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면기왕이 안내한 바둑 신세계…한계 너머의 묘수를 보았다
타이젬과 한큐바둑 등 온라인에 나타난 알파고를 잡기 위해 박정환 9단과 커제 9단을 위시해 수많은 세계적 프로 기사들이 번갈아 나섰지만 그 누구도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60전 전패’라는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들고 말았다. 세계 최강을 다툰다는 박정환은 5전 전패, 커제는 3전 전패를 기록했다.
알파고를 만든 구글 자회사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 최고경영자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알파고의 새 버전을 시험하기 위해 최근 온라인 바둑 경기를 했다며, 마스터 및 마기스테르와 비공식 대국을 했던 이들에게 감사한다고 밝혔다.
인터넷바둑 사이트에 나타난 알파고. 알파고는 중국 구리 9단과의 마지막 대국에서 승리하며 60전 전승이라는 어메이징한 기록을 남겼다.
바둑계는 이번 알파고의 재등장에 대해 이론의 여지가 없는 ‘압승’이라고 평가한다.
조한승 9단은 “나도 60번의 대국 중 한번의 기회를 얻었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60번의 대결을 모두 분석한 결과 단 한번도 인간이 좋았던 적은 없었다. 반집승부가 두 번 있긴 했지만 그건 알파고가 유리하다고 보고 최대한 안전운행 한 결과이기에 의미를 둘 수 없다”고 평가했다.
가장 많은 대국 기회를 가진 박정환 9단 역시 같은 의견이었다. “작년 이세돌 9단과의 대국에서는 가끔 이상한 수도 등장했었는데 이번에는 초읽기에 몰렸음에도 전혀 실수가 없었다. 알파고와 정식으로 대결한다면 지금보다 시간이 많더라도 내가 선(先 : 덤 없이 흑으로 두는 것. 프로의대결에서는 무조건 덤이 있는 호선 대국이 일반적이다)으로 두면 좋은 승부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박영훈 9단 역시 “초반 80여 수까지 실수 없이 바둑을 두었는데 형세 판단을 해보니 집으로 밀려 있었다. 두터움이란 추상적인 개념까지도 정확하게 집으로 포착하고 분류해내니 이제는 인간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인 것 같다”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구글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 최고 경영자는 최근 인터넷 바둑사이트를 뜨겁게 달궜던 ‘마스터’와 ‘마기스테르’는 알파고라고 밝혀 바둑계에 충격을 줬다.
알파고의 파죽지세 질주에 김진호 서울과학종합대학원 빅데이터 MBA학과 주임교수는 “지난해 3월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게 1승이라도 건진 것은 구글 딥마인드가 일부러 져 주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현재 업그레이드된 알파고의 수준은 이미 프로기사보다 6점 정도 기력이 높다. 세계 최고의 기사라도 알파고에게 승리할 가능성은 없다”고 말해 바둑계에 논란을 일으켰다.
김 교수의 이러한 발언을 두고 바둑계는 갑론을박을 벌였다. 일단 대다수 전문가들은 “김 교수가 빅데이터 전문가일진 모르겠지만 바둑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면서 불쾌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당장은 6점 차이가 아닐지 모르겠으나 무궁무진한 바둑의 수에 비춰볼 때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입장을 피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알파고와 대결을 펼쳤던 이세돌 9단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이 9단은 최근 인터뷰에서 새로운 알파고를 이렇게 분석했다. “2016년 3월에 대국했던 알파고는 초읽기 상황일 때 다소 불안해 보였으나 지금은 이 부분이 완벽히 보완된 것으로 보인다. 초일류 프로기사라도 알파고와 동일한 조건에서 대국을 벌인다면 승산이 없다. 알파고는 기계이므로 실수가 나오지 않는 반면, 인간은 초읽기에 몰리면 실수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알파고는 기본시간 없이 곧장 초읽기, 프로기사에게는 2~3시간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시합한다면 인간이 5판 중 1판은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렇다면 새로워진 알파고는 어떤 모습일까. 공개된 알파고의 수법은 빙산의 일각이겠지만 프로 바둑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알파고의 수법 몇 가지를 소개한다.
1도. 커제 vs 알파고
<1도> 수순이 길지만 백1의 갈라침에 주목해주기 바란다. 백1은 흔히 ‘상대 진영 깨기에만 급급한 초보자들의 성급한 침입’이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이었다. 왜냐하면 흑2 이하 8까지 사석을 활용해 외곽을 둘러싸는 게 흑이 기분 좋은 수순이기 때문. 그러나 알파고는 그러한 인간들의 상식을 태연히 외면한다. 백13까지 일단 챙길 것은 챙긴 후 흑의 공격은 견디겠다고 버틴다. 막상 백23까지 되고 나니 얼추 수습이 된 모양. 그렇다면 이건 흑이 실속 없는 결과다.
2도. 박정환 vs 알파고
<2도> 우상은 흑의 신수로 인해 탄생한 형태. 포인트는 1부터 시작된 흑의 2선을 기는 형태다. ‘초반의 2선은 패망선’이라는 바둑격언이 있지만 흑을 든 알파고는 신경 쓰지 않는다. 흑19까지 당시 대부분의 프로는 ‘흑이 망했다’고 말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박정환은 “백20이라는 과수(상식적으로는 A가 정수다)를 들고 나올 수밖에 없을 정도로 백이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우변 백 일단이 세력의 형태가 아니라 곤마로 보인다는 점이 뼈아팠다”고 당시 심정을 토로했다. 알파고는 과연 어느 시점에서 백을 공격하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일까. 실제 이 바둑은 종반 우변 백이 패에 걸리면서 돌을 거두고 만다.
3도. 김지석 vs 알파고
<3도> 흑3은 ‘일찍이 없었던 솔직담백한 수’라는 평가를 들은 수. 물론 알파고가 흑이다. 백2 때 흑3을 예상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4도> 알파고의 자유자재 수법은 즉각 프로기사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한종진 9단(흑)과 김성룡 9단간의 맥심커피배 24강전. 흑1에 당사자인 김성룡 9단은 물론이고 해설자, 진행자, 시청자 모두가 깜짝 놀랐다. 계속해서 흑9 다음 17까지. 듣도보도 못한 수법이 반상에 연출된 것이다. 결과는 비록 한종진 9단이 패했지만 이런 식으로도 둘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일국이었다.
4도. 한종진 vs 김성룡
알파고의 무적행진에 바둑이 위기라는 견해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국내 정상급 기사들은 긍정적인 측면이 오히려 더 크다고 판단하고 있다. 지금까지 톱 기사들은 바둑의 기술적 측면에서 일종의 한계치에 직면한 상황이었지만, 알파고를 통해 새로운 바둑세계의 탐험이 가능해졌다는 것. 과연 알파고 시대의 바둑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지 궁금하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