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끈했던 그들도 결국 ‘왕좌’때문에...
▲ 박삼구 명예회장(왼쪽), 박찬구 전 회장. | ||
형제들 중에서도 유독 우애가 깊었던 것으로 알려진 박삼구 명예회장과 박찬구 전 회장의 충돌은 지난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우건설 인수전 참여를 두고 의견이 갈렸던 것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박찬구 전 회장은 그룹 내에서 철저하게 2인자 역할을 자임하며 묵묵히 박삼구 명예회장을 보조했다. 언론에 노출되는 것도 최대한 자제했다고 한다. 박찬구 전 회장이 일반인들에게 다소 생소한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지난 2005년 두산에서 ‘형제의 난’이 발생했을 당시 박찬구 전 회장은 지인들에게 “우리는 형제들끼리 싸우는 일이 절대 없을 것”이라며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돈독했던 형제애는 박삼구 명예회장이 대우건설 인수를 추진하면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박찬구 전 회장은 “덩치가 너무 커 그룹에 부담이 될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박삼구 명예회장은 동생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인수를 강행했고 결국 대우건설을 손에 거머쥐었다. 이를 두고 금호아시아나는 물론 재계에서는 “M&A(인수·합병)의 귀재”와 같은 수식어를 동원해가며 박삼구 명예회장에게 찬사를 보냈다. 박찬구 전 회장으로서는 머쓱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 그 이후 형제는 예전에 비해 다소 서먹서먹하게 지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금호는 대우건설 인수에 따른 자금 부담으로 인해 유동성 위기를 겪어야만 했다. 그러다 결국 지난 6월 1일 대우건설 매각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유증도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박찬구 전 회장의 주장이 옳았던 셈이다.
이처럼 대우건설 인수를 놓고 형제가 갈등을 빚긴 했지만 단지 이것 때문에 최근의 사태가 일어났다고는 보기 어렵다. 금호아시아나의 한 관계자는 “대우건설 인수 과정에서 형제가 돌아섰다고 하는데 그것은 과장된 것이다. 집안의 어른이자 최고경영자들끼리 얼마든지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 아니냐”면서 “평소 조용하고 소극적인 성격으로 알려진 박찬구 전 회장이 형에게 ‘반기’를 든 배경엔 뭔가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오히려 재계에서는 재벌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영권 다툼에 주목하고 있다. 금호아시아나에는 ‘65세 룰’이란 게 있다. 고 박인천 창업주 뜻에 따라 65세가 되면 그룹 경영권을 후임자에게 물려주기로 형제들끼리 합의한 것이다. 지난 1984년에 총수일가가 작성한 합의서도 이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올해 64세인 창업주의 3남 박삼구 명예회장은 그 임기가 내년 연말까지고 4남 박찬구 전 회장이 그 뒤를 이을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혀왔다. 바꿔 말하면 박찬구 전 회장으로서는 대권 승계를 목전에 두고 있는 마당에 굳이 무리수를 둘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박삼구 명예회장의 아들인 박세창 경영관리부문 상무가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며 박찬구 전 회장의 잠재적인 라이벌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2002년 박삼구 명예회장이 그룹을 물려받을 때만 해도 일가 3세들의 나이가 대부분 20대 초·중반이었다. 고 박정구(창업주의 차남) 회장의 아들 박철완 아시아나항공 전략팀 부장 역시 당시 24세였다. 박삼구 명예회장으로의 승계에 이견이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박세창 상무는 박삼구 명예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회장이 취임하는 2011년에 35세가 된다. 그룹 총수직을 물려받기에 다소 젊은 나이이긴 하지만 박삼구 명예회장으로서는 만약 박찬구 전 회장 체제로 갈 경우 박세창 상무가 그 다음 후계자로 선정되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을 감안했을 수도 있다. 경영과는 무관한 것으로 알려진 장손 박재영 씨(창업주의 장남 고 박성용 회장 아들)를 제외한다 하더라도 박찬구 전 회장의 다음 차례는 고 박정구 회장 아들인 박철완 아시아나항공 전략경영팀 부장이 된다. 또한 박찬구 전 회장이 자신의 아들인 박준경 금호타이어 부장에게 물려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박삼구 명예회장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부자승계를 위한 준비 작업을 극비리에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금호아시아나 관계자는 “박세창 상무의 경영수업이 끝날 때까지 전문경영인을 징검다리로 내세우는 전략도 그중 하나”라고 귀띔했다. 현재의 상황과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박찬구 전 회장이 이러한 박삼구 명예회장의 뜻을 전해들은 것은 올해 2월경이라고 한다. 박찬구 전 회장의 한 측근은 “당시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형에 대한 섭섭함을 털어놓는 것을 들었다”고 전했다. 이때부터 박찬구 전 회장은 계열분리를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카 밑에서 일하느니 자기가 20년 넘게 공을 들여온 석유화학부문을 따로 떼어내 분가를 하겠다는 것이다. 박삼구 명예회장도 동생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한번 고민해 보자”며 신중하면서도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자신의 아들에게 그룹을 물려주기 위해서는 어차피 동생 몫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우건설이 가져온 ‘승자의 저주’는 화해기운이 감돌던 형제 사이마저 끝내 갈라놓았다. 산업은행과 재무구조 개선약정을 맺기로 한 박삼구 명예회장은 금호석유화학 분리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으로 선회했다. ‘실탄’ 확보가 절실한 상황에서 금호석유화학 금호폴리켐 금호미쓰이화학 금호피앤비화학 등 알짜배기 계열사를 내줄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또한 대우건설을 인수하면서 법적인 지주사로 등극했던 금호산업이 그 자격을 잃고 금호석유화학이 실질적인 단독 지주사가 된다는 점도 계열분리안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일 듯하다.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서 있는 금호석유화학을 떼어낼 경우 박세창 상무가 그룹을 물려받더라도 그 지배권 행사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박삼구 명예회장의 의중을 파악한 박찬구 전 회장은 장고를 거듭했다. 그리고 지난 6월 18일 금호산업 지분을 파는 것을 시작으로 행동에 들어갔다. 박찬구 전 회장 부자는 금호산업을 매각한 돈으로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사들였다. 이로써 ‘4형제간 계열사 지분을 동등하게 가진다’는 원칙은 깨졌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재계에서는 박찬구 전 회장이 계열분리보다는 차기 ‘대권’에 대한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했다.
▲ 07년 9월 박삼구·박찬구 회장과 임직원들이 그룹의 500년 아름다운 기업을 기원하는 팽나무를 식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 ||
박삼구 명예회장도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사들이며 반격에 나섰다. 이에 앞서 박삼구 명예회장은 가족회의를 소집해 다른 형제 일가에게도 합류해줄 것을 부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찬구 전 회장 부자를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이 공조하고 있다는 것을 대내외에 알림으로써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고 박정구 회장의 지분을 이어받아 개인으로서는 사실상 최대주주인 박철완 부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절실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박찬구 전 회장은 박철완 부장이 박세창 상무와 함께 나란히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사들이자 크게 낙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등을 돌린 형제간의 모습은 지난 7월 13일 경기 화성에서 열렸던 고 박정구 회장 7주기 추모행사에서도 감지됐다. 추모식에 가장 늦게 도착했던 박찬구 전 회장은 추모식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른 가족들에 앞서 가장 먼저 선영을 떠났다고 한다.
박찬구 전 회장은 추모식 이후에도 추가로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매입하며 대응에 나섰지만 이미 그룹과 집안을 모두 장악한 박삼구 명예회장의 적수가 되지는 못했다. 결국 박삼구 명예회장은 지난 7월 28일 금호석유화학 이사회를 열어 박찬구 전 회장 해임안을 가결시켰다. 당시 박찬구 전 회장은 이사회가 열린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식사를 하고 있다가 뒤늦게 참여했다는 후문이다. 7명의 이사 중 ‘박찬구 해임안’에 대한 반대표는 단 하나, 박찬구 전 회장 자신의 표였다. 자신이 20년 넘게 근무해 온 ‘홈그라운드’에서 기습을 당한 것이다. 이를 위해 박삼구 명예회장은 박찬구 전 회장이 지분매매에 매진하는 동안 금호석유화학 이사진 포섭에 나섰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단 동생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 박삼구 명예회장은 지난 7월 30일 직원들에게 “새 회장을 중심으로 흔들림 없이 단합해 재무구조 개선약정의 순조로운 이행을 통해 작금의 위기를 극복하자”며 분위기 쇄신에 나섰다. 박삼구 명예회장은 그룹 경영에서 물러나고 재무구조 개선약정 이행에만 전념한다고 밝혔지만 그의 그룹 지배력은 변함이 없을 전망이다. 회장직은 내놨지만 핵심계열사인 아시아나항공 금호석유화학 대한통운 금호타이어 등에서 여전히 대표이사직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번 형제의 난으로 인해 박삼구 명예회장의 그룹 지배력이 견고해졌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박찬법 신임 회장이 박삼구 명예회장의 최측근으로 꼽히고 있기 때문이다. 향후 ‘리모컨 경영’을 통해 박삼구 명예회장이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또한 대우건설 매각과 함께 단독 지주사가 될 금호석유화학을 장악했다는 것도 박삼구 명예회장이 거둔 수확이다. 위기상황에서 ‘지배권 강화, 부자승계 발판 마련, 금호석유화학 장악’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셈이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