 제시할 경우 정 전 비서관이 ‘자물쇠’를 풀고 폭탄 진술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노 전 대통령과의 40여 년 인연을 매개로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지내면서 권력의 단맛을 향유한 정 전 비서관이 끝까지 ‘의리’를 지킬지 아니면 노 전 대통령을 고립무원의 위기 상황으로 몰고갈 폭탄 진술을 쏟아낼지 그의 ‘입’에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