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이 승리하길…’ 이명박·박근혜 정부 10년간 4명이나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정원 스님 빈소.
“농담인 줄로만 알았다. 살다 보면 누구든 ‘죽고 싶다’는 말을 한 번씩은 하지 않나. 같이 활동하는 이들과 평소 이야기하면서 소신공양에 대한 결심은 보여 오셨지만, 실제로 불태우실 줄은 몰랐다. 이틀 동안 경황이 없었고, 황망한 마음뿐이다. 정원 스님의 유지를 어떻게 계승해나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지난 11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정원 스님 빈소에서 만난 백도영 정원스님분신항거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정원 스님이 평소 주변인들에게 소신공양의 결심을 밝혀왔다고 전했다.
자주평화통일실천연대 산하 불교위원회에서 정원 스님과 각종 사회활동을 함께한 백 위원장은 “스님은 박근혜 대통령 대선 부정을 비롯해 사드 배치 반대, 세월호 참사 규명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셨다. 그날(7일)은 촛불집회가 끝나고 사람들이 귀가하던 때에 이전부터 결심하신 소신공양을 하셨다. 사람들과 만나며 스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49재를 광화문 광장에서 지낼 예정”이라고 말했다.
정원 스님은 1977년 해인사로 출가해 1990년대부터 특정 종단이나 사찰에 속하지 않고 각종 사회활동에 다수 참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 광주사태 저항운동을 시작으로 1987년 6월 항쟁, 2006년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이전 반대, 2008년 광우병 수입 소고기 반대 투쟁, 2014년 세월호 사건 진상규명 등이 대표적이다.
개인 SNS와 일기형식으로 쓰인 유서에는 소신공양 이유에 대해 언급돼 있다. 그는 분신을 앞둔 지난 6일 페이스북에 “문수 스님 이남종 열사는 죽음이 아니라 가장 강한 저항이었다” “이보시오 촛불님네 내간다고 서러마라…이제 나는 그들 악행 징치하러 떠나노니 잡지마오 슬퍼마오…” 등의 글을 게재했다.
일기형식 유서에는 “소신공양으로 장기기증 못 함이 아쉽다” “나는 나를 해체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갈 뿐이다” “소신공양으로 매국노 집단이 일어나는 기회를 끊고 촛불 시민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함”이라는 글귀가 날짜별로 적혀 있었다. 분신 당일 현장에서는 “박근혜는 내란 사범, 한일협정 매국질. 즉각 손 떼고 물러나라”라고 적힌 쪽지가 발견되기도 했다.
정원 스님이 소신공양 전 일기형식으로 남긴 유서.
빈소에는 행복사에서 정원 스님과 1년 남짓을 함께 했다는 보혜 스님(47)과 신도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시민들이 상주를 자처해 조문객을 맞기도 했다. 공동 상주를 맡았다던 한 남성은 “정원 스님을 알지 못했으나 기사를 보고 큰 뜻을 펼치신 것을 알게 돼 참여하게 됐다. 오늘 오전 11시 빈소가 마련될 때 도착해 지금까지(오후 6시) 상주를 하고 있다. 대략 30~40명의 집회 참가자들이 빈소를 지키고 있다”고 전했다.
정원 스님은 개인적으로 활동하다 1년 전부터 충무로에 위치한 행복사에 소속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지난해 7월 행복사 홈페이지에 ‘방랑자’를 뜻하는 영문 아이디로 가입 인사를 남긴 바 있으며, 같은 시기 행복사 축원기도를 진행한 모습 또한 유튜브 영상을 통해 남겨져 있다.
또한 그는 지난 2010년 5월 4대강 개발사업 중지를 촉구하며 낙동강변에서 소신공양한 문수 스님과 지보사에서 함께 지내기도 했다. 문수 스님은 “이명박 정권은 4대강 공사를 즉각 중지·폐기하라. 이명박 정권은 부정부패를 척결하라. 재벌과 부자가 아닌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소신공양했다.
문수 스님은 평소 묵묵히 수행에만 전념했던 것으로 알려져 일반에 더 큰 충격을 안기기도 했다. 주변인들은 “스님이 수행에만 전념해 말이 없었지만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관심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소신공양 전날 문수 스님과 대화를 나눈 지보사 총무 견월 스님은 당시 정부의 4대강 사업에 대한 그의 격앙된 감정과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에 대한 우려를 전해 들은 것으로 알려졌다.
문수 스님의 입적에 사회 각계각층은 애도 및 정부 비판 성명을 연이어 내놓고 4대강 사업의 즉각적 중단을 요구했다. 불교계는 성명을 통해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4대강 사업을 중장비로 앞세워 밀어붙이던 이명박 정권이 강과 생명을 죽음으로 내몰다 못해 기어코 출가수행자를 죽음으로 내몰고 말았다”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의 소신공양은 4대강 사업 반대운동에 기폭제가 됐으며, 그해 6월 2일 지방선거에서는 여권이 참패해 정부·여당에 대한 민심이반이 표면화되기도 했다.
서울역 앞 고가도로 위에서 분신해 숨진 이남종 씨의 영결식에는 수많은 추모객이 몰렸다.
2013년 12월 31일에는 이남종 씨(당시 40세)가 서울역 고가에서 ‘박근혜 사퇴’ ‘특검 실시’라는 현수막을 걸고 쇠사슬로 몸을 묶어 분신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분신 직후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하루 만에 사망했다.
이 씨가 숨진 장소에서 발견된 타다 만 다이어리에는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안부를 묻기 힘든 상황입니다. 박근혜 정부는 총칼없이 이룬 자유 민주주의를 전복한 쿠데타 정부입니다. 공권력의 대선개입을 책임져야 할 분은 박근혜 대통령입니다. 이상득, 최시중처럼 눈물 찔끔 흘리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던 그 양심이 박근혜 대통령의 원칙이 아니길 바랍니다” “보이지 않으나 체감하는 공포와 결핍은 가져가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두려움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일어나십시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그가 남긴 여러 장의 유서를 통해 국정원 대선개입 특검을 요구하며 분신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나, 경찰이 분신 이유를 생활고와 신병비관으로 몰고 갔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이 씨는 광주 출신으로 택시 운전을 하며 검찰 공무원과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으나 실패하고, 숨지기 전까지 편의점 매니저로 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씨가 사망하자 서울역 광장에서는 민주시민장 영결식이 치러져 2000여 명의 시민이 추모했으며, 2012년 국정원 선거 개입과 이 씨의 분신을 다룬 다큐멘터리 <메멘토모리>가 제작되기도 했다.
이 씨가 사망한 한 달 뒤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김 아무개 씨(50)도 박근혜 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을 시도했다. 그는 이 씨와 같은 장소에서 ‘관권개입 부정선거’ ‘이명박을 구속하고’ ‘박근혜는 퇴진하라’는 현수막 3장을 걸고 분신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김 씨는 외국계 회사에서 근무했으며 2008년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를 계기로 시민사회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분신 미수 이후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및 일반물건방화 등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