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공천이 5년 후 좌우 ‘끄~~응’
▲ 이명박 당선인과 박근혜 전 대표가 지난 12월 29일 대선 후 첫 회동을 가졌다. 국회사진기자단 | ||
이명박 당선인 측은 국정 운영의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총선 압승이 필수라고 보고 대대적인 물갈이를 단행할 태세다. 여기에는 그동안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했던 친박 계파들의 ‘정리’가 핵심요소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표는 이번 공천 때 자파 의원들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차기 대권 쟁취도 물 건너간다는 위기의식 때문에 탈당 등의 강공책을 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명분 없는 탈당이 자파의 몰락을 부를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공천 갈등을 두고 벌어지는 ‘박의 전쟁’은 과연 어떤 결말로 끝이 날까.
요즘 한나라당에서 박근혜 전 대표만큼 절박한 정치인은 없다. 그는 지난 12월 29일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을 대선 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례적인 상황을 연출했다. 웬만해선 언론에 공개적으로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그였지만 이날만큼은 작심을 한 듯 ‘비공개로 진행하자’는 임태희 비서실장의 요구를 들은 체 만 체하며 자신의 요구사항을 ‘하나, 둘’씩 열거하기 시작했다. 물론 첫 번째 요구는 공천과 관련된 것이었다.
사실 박 전 대표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기자들을 물리친 뒤 ‘조용히’ 얘기하는 스타일이지만 이날만은 ‘내가 할 말은 하고 있다’는 것을 친박 그룹들에게 각인이라도 시키듯이 이 당선인을 압박했다. 박 전 대표의 이런 절박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먼저 박 전 대표가 자파의 생존과 관련해 친박그룹을 달래는 데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등이 떠밀려’ 이 당선인을 공개적으로 밀어붙였다는 해석이 있다. 한나라당의 한 친박 그룹 관계자는 “지난 대선 기간 동안 박 전 대표는 일부 강경 친박그룹으로부터 매우 시달린 것으로 안다. ‘BBK 의혹이 있는 이 당선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면 안 된다’, ‘이명박 후보를 절대 믿어선 안 된다. 단물 쓴물 다 빨아먹고 결국 뱉어 버릴 것이다’라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대선 때 이 후보를 도와줘 봤자 돌아오는 것은 ‘팽’이기 때문에 일찌감치 갈라서야 한다’며 박 전 대표를 몰아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원칙을 강조하는 박 전 대표로서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는 정권교체라는 한나라당의 대의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달랠 수 있었지만 이번 총선 공천은 상황이 다르다. 공천은 곧 자파의 생존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박 전 대표가 어물쩍거리면 그들은 아주 냉정하게 등을 돌릴 수도 있다.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사실 박 전 대표를 지지하는 ‘골수’ 지지자들은 박 전 대표의 ‘스탠스’에 불만이 많다.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명박 당선인이 한나라당의 숙원이었던 정권교체를 이루긴 했지만 그 ‘주체’는 그동안 말없이 당을 지지했던 열혈 당원들의 힘 때문이다. 10년 야당생활 하며 고생한 분들 때문에 정권교체가 이뤄진 것인데 중간에 나타난 이 당선인은 그런 고생을 잘 모른다. 그 어려운 탄핵 사태를 뚫고 지난 2004년 총선에서 예상 의석의 2배 이상 가까이 얻어낸 박 전 대표의 공을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이번 공천에서도 당연히 그 대가를 요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박 전 대표 자신도 상당히 절박한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박 전 대표는 이명박 당선인을 만난 뒤 이규택 의원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해 “여러분들이 공천을 걱정하고 있는 것 다 안다. 하지만 내가 더 걱정을 많이 하고 있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를 두고 박 전 대표 쪽의 한 인사는 “이번 총선에서 자파 세력을 한 명이라도 더 살려내지 않으면 5년 뒤엔 당내 경선에도 나갈 수 없는 처지가 될 거라는 데 박 전 대표도 공감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자파 세력들이 공천을 원하는 만큼 자신도 이번만큼은 차기 대권 경쟁을 앞두고 확실한 교두보를 구축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공천 갈등은 박 전 대표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건 일생일대의 대회전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박 전 대표가 이명박 정부 하에서도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일종의 ‘승부수’를 던졌다는 것이다. 현재 한나라당에는 정몽준 이재오 의원, 김문수 경기도지사, 오세훈 서울시장 등 차기 대권 주자들이 즐비하다. 만약 그가 이번 총선에서 자파 의원들을 많이 확보하지 못할 경우 그동안 누렸던 전임 대표로서의 프리미엄을 날리는 것은 물론 차기 대권 주자들과의 경쟁에서도 밀릴 수 있다. 최근 박 전 대표가 자신의 정치적 터전인 대구를 방문해 “승자가 하면 다 법이냐” “피해망상” 등의 거친 단어를 이례적으로 사용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현재 박 전 대표의 손에는 두 개의 카드가 쥐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박 전 대표가 자신의 곤궁한 처지를 비관만 할 것이 아니라 한나라당을 전격 탈당한 뒤 이회창 전 총재와 합류하든지, 아니면 거침없이 신당 창당을 선언하는 등의 벼랑 끝 전술을 택할 가능성이 있다. 두 번째 카드는 ‘중대결심설’ 등을 흘리며 자파의 공천을 최대한 많이 획득하는 실리전술이 있다.
먼저 정치권에선 박 전 대표가 탈당 등의 벼랑 끝 전술을 감행할 경우의 수는 낮게 보고 있다. 유승민 의원이 최근 공개적으로 “(최근의 공천 갈등과 관련해) 우리 쪽은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 없다는 생각은 있다”면서 ‘집단행동’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지만 압박의 강도가 그리 세지 않다. 또한 박 전 대표 쪽의 한 측근도 “우리가 주인인데 왜 나가느냐”라고 말한다.
정치적 원칙을 중요시하는 박 전 대표로서도 탈당 카드는 너무 위험하고 명분이 없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당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박 전 대표가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탈당은 자살골과 마찬가지다. 보수세력 분열의 장본인이라는 꼬리표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지지기반인 보수세력을 대변하는 최대 정당이 한나라당이란 점을 생각하면 그에 맞서는 대선 행보는 그만큼 위험한 길이 될 것”이라고 분석한다. 지난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전 총재와 맞서며 탈당을 했다가 ‘백기투항’을 한 전력이 있는 박 전 대표이기에 두 번의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란 게 중론이다.
▲ 지난 1일 이명박 당선인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한나라당 신년인사회. 국회사진기자단 | ||
그렇지 않으면 이 당선인 측이 정권 초기 안정 기조를 내세우며 박 전 대표에게 일정한 지분을 양보하는 식의 타협책을 제시할 경우도 있다. 여기에 박 전 대표가 이 당선자와 적절한 세력 분점에 동의한다면 한나라당의 공천 전쟁은 큰 갈등 없이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박 전 대표가 탈당 등의 최악의 상황은 피하면서 이 당선인 측과 타협을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여기에 박 전 대표의 딜레마가 숨어 있다. 박 전 대표는 이미 지난 대선 과정에서 “(박 전 대표가 이명박 후보를 여전히 지원하는 것을 두고) 자신의 대권욕 때문에 계보 사람들의 미래를 못 본 체하고 있다. 자신만 살겠다는 것 아닌가. 우리는 다 죽고 자신만 살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는 거친 불만의 목소리도 들어야 했다.
박 전 대표가 공천 전쟁에서 이 당선인과 적당한 타협을 한다면 자신은 살겠지만 계보 죽이기에 동조했다는 비판과 함께 세력의 위축도 감수해야 한다. 박 전 대표는 친박 의원들이 대부분 탈당 등으로 당에서 떠밀려난다고 해도 자신은 당에 남아 훗날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총선에서 ‘박근혜 브랜드’로 압승을 거둔다면 이명박 대세론을 박근혜 대세론으로 전환시키며 상황을 급반전시킬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 박 전 대표는 자신의 수족과 같은 친박 의원들을 스스로 잘라야만 하는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렇다고 친박 그룹과 함께 전격 탈당을 감행하기에도 위험이 따른다. 박 전 대표가 한나라당을 떠나 이회창 전 총재와 연대한다면 자신의 계보 사람들이 공천권이야 모두 따겠지만 당선 보장이 불확실해 정치적으로 소멸할 가능성이 있고, 그 자신도 ‘철새 정치인’이라는 오명을 받아야 한다. 물론 이 전 총재 측이 박근혜 전 대표가 자신들에게 올 경우 60~70석을 획득할 것이라며 유혹을 하고 있지만 지난 2000년 총선 때 민국당의 몰락을 보듯이 명분 없는 탈당은 정치적 사망에 이를 것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많다.
이제 ‘박의 전쟁’은 냉엄한 심판대에 올랐다. 이 당선인과의 타협은 계파의 축소를 의미하고, 탈당은 그 동안 쌓아온 ‘박근혜 브랜드’를 오명으로 물들게 하는 위험한 카드다. 이 당선인의 중국특사 제안은 받아들였지만 공천문제는 풀린 게 없다. 박 전 대표는 과연 어떤 솔로몬의 지혜를 내놓게 될까.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