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siri 컬렉션’ 시국 관련 도서 인기…학원·스터디 모임 ‘국정농단 사태’ 활용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집회가 6주 연속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현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정치와 헌법을 공부하는 국민들이 늘고 있다. 일요신문DB
지난 7일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에 위치한 한 대형서점을 찾았다. 서점을 들어서자마자 <대통령의 글쓰기>,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는 다시 실패하지 않는다>, <정의란 무엇인가> 등의 책들이 눈에 띄었다. 베스트셀러 코너에 진열된 책들 대부분이 현 시국의 문제의식을 담은 인문, 사회, 역사 분야 서적이었다.
특히 헌법의 가치와 존재 이유를 말하는 <지금 다시, 헌법>은 지난달 18일 출간된 이후 꾸준히 주간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머물고 있다. 출간된 지 일주일 만에 초판 5000권이 소진돼 현재 3쇄 발행 중이다. 이처럼 ‘헌법 서적’에 대한 폭발적인 반응은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외친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의 의미와 대통령에 대한 수사와 탄핵 등을 둘러싸고 헌법이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대통령 연설문 쓰기의 엄중함을 알려준 책 <대통령의 글쓰기>도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 연설문 수정 파문 이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 책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연설비서관실에서 8년간 근무한 강원국 씨가 두 대통령에게 직접 배운 글쓰기 비법을 정리한 것으로 출간된 지 2년이 넘었지만 국정농단 사태 이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한 출판사는 아예 현 시국의 문제점과 국가와 개인의 성찰을 담은 책들을 묶은 ‘순siri 도서 컬렉션’을 선보여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대형서점 관계자는 “인문학, 사회학, 역사 분야의 책 판매량이 전년도 동월보다 늘어난 건 사실”이라며 “특히 헌법 관련 서적은 과거 법학도가 아닌 이상 찾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매주 베스트에 머물 만큼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다. 이 때문에 이번 게이트 사건이 터지고 난 후 시류를 읽는데 도움이 될 만한 책들 위주로 따로 진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치·사회 코너에서 정치 관련 책을 들여다보던 대학생 박정수 씨(26)는 “이번 사태가 일어난 후 마음이 계속 답답하다. 얼마 전 촛불집회를 다녀온 뒤 더욱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며 “예전엔 취업 관련 책을 사러 서점에 들르곤 했지만 요즘엔 정치·사회분야 책에 눈길이 간다”고 말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온라인 카페, 블로그 등에서도 주 화두로 등장하는 것은 ‘최순실 게이트’ 관련 글이다. 워낙 사태의 심각성이 중대하고 관련 의혹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오는 상황에서 이를 정리한 글들이나 정치 현안을 분석한 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번 사태가 불거진 후 블로그 활동을 시작한 취업준비생 이성호 씨(28)는 “처음에는 취업을 대비해 시사상식을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 개인 블로그에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된 용어를 영상으로 만들어 정리해 뒀다”며 “우연치 않게 사람들도 많이 (내 블로그를) 찾고 반응도 뜨거워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요즘에는 대통령 탄핵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어 탄핵을 비롯한 정치 현안과 관련된 글을 올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메신저 오픈채팅방에서도 현 시국과 관련된 토론이 활발하다. 특히 오픈채팅방의 특성상 익명의 사람들과 자유롭게 의견 교환과 정보 공유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국 관련 논의가 활발하다. ‘국정농단시민대책반’이란 제목의 대화방에서 자신을 중학교 3학년생이라고 밝힌 한 학생은 “부모님이 뉴스 보실 때 따라보는 정도였지 정치나 국가가 하는 일에 대해선 관심이 전혀 없었다”며 “하지만 우리가 정치에 무지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니 정치나 역사에 대해 좀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영어학원에서도 ‘최순실 게이트’를 활용하고 있다. 서울 강남의 한 영어회화 학원에서는 요즘 ‘최순실 게이트’를 전한 외신 보도를 활용해 강의하고 있다. 주로 외신 보도를 한국어로 번역해 놓은 강의자료를 영어로 다시 번역해 말하는 방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이 영어학원에서 직장인반을 가르치는 강사 김 아무개 씨는 “정치 현안이나 시국에 관련된 것들은 오히려 (학생들이)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덕분에 수업 참여율이나 집중력이 더 좋아지는 효과를 봤다”며 “이 사태가 끝날 때까지 ‘최순실 게이트’를 활용한 수업 방식을 고수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일부 서점에서는 시국과 관련된 책들을 따로 분류해 진열해 놓고 있다.
온라인 카페나 취업사이트 등에서 자발적으로 스터디원을 모집해 그룹스터디 모임을 갖는 사람들에게도 화두는 단연 ‘최순실 게이트’다. 매주 영어 토론 스터디에 참여하고 있는 최진혁 씨(25)는 “외신 보도를 주로 보는데 ‘샤머니즘’, ‘스캔들’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더라. 한편으로는 창피하지만 주변에 외국인 친구들이 많아 국민들 대부분이 가진 생각을 명확히 전해주고 싶어 스터디에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런 현상에 대해 “과거 정치라고 하는 것은 내 삶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내 삶과 직결된다는 것을 이번 사태를 겪으며 많은 국민들이 느낀 것 같다”며 “단순히 정치인을 교체한다는 인식이 아니라 한 단계 더 나아가 정치라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구조가 어디서, 얼마나, 어떻게 잘못됐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정치 참여를 해야겠다는 인식이 커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전 교수는 “국민들이 헌법을 공부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도 이 사회가 헌법에 근거해 체계가 구축되고 룰이 결정돼야 한다는 점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는 헌법을 소환해냄으로써 국가,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를 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의지”라며 “이제는 정치를 상품이란 차원에서 다루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정치 상품의 생산자 위치에 서거나 상품이 좋은지 나쁜지를 판별하는, 즉 소비자 차원에서 머무는 게 아닌 생산자 ‘프로슈머’(소비자가 소비는 물론 제품개발, 유통과정에까지 직접 참여하는 ‘생산적 소비자’)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김상훈 기자 ksangh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