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고립’ 연합전선 펼치나
정치권의 단골 블랙홀인 개헌이 탄핵 정국을 파고들었다. 신의 한 수는 박근혜 대통령이 던졌다. 탄핵 위기에 휩싸인 박 대통령은 11월 29일 제3차 국민담화문에서 ‘질서 있는 퇴진’을 수용했다. 국회가 정권이양의 로드맵을 마련하면 이를 수용하는 ‘조건부 하야’다.
이로써 ‘거국내각 구성→개헌→임기 단축→조기 대선’의 물꼬는 일시에 트였다. 친박(친박근혜)계와 친문(친문재인)계의 여집합이었던 개헌 동맹군이 ‘반문(반문재인) 전선’ 구축의 지렛대로 전환된 셈이다. ‘개헌 빅텐트론’은 정국을 관통하는 하나의 큰 줄기가 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제안한 ‘조건부 퇴진’에 대해 개헌 정국을 겨냥한 야권 분열, 교란 작전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사진은 문재인 전 대표.
“사실상 개헌 정국을 겨냥한 야권 분열·교란 작전이 아니냐.” 박 대통령의 ‘조건부 하야’ 수용 직후 야당 의원이 던진 말이다. 적중했다. 박 대통령에게 조건부 하야는 야권의 탄핵 꽃놀이패를 없애는 장치다. 탄핵 가결 여부와 관계없이 국회는 어떤 식으로든 ‘포스트 탄핵 정국’의 첫 알고리즘을 찾아야 한다.
탄핵 가결로 대통령 권한이 정지되면 ‘국회 추천 총리’, 부결되면 ‘거국내각 구성’ 여부 등에 나서야 한다. 청와대 발 개헌 이슈가 일시적으로 당내 비주류 의원들의 탄핵 연합전선을 흩트리는 한편, 탄핵 부결 시 전면적인 개헌 정국의 판을 열 수 있다는 전망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박 대통령의 ‘셀프 면죄부’로 국회가 떠안은 선택지는 ▲탄핵 ▲조건부 하야 ▲임기 단축 개헌 등 크게 세 가지다. 셋 중 어느 것이 현실화되더라도, 박 대통령의 퇴진과 조기 대선은 불가피하다. 이 과정에서 개헌이 얼마나 강력한 변수로 격상할지만이 남았다. 정계개편에 따라 ‘최순실 게이트’ 이후 백기 투항했던 친박(친박근혜)계의 총공세 속에 개헌 정국이 탄핵 이슈를 누를 수도 있다. 여야의 이전투구로 국회 합의에 실패한다면, 박 대통령의 임기는 보장된다.
내년 1월이면 ‘반기문 대망론’도 한반도에 상륙한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박 대통령이 ‘집권연장용 꼼수’라는 비판 속에서도 ‘마이웨이’를 택한 이유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권 대학의 정치학과 교수는 “박 대통령이 제2의 6·29 선언 효과를 노린 것 같다”고 분석했다. 1987년 6·10 민주항쟁으로 붕괴 위기에 내몰린 전두환 신군부가 대통령 직선제 등을 포함한 6·29 선언을 수용했으나, 그해 대선에서 노태우 정권 출범으로 군사정권 연장에 성공한 사례와 판박이라는 얘기다.
현재 개헌파는 ▲이원집정부제(분권형)를 원하는 친박계 ▲제3 지대를 고리로 한 여권 내 비주류와 야권 비문계(국민의당 일부 세력) ▲여야 원외그룹(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와 정의화 전 국회의장) 등 세 그룹으로 형성돼 있다. 이른바 개헌 ‘삼분지계’다. 다만 친박계를 제외한 제 정파세력들은 친박계에 정국 주도권이 넘어가는 것을 우려, “탄핵과 개헌은 별개”라며 연계설 차단에 나섰다.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와 김종인 민주당 의원만 예외다.
이들은 탄핵 본회의 투표(12월 9일 예정) 이후 정의화 전 국회의장과 회동하기로 사실상 합의했다. 제3 지대 대선후보를 낸 뒤 21대 총선과 동시에 개헌 국민투표를 하자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다. 신당 창당 자금을 마련한 정 전 의장은 그간 정계개편 새판 짜기를 위해 반문계 인사들에게 러브콜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선도 창당→정계개편→개헌 추진’ 로드맵이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투 트랙을 주장하는 다수의 비박·비문계도 개헌 판이 열리는 순간, 제3 지대 정계개편으로 뛰어들 가능성이 크다.
유일한 호헌파는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 등 친문계다. 문 전 대표는 개헌에 대해 “정치적 계산하는 분들에게 꿈 깨라고 말하고 싶다”고 비판했다. 개헌 발 정계개편 과정에서 민주당 주류 세력만 고립된 채 총공세에 나선 친박계와 여권 비주류와 야권 반문 세력이 연합전선을 펼치는 구도가 펼쳐질 수도 있다. 개헌파와 호헌파의 정면 승부에 따른 정계개편 변화, 이 지점이 개헌 정국의 변곡점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개헌파 세 그룹의 교집합이다. 친문계를 제외한 개헌 삼분지계를 형성한 이들의 ‘단독 집권’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권력 분점형 개헌인 이원집정부제가 이들을 묶는 연결고리가 될 전망이다. 여권 내 주류인 친박계의 ‘반기문 옹립’과 비박(비박근혜)계, 비문계 등이 권력분점을 고리로 반문계 연합 전선을 형성, 친문계 고립 작전에 나서는 그림이다.
친박계의 조직적인 움직임은 시작됐다. 촛불정국에서 숨죽이던 친박계는 박 대통령의 질서 있는 퇴진 수용 이후 일제히 ‘탄핵 원점 재검토-개헌 논의’에 불을 지피며 총반격에 나섰다. 좌장인 서청원 새누리당 의원은 11월 29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첫 번째 발언자로 나서면서 “야권에서 거국내각 총리를 협의해 추천하고 국회에서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고 선공을 날렸다. 이정현 대표와 정진석 원내대표 등도 ‘탄핵 원점 재검토-개헌 논의’로 야당을 압박했다. 개헌을 전제로 한 조건부 퇴진론에 시동을 건 셈이다.
반 총장의 귀국은 친박계에 천군만마다. ‘외치 반기문-내치 친박 실세’ 권력분점을 통해 정권 연장을 도모할 수 있어서다. 반 총장 역시 개헌을 매개로 대선판에 정착할 경우 친박계와 제3 지대 양측 사이의 줄타기를 통해 자신의 몸값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다. 반 총장은 귀국 후 전직 대통령 묘소를 예방하는 ‘참배 정치’에 나설 것으로 알려졌다.
반 총장을 돕는 외교 3인방인 김원수 유엔 사무차장은 11월 15일∼20일까지 5박 6일간 국내에서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비롯해 나경원 의원, 원희룡 제주도지사,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을 두루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정 원내대표는 반 총장 측에 “일자리·양극화·고령화·개헌 문제에 대한 답을 가지고 와야 한다”고 전했다. 민생과 개헌으로 차기 대권 정국을 돌파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반 총장의 선택지는 ▲대선 불출마 ▲제3 지대 독자노선 ▲새누리당 입당 등이다. ‘최순실 게이트’ 이후 정치권 일각에선 반 총장이 대권 도전의 뜻을 접지 않겠느냐는 얘기도 나온다. 비박계 한 관계자도 “‘최순실 게이트’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반 총장”이라며 “향후 정국 변화에 따른 당선 가능성이 그를 움직이게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반 총장의 출마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있다. 반 총장이 독자노선을 걷는다면, 여야 패권세력을 제외한 제 세력을 아우르는 개헌 빅텐트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김무성 전 새누리당 전 대표를 비롯한 비박계, 민주당 김부겸·김종인 의원,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 제3 지대의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와 정의화 전 국회의장 등이 대상이다. 김종인 의원은 11월 30일 반 총장의 외곽 지지 모임인 ‘초(超)당파 안보·민생회의’ 주최 대전포럼에 참석, “정치를 시작하지도 않은 분과 무슨 연대를 하냐”며 이를 부인했지만, 여전히 개헌을 전제로 한 역단일화는 배제할 수 없는 변수다.
문제는 고립된 친문계다. 문 전 대표는 “개헌은 촛불민심을 배신하는 것”,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책임져야 할 세력들이 집권 연장을 꾀하는 순수하지 못한 시도” 등의 발언으로 연일 개헌 차단론에 나섰다. 같은 당 추미애 대표도 12월 1일 서울 여의도 한 호텔에서 가진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와의 회동에서 “개헌 논의는 없었다”고 선을 그었다. 앞서 추 대표는 개헌론자를 향해 “불난 집에 군밤을 구워 먹겠다는 것”이라고 힐난했다. 범 친노계 관계자도 “자리 났다고 끼어드는 격”이라고 개헌파를 비판했다.
이에 대해 개헌파의 선봉에 선 손 전 대표는 문 전 대표를 향해 “권력에 눈이 멀었다”며 ‘선 탄핵-후 권력구조 개헌’ 대안을 제시했다. 김부겸 민주당 의원도 “특정인이 정할 문제가 아니다”라며 문 전 대표를 비판했다. 문 전 대표의 고립무원은 반문 지렛대의 날개를 달아줄 것인가. 개헌의 고차방정식 열차는 이제 출발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