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같은 ‘반전 인생’ 슬픈 마침표
▲ 지난 4월 30일 검찰에 소환된 노무현 전 대통령이 피의자 신분으로 포토라인에 서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
검찰은 이번 주 중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 여부를 결정한다는 방침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사법처리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영욕의 삶을 헤쳐온 노 전 대통령이 퇴임 1년 2개월여 만에 사법처리를 걱정해야 하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한 형국이다.
노 전 대통령의 추락은 참여정부의 도덕성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면서 친노그룹 및 386 정치인들의 동반 몰락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정국 풍향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전직 대통령 신분을 뒤로한 채 ‘벌거벗은 승부사’로 전락한 노 전 대통령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과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던 드라마틱한 영욕의 정치사를 되짚어 봤다.
노 전 대통령의 고향은 국민적 시선이 집중되고 있는 경남 김해 봉하마을이다. 1946년 시골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노 전 대통령은 어린 시절부터 승부사적 기질이 다분했다고 한다. 진영중학교 1학년 재학시절에 ‘이승만 대통령 생일 기념 교내 글짓기 대회’가 열리자 ‘백지동맹’을 주동하다 정학을 당했다는 사실은 그의 예사롭지 않은 기질을 단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키가 유난히 작아 ‘돌콩’이란 별명이 붙었고, 머리가 좋아 지역에선 ‘노 천재’로 통하기도 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부산상고를 졸업한 뒤 군에 입대한 노 전 대통령은 제대 후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70년대 초 노 전 대통령과 함께 사시를 준비하며 끈끈한 인연을 맺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박연차 게이트’ 사건으로 구속된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과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다. 경남 김해의 불모산 암자인 ‘장유암’에서 인연을 맺었다고 해서 이 세 사람을 ‘장유암 3인방’으로 칭하기도 한다.
1975년 ‘4수’ 끝에 제17회 사법고시에 합격한 노 전 대통령은 대전지법 판사로 법조계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1년여의 판사 생활을 접고 부산에서 변호사 업무를 시작한 그는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날렸다. ‘서민 이미지’와는 달리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부유한 생활을 하며 고급 레저로 통했던 요트까지 즐겼던 것으로 알려져 2002년 대선 과정에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 2002년 4월 예상을 뒤엎고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상)2002년 11월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에 전격 합의. 그 합의는 대선 전날 파기됐다(하) | ||
노 전 대통령은 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때 부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당선되면서 파란만장한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정치 신인이었지만 ‘5공 비리 특위’ 청문회에서 재벌회장들을 상대로 촌철살인의 추궁으로 일약 ‘청문회 스타’로 급부상했다. 스타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순탄한 길을 걸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스스로 고난을 선택했다. 90년 ‘3당 합당’에 반발해 야권 잔류를 선택한 이후 오랫동안 가시밭길 정치행보를 걷게 된다.
92년 14대 총선과 95년 부산시장 선거, 96년 15대 총선에서 줄줄이 낙선하면서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15대 총선 때 ‘정치 1번지’인 서울 종로에서 맞붙은 사람은 다름 아닌 당시 신한국당 후보였던 이명박 대통령이었다. 98년 이 대통령(당시 의원)이 선거법 위반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해 실시된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는 듯했지만 2년 뒤 그는 또다시 힘겨운 정치실험을 선택한다.
2000년 16대 총선 때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지역구(종로)를 과감히 버리고 부산 출마를 강행한 것이다. ‘지역주의 타파’를 명분으로 적지나 다름없는 부산을 선택했지만 ‘지역주의’와 현실 정치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쓴잔을 마셔야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실험 정신과 무모한 도전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정치적 소신과 뚝심은 그를 더 큰 정치인으로 거듭나게 하는 동력으로 승화된다. ‘바보 노무현’이란 애칭이 붙으면서 열성적인 지지자들이 몰려들었고, 급기야 자발적 팬클럽인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결성되면서 ‘노무현 대망론’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002년 민주당 경선에서 ‘광주의 기적’을 발판으로 승기를 잡은 뒤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노 전 대통령은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성공과 파기 등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끝에 2002년 12월 대권을 거머쥐었다.
각본 없는 한 편의 ‘대권 드라마’를 쓰면서 청와대 주인이 된 노 전 대통령이지만 그의 재임시절 또한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특유의 승부사 기질과 직설적 발언 등으로 구설수가 끊이질 않았고, 집권 초부터 터져나온 측근 비리는 국정운영과 개혁 드라이브에 찬물을 끼얹었다. 특히, 취임한 지 보름도 안 된 시점에서 가진 ‘평검사와 대화’ 과정에서 틀어진 검찰과의 악연은 퇴임 후까지 이어지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시절 유독 청렴성과 도덕성을 강조했다. 인수위 시절에는 “이권개입이나 인사청탁을 하다 걸리면 패가망신을 시키겠다”고 천명해 측근들과 주변 인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2003년 최측근인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의 금품수수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는가 하면 노 전 대통령이 야인시절 운영했던 생수회사 ‘장수천’ 사건으로 적지 않은 측근들이 사법처리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상)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촛불집회.(하) | ||
최도술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10월 “재신임을 받겠다”며 특유의 승부수를 띄우기도 했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측근 비리와 경제파탄, 선거법 위반 등을 놓고 노 전 대통령과 사사건건 충돌해온 한나라당은 17대 총선을 한 달여 앞둔 2004년 3월 12일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시키는 최강의 카드를 던졌다.
노 전 대통령 입장에서는 ‘탄핵소추’라는 오명과 함께 ‘대통령 직무 정지’라는 수모를 감내해야 했지만 ‘탄핵’ 사건은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다지게 하는 동시에 국정을 장악하는 대반전의 기폭제가 됐다. ‘탄핵 반대’ 촛불집회가 봇물을 이루는 등 이른바 ‘탄핵역풍’이 전국을 강타하면서 4·15 총선에서 소수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원내 과반수를 확보하는 압승을 거뒀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도 5월 14일 탄핵소추안을 기각시켜 노 대통령은 두 달여 만에 모든 권한을 되찾았다.
탄핵 사건 이후에도 노 전 대통령은 튀는 발언과 저돌적인 국정 스타일로 야권과 자주 충돌했지만 퇴임 직전까지 그가 강조한 단어는 ‘도덕성’이었다. 집권 마지막해인 2007년 1월 신년 연설에서도 그는 “권력형 비리는 없고 밀실, 측근, 가신 이런 말도 사라졌다”며 참여정부의 도덕성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강조한 청렴성과 참여정부의 도덕성은 퇴임 후 박연차 게이트 사건이 터지면서 처참히 무너졌다. 친형인 노건평 씨를 비롯해 오랜 후원자였던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 최측근인 이광재 민주당 의원과 정상문 전 비서관 등 측근과 주변 인사들이 ‘줄구속’됐기 때문이다. 여기에 부인과 아들, 친인척들이 검찰 조사를 받은 데 이어 자신도 ‘검찰 소환’이라는 불명예와 함께 검찰과 사법처리 여부를 놓고 치열한 법리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한 상황이다.
4월 30일 노 전 대통령을 소환한 검찰이 어떤 결론을 내놓을지 아직 속단할 순 없다. 다만 퇴임 1년 2개월 만에 비리 혐의로 검찰에 출두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노 전 대통령은 씻을 수 없는 오명과 함께 전직 대통령의 어두운 정치사를 기록하게 됐다. 검찰 소환을 앞둔 4월 22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더 이상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 없다”고 밝힌 노 전 대통령의 소회에서 권력의 무상함을 새삼 느낄 수 있는 것 같아 씁쓸함을 더해주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