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탄핵 막을 생각 없었다”
▲ 지난해 3월12일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 탄핵소추안 가결을 선포하는 모습. | ||
박 전 의장은 노 대통령과 여권 인사들이 적극적으로 막으려 했다면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밝혔다. 탄핵안이 국회통과 되기 이틀 전인 지난해 3월10일 박 전 의장은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해 노 대통령과 야3당 대표들간의 만남을 주선하고 나선다. 박 전 의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김 실장이 “대통령님이 의장님 뜻은 고마우나 지금 너무 지쳐 있어 만날 필요가 없다고…”라 말했다고 회상한다. 박 전 의장은 ‘이들이 탄핵이라는 절망적인 사태를 일부러 불러왔구나’라며 ‘국가를 벼랑에 세워놓고 정치적 목표를 거머쥐려는 책략’이라 느꼈다고 한다.
박 전 의장은 저서에서 탄핵 통과 하루 전날 노 대통령의 기자회견 내용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당시에 대해 ‘자신의 참모들이 줄줄이 구속된 데 대한 변명과 두둔을 길게 늘어놓았다’ ‘탄핵에 대해 한마디도 하려 하지 않았다’라며 특히 노 대통령 친형에게 뇌물을 준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을 모욕했다고 강조했다. 국민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등으로 나누어 갈등을 부추기는 노무현식 화법의 극치를 보여줬다는 것이다. 이 회견 내용이 남 전 사장의 자살을 부추긴 것이라 강조하기도 했다.
박 전 의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탄핵에 대한 질문에 노 대통령이 “총선을 통해 국민의 심판을 받겠다”고 말한 것이 결국 야당 의원들을 분노케 만들어 탄핵의 불을 지폈다고 회상한다. 박 전 의장은 ‘탄핵을 다가올 총선에 연계하여 이벤트로 활용하겠다는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이라 느꼈다고 한다. 탄핵 하루 전날 현재 국회의장인 열린우리당 중진 김원기 의원이 의장실에 찾아와 ‘청와대와 야당 간의 협상 주선’을 요청했지만 ‘그냥 해보는 소리’로 보일 만큼 소극적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탄핵안이 가결된 이후 방송의 보도행태에 대해서도 꼬집었다. 박 전 의장은 저서에서 당시 방송내용에 대해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으로 보도가 아니라 선동이었다’고 규정했다. 박 전 의장은 ‘여당 의원들 중 일부는 넥타이를 머리를 헝클어뜨린 후 TV 앞에 배우들처럼 섰고 TV는 모든 기법을 다하여…’라며 여권과 방송이 당시 상황을 극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밀착했다고 전한다.
박 전 의장은 같은 부산 출신인 노 대통령의 정치역정을 소개하며 ‘의정활동 중 단 한 번도 행정수도 이전 문제를 거론하거나 관심을 갖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소개했다. 훗날 대통령 선거와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수도이전 문제를 정략적으로 사용한 것이라 꼬집은 것이다.
노 대통령이 ‘재신임 투표를 하겠다’고 밝혔던 것에 대해 박 전 의장은 당시 여·야 총무들을 설득시켜 노 대통령이 그 발언을 철회할 명분을 만들고자 했다고 한다. 저서에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수긍하는데 유독 열린우리당 김근태 당시 원내대표만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대통령에게 맡겨놓자”고 해 여·야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고 소개한다.
박 전 의장 저서에서는 현 여권 세력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주체사상의 세례를 받고 성장한 정치 신인들이 17대 국회에 대거 진입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난 17대 총선은 탄핵을 주제로 한 굿판이라 주사파 사상 검증을 할 수 없었다’고 탄식하고 있다.
저서에서 박 전 의장은 김대중 김영삼 두 전직 대통령과의 일화도 소개하고 있다. 박 전 의장은 지난 2002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신임 국회의장단을 초청한 자리에서 ‘국회 시정연설은 반드시 대통령이 해야한다’고 했으며 김 전 대통령도 ‘옳은 말씀’이라 맞받아쳤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 시정연설장엔 김 전 대통령 대신 김석수 당시 총리가 나타났다. 박 전 의장은 당시 김 총리에게 돌아가라고 했다가 한바탕 홍역을 치른 뒤 ‘이번 한번만’이라 약속하고 김 총리의 시정연설을 허락했다고 전한다. 얼마 뒤 공개석상에서 박 전 의장을 만난 김 전 대통령은 “대퇴부가 몸시 아파서 연설을 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라 해명했다고 한다.
지난 1989년 여당 총재였던 김영삼 당시 총재와 함께 구소련을 방문했을 때 일화도 등장한다. 숙소의 여직원들이 워낙 불친절해서 한국에서 가지고 간 꽃무늬 스타킹을 한 여직원에게 선물했더니 감격한 여직원이 1백20달러짜리 고급 캐비어를 공짜로 내왔다고 한다. 박 전 의장이 갖고 간 꽃무늬 스타킹은 1달러짜리였으니 1백20배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