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감정팀 ‘위작’ 판정과 상반된 검찰 발표…유족 “수용 못해” 반발
검찰이 고(故) 천경자 화백을 둘러싼 위작 논란에 “미인도는 천 화백의 진품”이라는 수사결과를 지난 19일 발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5년 동안 이어져온 위작 논란은 좀처럼 종식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연합뉴스
미인도 위작 논란은 1991년 4월 천 화백이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미인도에 대해 “내가 그린 게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처음 불거졌다. 이에 국립현대미술관이 화랑협회 산하 감정위원회에 감정을 의뢰, ‘진품’ 판정을 받으면서 논란은 증폭됐다. 잠잠하던 위작 논란은 천 화백의 차녀 김정희 씨가 올해 5월 국립현대미술관 측 전·현직 관계자 6명을 고소·고발하며 재점화됐다.
지난 19일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는 소장이력 조사와 전문기관 과학감정, 전문가 안목감정, 위작자를 자처해 온 화가 권춘식 씨 조사내용 등을 종합한 결과 “미인도는 천 화백이 그린 ‘진품’으로 판단된다”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검찰 관계자는 “이 사건이 1991년 이래 25년간 지속돼 온 대표적인 미술품 위작 논란 사건인 점을 감안해 미술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청취하고 사건 관계자들을 철저히 조사했다”며 “현 시점에서 동원 가능한 거의 모든 감정방법을 통해 진실규명을 위해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 25년 전 결론대로 ‘진품’ 판정
그렇다면 검찰이 미인도를 진품으로 판단한 근거는 무엇일까. 하나는 검찰이 국가기록원에서 확보한 미인도의 소장 이력이다. 검찰에 따르면 1977년 천 화백은 대공 대구 분실장 오 아무개 씨에게 미인도를 포함한 그림 2점을 제공했고, 이 중 미인도는 다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후 이 그림은 국가에 기부됐고, 검찰은 미인도가 재무부-문화공보부를 거쳐 1980년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입고된 이력이 명백히 파악된다고 밝혔다.
또 다른 이유는 미인도에서 천 화백의 독특한 기법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검찰은 그 근거로 미인도에서 나타난 육안으로는 관찰되지 않는 압인선(날카로운 필기구 등으로 사물의 외곽선을 그린 자국)이 천 화백의 다른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징과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또 천 화백의 특징적인 채색기법은 수없이 수정과 덧칠을 반복해 작품의 밀도와 완성도를 높이는 방식이다. 그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그림 밑층에 다른 밑그림이 존재하는데 미인도에서도 그런 부분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아울러 검찰은 미인도의 화면 중 앞머리, 눈썹·콧날·목과 쇄골 부위 선, 왼쪽 안륜근, 인중 표현, 풍성한 생머리 밑층의 파마머리 형태 등 육안으로는 관찰되지 않는 세밀한 스케치가 발견되며 이 스케치 이미지를 미인도보다 1년 앞서 그린 천 화백의 작품 ‘차녀 스케치(1976)’ 이미지와 겹쳐보면 세부 표현방식에서 유사한 것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결국 ‘차녀 스케치’를 바탕으로 1977년에 ‘미인도’, 1981년에 ‘장미와 여인’이 완성된 것으로 검찰은 판단하고 있다.
앞서 검찰의 감정 과정에서 유족 측의 요청으로 프랑스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감정팀이 지난 9월 방한해 특수 카메라로 미인도와 진품 9점을 스캔·촬영한 후 각 사진 이미지를 수치화하는 방법으로 분석·패턴화하는 작업이 이뤄지기도 했다. 이에 대한 분석결과 프랑스 감정팀은 “미인도의 진품 가능성은 0.00002%”라는 감정 의견을 도출해 검찰에 보고서를 전달했다.
하지만 검찰은 미인도 감정 보고서에는 감정팀이 홍보한 내용과 달리 심층적인 단층분석 방법이 제시되지 않는 등의 이유로 해당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감정팀이 사용한 작품 간 명암대조와 밝기 계산식을 미인도를 제외한 나머지 9개 진품에 그대로 대입한 결과 1977년 작품 A의 진품 확률이 4.01%, 1977년 작품 B의 진품 확률이 4.31%로 계산됐다는 것이 검찰의 설명이다.
# 프랑스 감정팀 ‘위작’ 주장, 유족 “검찰수사 결과 수용 못해”
천 화백 유족 측은 프랑스 감정팀의 감정 내용을 근거로 검찰 발표에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유족 측 변호인인 배금자 변호사는 입장자료를 내고 “프랑스 감정팀의 보고서를 숙지했는지 의심될 만큼 검찰의 논리와 전문성이 부족하다”며 재정신청, 민사소송 등 추가 법적 대응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유족 측 공동변호인단은 특히 “중앙정보부 대구 분실장에게 선물했다는 말 자체가 천 화백이 먼저 꺼낸 얘기였고 오 씨가 가져간 그림은 미인도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작품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미인도가 김재규 전 부장 소유라고 해도 그의 몰수 재산 가운데 가짜 골동품이나 그림이 많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사실이 진품의 증거는 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압인선이 확인됐다거나 희귀하고 값비싼 석채 안료를 사용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송곳 같은 도구로 본을 뜨는 것은 동양화가들이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며 “암석에서 추출하는 석채에도 여러 종료가 있고 안료는 누구나 쓸 수 있어서 아무런 결정적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변호인단은 이어 프랑스 감정팀이 미인도가 위작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데 사용한 계산식으로는 전혀 다툼의 여지가 없는 천 화백의 진품조차도 진품 확률이 4%대로 낮게 나왔다는 검찰 주장에 대해 “검찰 측 측정자가 임의로 계산해 만들어낸 자료다. 누가 이런 수치를 도출했는지 정확한 방법과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배 변호사는 이와 관련 “프랑스 감정팀이 검찰에 계산 공식을 제공하지 않았으며 이런 계산을 하려면 특수 장비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장비 없이 어떻게 계산을 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
# “이제는 천 화백 작품세계 재조명 필요”
미술계 일각에서는 이번 검찰 수사 발표에 담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를 계기로 더 이상 미인도 진위 논란을 반복하기보다 천 화백의 예술업적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미인도가 진품이라고 꾸준히 주장해온 국립현대미술관 전 학예실장 정준모 씨는 “천경자 선생 사후에 계속되는 작품의 진위문제는 그의 예술적 성과와 미학적 성취를 가리는 일밖에 안된다”며 “이제 그런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졌으니 천경자의 미술사적 업적을 제대로 재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라고 밝혔다.
25년간 이어져 온 미인도 위작 논란을 계기로 혹시 모를 위작 논란에 사후적인 대처보다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기반을 철저히 만들어 놔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미술관장은 “위작 시비가 일어난 게 어떻게 보면 작가가 작품에 대한 기록, 자기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만이 알 수 있는 표시나 연도 등에 대한 기록을 철저히 해 놓아야 앞으로 위작 논란에 휘말리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상훈 기자 ksanghoon@ilyo.co.kr
글로벌 감정단과 ‘감정 싸움’ 벌이나 25년간 이어져 온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위작 논란은 이제 다시 국내 미술계를 넘어 세계 감정단과 치열한 공방전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19일 검찰 수사 발표 직후 유족 측이 밝힌 입장자료에 따르면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연구소는 “한국 검찰의 대검 자체 과학수사 결과의 발표문은 내용이 전혀 비과학적이고 비객관적이며 임의적 자료를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하다. 우리 연구소의 25년 이상 축적된 첨단기술과 경험을 그렇게 쉽게 흉내 낼 수는 없다”고 밝혔다. 장 페니코 연구소장은 21일 <일요신문>과 서면 인터뷰를 통해 “한국 검찰이 과학적 분석에 기초한 연구결과를 근거도 없이 폄하했다”며 검찰수사 발표를 반박했다. 장 페니코 소장은 “대검 자체 과학팀이 우리의 기술을 이용해 최종보고서에 나와 있는 두 가지 항목을 두고 자체검증을 해본 결과 천 화백의 77년도 진품이 분명한 두 점이 각각 4.01%와 4.31%의 진품가능성을 보였다는 것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며 “최신 장비나 소프트웨어도 갖추지 않은 한국 검찰이 자체 검사를 발표한 내용을 보면 지극히 비과학적, 비논리적, 주관적이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장 페니코 소장은 미인도의 위작 결론 가능성을 암시한 담당 검사 이메일을 언급하며 검찰의 이번 발표에 강한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지난 11월 7일자 이메일에서 한 담당 검사는 우리에게 ‘미인도가 천 화백의 진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로부터 앞으로 예상할 수 있는 공격에 대해 치열하게 연구소 측의 의견을 강변하라’고 조언했다”며 “하지만 그 말의 의도를 알 길이 없었다”고 전했다. 특히 장 페니코 소장은 “검찰이 원한다면 한국에 가서 위작이라는 사실을 공개 토론을 통해 증명하겠다”고 말해 검찰과 프랑스 감정단의 공방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뿐만 아니라 프랑스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연구소가 미인도 감정 결과를 ‘2017년 국제과학저널’에 소개할 예정이어서 미인도 위작 시비는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