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들도 한때는 ‘방황하는 청춘’
대권에 도전하는 후보들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자서전을 펴낸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능력과 비전을 국민들에게 알리기에 자서전만큼 좋은 홍보수단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후보들의 자서전을 살펴보면 현재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어린 시절의 모습과 마주치기도 한다. 가난이 싫어 가출을 시도하려 했던 후보가 있는가 하면 불량배와 싸워 코뼈가 부러지기도 했던 후보도 있다. 대권을 꿈꾸는 잠룡들은 과연 어떤 유형의 사람일까. 17대 대선 출마자들 가운데 각종 여론조사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유력 후보 6인의 자서전 속 이색 에피소드를 들춰보았다(대통령후보 기호 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는 자신이 우등생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자서전 <개나리 아저씨>(자작나무)에서 정 후보는 17세가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상실감에 빠져 방황을 많이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학창 시절을 전주에서 보낸 정 후보는 당시 친구들과 하숙집과 자취방을 돌며 소주와 막걸리를 퍼마셨다고 한다. 수업시간에도 ‘땡땡이’를 쳐 친구들과 어울리곤 했다. 방황의 결과는 대학입시 낙방이었다. 이때 대학에 들어간 친구들과 마주칠까봐 몇 주일을 집에서 은둔생활을 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그때의 좌절감으로 인해 방황을 마치고 공부에 전념하면서 더욱 성장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어린 시절을 전북 순창에서 보낸 정 후보는 중고교 진학을 위해 전주로 유학 왔다. 그는 방학 때가 되면 고향 순창에 놀러가 시골 친구들과 놀면서 소설 <상록수>의 ‘박동혁’을 꿈꾸기도 했다.
정 후보가 부인 민혜경 씨를 만나 결혼하기까지의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았다. 정 후보는 군 복무 후 대학교 친구의 소개로 민 씨를 처음 만났다. 당시 서울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던 민 씨를 만나기 위해 정 후보는 기숙사 수위 아저씨에게 막걸리와 김치, 삼겹살 등의 물량 공세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육자 집안으로 보수적 분위기가 강했던 민혜경 씨 집은 정 후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기자라는 직업이 문제가 됐던 것. 이에 정 후보는 사랑을 위해 회사에 사표까지 내고 민 씨의 전주 집으로 내려갔다. 정 후보의 이러한 사정을 안 회사의 상부에서는 “(결혼 승낙 받는 데) 실패하면 즉시 사표 수리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정 후보는 결혼 승낙을 얻어 사랑과 일 모두를 지킬 수 있었다.
대선후보 중 최고의 재력가인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지금과 달리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자신의 책 <새벽 다섯 시>(책장), <어머니>(랜덤하우스) 등에서 이 후보는 중학교 시절부터 어머니를 따라 풀빵장사를 하며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어린 시절을 절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하루 두 끼를 술지게미로 때워 항상 불그레해진 얼굴로 인해 선생님께 “어린 녀석이 대낮부터 술이나 퍼마시고…”라는 말을 들으며 자주 벌을 섰던 기억을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선생님께 항상 ‘문제 학생’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고등학교 진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지만 선생님이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한다고 어머니를 설득해 야간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낮에는 과일행상 등으로 돈을 벌고 저녁 땐 학업에 매달리는 나날이 계속됐다. 이 시절 이 후보는 한때 가난으로 인해 가출을 결심하기도 했다. 어디를 가든 집보다는 낫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하지만 새벽에 들리는 어머니의 기도소리가 잘못된 길로 가려는 자신을 막아주었다고 한다. 과일행상 이후에는 뻥튀기 장사를 했다. 직접 기계를 돌려 즉석에서 강냉이를 만들어 팔아야 하기 때문에 항상 그의 얼굴과 손은 땀과 기름때로 얼룩졌다. 사춘기 시절에 자신과 같은 또래 여학생들 앞에서 뻥튀기 장사를 하는 것이 너무 창피해 밀짚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장사를 하다가 어머니께 혼이 난 사연도 있다.
이 후보의 지인들이 쓴 <아름다운 시절>(중앙북스)에 따르면 이 후보는 대학교 시절 친구들과 술을 마셔도 술에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애주가였음에도 친구들이 하나둘씩 술에 취해 쓰러지면 친구들을 모두 도맡아서 챙겨주었다는 것. 대학교 친구인 엄종일 씨는 그 시절의 이 후보가 ‘우렁각시’였다고 추억했다. 다음날 깨어난 친구들이 술 마셨던 흔적이 말끔하게 치워진 것을 보며 “우렁각시가 왔다간 것 같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됐다는 설명이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는 ‘빨치산’이었던 아버지로 인해 시대적 아픔을 겪었다. <권영길과의 대화>(일빛)에서 그는 6·25전쟁이 시작된 이후 아버지를 만났을 때 (이미) 차가운 시신이 되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어릴 적 몇 번 아버지를 뵌 적이 있지만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는 게 권 후보의 얘기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탓에 그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작은아버지의 도움으로 부산으로 유학해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고교시절 운동화 대신 군화 한 켤레만 신고 다녀 ‘똥구두’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했다. 그 시절의 아픔과 꿈을 잊지 않기 위해서인지 권 후보는 지금도 자신의 별명을 물으면 ‘똥구두’라고 답한다.
권 후보는 어렸을 적 뒷골목 아이들과도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본의 아니게 도둑질에 가담한 ‘사건’도 있었다고 고백한다. 중학교 1학년 때 뒷골목의 두목 격인 아이가 도둑질을 하면서 그에게 망을 봐달라고 했던 것. 당시 금목걸이를 도난당한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를 했고 결국 경찰에 잡힌 권 후보는 사실 그대로 말을 했다고 한다. 다행히 주범이 잡혔지만 경남중학교의 모범생으로 통하던 권 후보에 대한 작은아버지와 선생님의 실망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선생님과 작은아버지의 현명한 처분으로 아무도 그가 절도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세상사에 일찍 눈을 떠서인지 권 후보는 고등학교 때부터 부랑아 수용시설에서 야학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서울대 농대를 지원하게 된 것도 농민운동에 관심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인제 민주당 후보 역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 후보는 집안이 어려워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보려 했지만 두 형이 중학교만 마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면서 자신이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자서전 <출발선에 다시 서서>(따뜻한 손)에서 이 후보는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 별명이 ‘배추’였다고 밝히고 있다. 용돈이 모자라 머리를 제때 안 깎아서 붙여진 별명. 대학교 때는 독서실과 친구들의 자취방을 전전하면서 ‘빈대’생활도 했다고 말한다.
대학교에 입학해서는 운동권 동아리인 사회법학회에 가입해 당시 친구들로부터 성명서 작성에 재주가 있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후보 자신은 행동대원 역할을 좋아해 데모 때 필요한 빵, 우유, 과자 등 먹거리를 리어카에 싣고 리어카 행상처럼 변장해 현장에 잠입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후보는 고교시절까지만 해도 나폴레옹과 같은 장군이 되고자 육군사관학교를 희망했다가 아버지와 당시 여자친구인 부인 김은숙 씨의 충고로 법관 쪽으로 목표를 바꿨다고 했다.
그는 부인 김 씨와 중학교 시절 처음 만나 12년간 열애 끝에 군 입대 3일 전에 결혼을 했다. 이 후보의 입대로 김 씨는 제대로 된 신혼생활도 하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을 안 군부대에서 2세를 갖도록 2박3일의 ‘씨받이휴가’를 이 후보에게 준 일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휴가 때 실제로 2세를 갖지는 못했다고 한다.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는 주변 환경 덕에 어릴 때부터 경영에 대해 주워들은 이야기가 많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운수업체를 운영했고 어머니는 경제인 집안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CEO 수업을 받았던 셈이다. 지금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문 후보의 사회봉사활동은 학창시절부터 생긴 ‘버릇’이라고 한다. 얼마나 열심이었던지 친구들이 봉사활동에 너무 매달리면 서울대에 못 간다고 놀릴 정도였다는 것. 결국 주변 친구들의 ‘예언’처럼 어울리던 친구들 가운데 문 후보만 서울대 입시에서 낙방했다고 한다.
자서전 <사람이 희망이다>(웅진윙스)에서 문 후보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두 번이나 낙방하고 원인 분석을 했다고 말한다. 그때 영어실력이 부족함을 알고 제대로 영어를 배우고 싶어 한국외국어대 영어과에 진학했고 부전공으로 경영학을 선택했다는 것. 대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그의 봉사활동은 멈추질 않았다. 봉사활동뿐만이 아니라 대학시절 동안 영어와 경영학을 열심히 공부해 전공은 경영학, 특기는 통역이라고 말하곤 했다는 것.
한편 문 후보는 소아마비를 앓던 누이동생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책 속에서 피력했는데 초등학교 시절엔 항상 동생의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동생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고 한다.
무소속 이회창 후보는 학창시절 온순하고 조용한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의협심이 불타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의 자서전 <아름다운 원칙>(문예당)을 보면 이 후보가 고3 시절 친구와 함께 서울 보수동 길을 걷고 있다가 불량배와 싸움을 한 이야기가 나온다. 길을 걷던 중 세 명의 불량배가 두 명의 남녀 대학생에게 시비를 거는 모습을 발견한 것.
그는 불의를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는데 당시 불량배가 많은 거리라서 ‘이곳에서 싸우면 불리하겠구나’라는 생각에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대청동 사거리 부근까지 쫓아온 불량배와 결국 3 대 2의 싸움질이 벌어졌다. 치열한 난투극 끝에 그의 코뼈가 두 동강으로 부러졌다. 이 후보는 당시 부러진 코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둬 코뼈가 조금씩 엉겨 붙는 바람에 나이 들면서 고생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학창시절 그는 키가 작은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권투와 당수를 배운 적도 있었다.
이 후보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중학교로 월반을 하는 등 수재의 모습을 보였지만 중학교 시절엔 수학시험을 망쳐 자신감을 상실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느 날 가출을 결심한다. ‘내 능력으로 부모님의 기대를 따라갈 수도 없다. 서울에 가서 혼자 돈을 벌어 고학이라도 하면서 최선을 다해봐야겠다’라고 생각한 것. 이 후보는 당시 추운 한겨울에 가출해 조치원역에서 잠깐 시간을 보내면서 세상의 차가움을 느꼈다고 말한다.
한편 이 후보의 아버지는 해방 직후 검사로 일하다가 1950년 이 후보가 중학생이었을 때 ‘남로당원 혐의자를 풀어줬다’는 혐의로 구속되는 사건을 겪기도 했다. 아버지는 이후 명예를 되찾아 검사로 복직됐으나 당시의 고통어린 기억에 대해 이 후보는 “평탄했던 한 가족의 삶이 갑자기 우그러지며 모든 일들이 막막해졌다”고 떠올리고 있다. 이어 6·25전쟁 와중에 이 후보는 17세의 나이로 잠시 첫 직장 생활을 한다. 부산피란 시절 체신청 5급 20호봉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일곱 식구를 먹여 살렸던 것이다.
이윤구 기자 trus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