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5] 공간에 가치를 부여한 기록유산이자 예술
2016년 5월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 중인 편액 550점이 ‘유네스코 아태 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위는 도산서원, 아래는 겸암정(왼쪽)과 송백강릉 편액. 사진제공=한국국학진흥원
사전적 의미로 편액(扁額)이란 ‘종이, 비단, 나무 따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방 안이나 문 위에 걸어 놓는 액자’를 뜻한다. 한자 편(扁) 자에는 ‘제목을 붙인다’는 의미가, 액(額) 자에는 ‘이마’라는 뜻이 담겼으니,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건물이나 방의 이마쯤에 써 놓는 제목’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국보 1호 숭례문에 걸린 현판, 율곡 이이가 태어난 강릉 오죽헌의 현판 등을 연상하면 될 듯하다. 예컨대 자신의 서재 문 위에 ‘독서당’이란 방 이름을 써붙여 놓는다면 이 또한 현대식 편액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중에게는 다소 생소한 명칭이지만, 편액은 오래전부터 사용돼 온 우리 민족의 정신과 문화가 깃든 기록물이자 예술품이다. 2016년 5월에는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 중인 편액 550점이 ‘한국의 편액’이라는 이름으로 국내 최초로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아태)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바 있다.
한산 이씨 이상정 종손가의 편액인 ‘폐려’.
편액은 한마디로 해당 공간의 성격, 의미 등을 알려주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편액에 새겨진 글자는 대개 3~5자 정도인데, 여기에는 편액이 걸린 건물(공간)의 기능과 의미, 혹은 건물의 주인이 지향하는 가치관이 함축되어 녹아 있다. 또한 편액의 글씨는 당대의 국왕, 명필, 문인·학자들이 남긴 것으로, 필적 안에 제작 당시의 시대정신과 가치관, 서예가의 예술혼이 담겨 있다. 조선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의 편액은 명종 임금이 친히 써서 하사한 것이기도 하다. 조선의 편액은 유학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선비정신과 글씨의 예술적 가치가 동시에 내재된 기록물이자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아태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의 편액들은 건물의 건축 목적에 따라 주거 공간(137점), 추모 공간(64점), 교육 공간(231점), 수양 공간(118점)으로 구분된다. 주거 공간의 편액은 선현의 정신적 가치를 담고 있으며, 추모 공간의 경우엔 선현의 학덕을 추모, 존경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교육 공간의 편액에는 조상과 선현의 교육 이념이 담겨 있고, 수양 공간 편액의 경우 대체로 유유자적하는 선비들의 여유와 풍류의 의미를 담은 글이 새겨져 있다.
한 예로 한산 이씨 이상정 종손가에 게시된 주거공간의 편액에는 ‘弊廬’(폐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누추한 집’이라는 의미로 자신의 거처를 낮추어 부르는 겸양의 미덕을 보여준다. ‘梅心舍’(매심사)라고 쓰여진 편액의 경우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데, ‘매화의 마음을 지닌 선비의 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안쪽에 걸려 있는 무망루(無忘樓)라는 현판처럼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삼은 편액도 있다. 여기에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 임금이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식을 가진 일을 잊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편액은 제작 당시부터 외부와 노출된 공간에 전시되어 있어 언제나 도난과 훼손, 화재 등의 위험성이 상존하고 있다. 제작된 지 오래돼 더 이상 게시할 수 없는 편액도 있고, 이미 건물이 사라져 더 이상 게시될 수 없는 편액들도 있다. 아태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편액들 중에는 부분적인 훼손이 진행된 것도 있으나 대부분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된 이후 안정화 작업을 거쳐 수장고에 보존되고 있다.
각각의 편액은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본이다. 같은 글씨도 없으며, 더 이상 생산될 수도 없어 훼손되면 영원히 사라질 수밖에 없는 기록물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편액이 재조명되고 편액에 대한 보존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뒤늦은 감이 있으나 분명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만 한 가지, 실생활에서 살아 숨 쉬던 전통문화인 편액이 이제는 역사의 유물로만 남겨진다는 사실이 씁쓸하기만 하다. 차츰 잊히고 있는 편액을 이 시대에 되살려보는 방법은 혹시 없을까. 새해에는 집이나 사무실, 나만의 공간에 아담한 편액을 하나 걸어보는 것이 어떨까. 작더라도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의미 있는 편액을 거실이나 방문 위에 걸어둔다면 새해의 첫 출발을 좀 더 산뜻하게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자료협조=유네스코한국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