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영화 ‘변호인’을 TV에선 왜 못보나 했더니…
충무로에서 ‘영화밥’을 20년간 먹은 A 씨는 몇몇 영화를 둘러싼 ‘외압설’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특히 ‘당연히’를 힘주어 말했다. 이념적 색채를 띤 영화의 경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제작 과정에서 이념을 강조하지 않았더라도 해당 영화를 보고 대중이 특정 인물이나 이념을 떠올렸다면 ‘찍힐 수 있다’고 토로했다.
최순실 정국이 대한민국을 통째로 뒤흔들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최순실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은 곳을 찾기 어렵다. 특히 대중이 관심을 보이는 분야는 특정 영화가 정권의 눈 밖에 났다는 소식이었다.
CJ E&M의 실질적 수장이었던 이미경 부회장은 2014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 배경에는 이 부회장이 참석했던 2014년 1월 스위스 다보스포럼 ‘한국의 밤’에서 그가 박근혜 대통령보다 더 부각돼 ‘미운털’이 박혔다는 이야기와 함께 영화 <광해:왕이 된 남자>가 거론됐다. 백성을 위하는 어진 왕의 이야기를 다룬 <광해:왕의 된 남자>가 고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리게 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또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이 영화를 보고 많은 눈물을 흘렸다는 보도 역시 현 정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후문이다.
영화 ‘광해:왕이 된 남자’ 스틸컷.
이후 CJ E&M은 <국제시장>과 <인천상륙작전>과 같은 우익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뉘앙스를 가진 영화를 연이어 제작했다. <국제시장>은 박 대통령의 아버지인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대한 향수가 묻어 있고, <인천상륙작전>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보수층의 지지를 받았다. 두 영화는 각각 1400만 명, 7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영화 자체의 의미도 충분하기 때문에 단순히 ‘정권에 아부하는 영화’로 치부하는 것 또한 또 다른 선의의 피해자를 양산하는 것이란 지적도 있지만, 최순실 사태와 맞물려 대중의 따가운 시선 역시 끊이지 않고 있다.
비슷한 사례는 영화 <변호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배우 송강호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그렸다. 11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고 “노무현 대통령이 그립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이후 <변호인>을 투자배급한 NEW는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았는데, <변호인>을 만든 것이 그 배경이었다는 뒷말이 무성했다.
또한 <변호인>의 투자사 중 한 곳이 CJ창업투자였다. 이 투자사가 CJ 계열사였기 때문에 결국 CJ가 더욱 현 정권의 타깃이 됐다는 설명이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영화 투자는 특정 영화에 대해 집중되기보다는 펀드 형식으로 조성된 후 수익이 날 만한 영화에 분산 투자한다”며 “CJ창업투자의 투자 작품 중 <변호인>이 있었을 뿐, 특정 의도를 갖고 투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변호인> 이후 NEW는 <연평해전>을 투자배급했다. 이 영화는 당초 CJ가 투자배급하려 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NEW의 품에 안겼다. 하지만 평소 NEW가 투자배급하던 영화들과 다소 다른 질감을 가진 영화였기 때문에 NEW가 <변호인>으로 인해 박힌 미운털을 없애기 위해 이 영화를 택했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이런 외압설은 영화뿐만 아니라 해당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배우 정우성의 경우 영화계 블랙리스트 명단에 포함됐는데, <변호인> 제작 당시 출연 의사를 밝혔지만 어울리는 배역이 없어 불발되자 투자자로 이름을 올렸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비슷한 맥락으로 송강호 역시 <변호인> 이후 출연 섭외가 줄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정우성은 런던한국영화제 기자회견에서 “하고 싶은 말 하면서 사는 게 제일 좋잖아요. 자유롭게 표현하면서 살아야 되는 거죠. 이해 충돌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데 그 시대의 기득권 세력이 무언가를 요구하고 그 요구의 강요에 저항하면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하는데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영화 ‘변호인’ 스틸컷.
최근에는 12월 개봉을 앞둔 영화 <판도라>의 주인공인 배우 정진영이 외압설을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원전 사고로 인한 국가 재난 상황과 컨트롤 타워 부재를 그린 이 영화는 제작부터 개봉까지 무려 4년이 걸렸다.
이에 대해 정진영은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반정부적이진 않은데 아무래도 원전 사고를 다루고 있다 보니까 만드는 과정에서 (방해)세력이 만만치 않았다고 하더라”며 “투자를 약속한 이들이 중간에 투자 철회를 하기도 했다. 이유에 관해서는 신통한 답은 들을 수 없었고, 추측하건대 외압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왜 정권은 영화가 보여주는 메시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영화가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잘 만든 영화 1편은 10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본다. 영화관을 찾을 수 있는 인구 3명 중 1명은 본다는 의미다. 또한 향후 VOD로 공개되고, TV에서 내보내면 더 많은 이들이 보게 된다. 그 파급력은 실로 엄청나다. 때문에 과거부터 많은 국가에서 영화는 국가 선전 도구로 쓰이기도 했고, 반면 민중들의 저항의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변호인>은 2013년 개봉됐다. 그리고 3년이 지났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아직 TV에서 튼 적이 없다. 어디로부터 외압이 있었는지, 방송사 스스로 검열을 한 것인지는 정확히 확인된 바가 없다. 하지만 몇몇 영화를 둘러싸고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