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빨 빠진 호랑이들 영토싸움 지겨워
▲ 4월 총선을 앞두고 대통합신당과 민주당의 재통합 논의가 물밑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사진은 대통합신당 17대 대통령 선대위 해단식 모습(위)과 대선 당시 통합 결렬에 대해 비난하는 집회를 가졌던 민주당. | ||
범여권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정계개편 움직임은 신당과 민주당이 주도하고 있다. 양당 모두 대선 완패에 따른 극심한 후유증을 겪고 있는 데다 여전히 지지율은 바닥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만큼 재통합 카드로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고 있는 형국이다.
양측 지도부는 그동안 비공식 접촉을 통해 재통합 필요성에 교감을 나눠온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실패한 설익은 통합 협상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상호 반성에도 동조했다는 후문이다. 실제로 박상천 민주당 대표는 “어느 정도 교감이 있었다”고 시인했고 손학규 신당 대표도 “그동안 통합을 위해 진지한 노력을 계속해왔다”며 교감설을 시사한 바 있다.
박 대표가 22일 신당 측에 재통합을 공식 제안하자 신당이 즉각 환영의 뜻을 전한 것도 사전 교감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박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가진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대통령 권력과 지방 권력을 장악한 한나라당이 국회 권력까지 장악하면 무소불위의 일당 독주와 민주주의 위기 상황이 조성될 것”이라며 민주당과 대통합신당 간의 재통합론에 불을 지폈다. 그는 또 “야권이 분열된 지금의 정당구도로 총선이 치러진다면 차기 집권당인 한나라당은 개헌선을 넘는 국회의석을 확보할 것”이라며 “통합은 설 이전에 마무리돼야 한다”고 밝혀 통합 시점을 언급하기도 했다.
신당 측은 즉각 환영의 뜻을 전했다. 광주·전남지역 방문 도중 재통합 제안 소식을 접한 손 대표는 이 지역 기자간담회에서 “양당 통합은 국민, 민주개혁세력의 여망이라고 생각한다. 그 여망을 받들겠다”고 화답했다.
양측은 협상의 효율성 제고와 기간 단축을 위해 따로 협상단을 구성하지 않고 양당 사무총장 선에서 협의를 진행시키기로 합의했다. 이에 대해 신계륜 신당 사무총장은 24일 “국민이 바라는 방향으로 갈 수만 있다면 통합 시기는 빠를수록 좋다”며 “조용하면서도 자기를 희생하는 예쁘게 통합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친노그룹의 대표주자인 이해찬·유시민 의원의 탈당으로 통합 걸림돌 중 하나였던 ‘친노’ 색깔이 다소 퇴색됐고 손 대표가 표방하고 있는 ‘실용주의’ 노선이 민주당의 정체성과 크게 차이가 없다는 점은 재통합 가능성을 높여주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문제는 공천권 등 지분 다툼이다. 개인이나 정파 입장에선 어떻게든 공천권을 확보해 4월 총선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욕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양당 모두 기득권을 주장하고 있는 호남권 공천 지분은 통합 성패를 좌우하는 최대 난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차 합당이 무산된 결정적인 걸림돌도 결국 지분 문제였다.
신당은 파산위기에 처한 민주당이 현실을 직시해 큰 틀에서 양보하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반면 민주당은 돌아선 민심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현역들을 대거 물갈이하는 혁명적인 인적쇄신이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신당 내 호남권 의원들이 재통합 논의가 본격화되자 겉으로는 환영의 뜻을 표하면서도 내심 위기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도 대대적인 인적쇄신론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일부 호남권 의원들은 사석에서 “재통합이 뜻대로 안될 것”이라며 통합 무산을 은근히 바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통합 논의가 급물살을 탈 경우 인적쇄신론과 맞물려 호남권 의원들이 1차 물갈이 대상이 될 가능성에 힘이 실리고 있어 적잖은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신당을 포함한 범여권 일각에서는 제3지대 신당 창당을 추진하고 있다. 신당 송영길 이종걸 의원, 창조한국당 정범구 최고위원, 한화갑 장성민 김성호 박인상 전 의원 등 옛 민주당 출신 전·현직 의원들이 제3지대에서 별도의 모임을 구성하고 민주개혁진영 통합론을 모색하고 있다. 이들은 23일 회동을 갖고 가칭 ‘새물결’ 모임을 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성민 전 의원은 최근 모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정파를 떠나 민주개혁진영의 복원을 위해 제3지대에서 지평을 넓혀 나가자는데 공감을 이뤘다”며 “제3지대 창당론으로 갈지, 민주개혁진영 대통합론으로 갈지에 대해선 아직 입장정리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새물결 모임에는 정장선 김태홍 신당 의원 등 범여권 소장파 의원들 다수가 참여를 타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세력화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특히 이 모임 구성원들은 신당과 민주당 간의 재통합 문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어 범여권 세력재편을 촉발시키는 뇌관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손 대표가 추구하고 있는 ‘새로운 진보’ 및 ‘탈이념 실용주의’를 둘러싼 당내 노선 갈등도 범여권 세력재편을 촉발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당내 각 계파 초선 의원 12명은 24일 성명을 통해 “어떠한 이념적 대립을 초월해 잘못된 과거에 대한 반성과 국민 피부에 와 닿는 체질개선으로 새로운 진보세력의 구심점으로 거듭나야 한다”며 손 대표의 노선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이들 초선들은 “당내 소모적인 이념적 갈등을 단호히 거부한다”며 “새로운 진보란 낡은 이념에 대한 교조적 추종을 거부하고 국민의 생활 속에서 진보를 구현하는 생활밀착형 정치”라고 강조하며 손 대표에게 힘을 실어줬다.
반면 수도권 지역 일부 초선의원들로 구성된 ‘쇄신모임’은 신당이 정책적으로 선명하고 정치적으로 강력한 야당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보다 분명한 정체성 재정립이 이뤄져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이들은 손 대표의 한미 자유무역협정 조기 비준 입장을 비판하고 있고 당 지도부가 정부 조직개편안 등 인수위 활동에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것에 대해 경선을 통한 지도부 구성을 주장했던 염동연 의원은 “손 대표의 실용주의 노선이 자칫하면 ‘이명박 따라하기’로 귀착되는 게 아닌지 전통적 지지자들이 우려한다”며 손 대표 노선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이처럼 통합론과 제3지대 신당론이 불거지고 있는 와중에 신당내 노선 갈등이 가시화되는 등 범여권 세력재편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과 계보 의원들의 정치적 결단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선 패배 이후 한동안 정치적 행보를 자제해 왔던 정 전 장관은 얼마 전 인수위의 통일부 폐지 방침에 비판 성명을 내는가 하면 27일에는 당내 계보 인사들과 계룡산 등반에 나서는 등 심상치 않은 행보를 보이고 있다. 특히 27일 산행은 대선 이후 처음 갖은 대규모 행사로 계파 의원들을 비롯해 대선 당시 캠프에서 활동했던 참모그룹과 실무진, 각 지역 활동가 등 100여 명이 참석해 세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정 전 장관과 측근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정 전 장관의 이러한 행보는 정치재개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 성격이 짙다는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범여권 주변에서는 정 전 장관이 4월 총선에 직접 출마할 것이란 소문이 꽤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을 정도다. 일각에선 거주지인 서대문을과 상징적 의미가 있는 종로나 강남 등 서울 지역구 출마설도 끊이질 않고 있다.
정 전 장관은 설 연휴를 전후해 자신의 거취 문제를 언급할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정 전 장관이 어떤 정치적 선택을 할지 여부다. 정 전 장관의 결단은 자신의 총선 출마 여부는 물론 범여권 세력 재편 움직임과 맞물려 범여권 2차 빅뱅 내지는 정계개편을 촉발하는 뇌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신당과 민주당의 재통합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고 제3지대 신당론도 고개를 들고 있는 상황에서 신당 최대주주인 정 전 장관의 선택은 범여권 세력재편 저울추를 가늠하는 척도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 전 장관 측 일부 의원들 사이에서는 벌써부터 제3지대론이 거론되고 있다. 이 같은 기류는 손 대표 체제 이후 당 안팎에서 일고 있는 ‘정동영 배제론’ 내지는 ‘손학규-정동영 이별설’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일부 측근들은 손 대표가 새 지도부와 당직 인선 과정에서 정동영계를 철저하게 외면했고 향후 통합 작업이나 공천 과정에서도 정 전 장관에게 등을 돌릴 가능성이 높은 만큼 하루 빨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손 대표와 정 전 장관의 갈등이 깊어질 경우 정 전 장관이 계보 의원들을 이끌고 제3지대 신당 작업을 주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섣부른 관측을 내놓고 있다. 또 정 전 장관이 정치활동 재개를 전제로 신당 창당을 기치를 내걸 경우 손 대표 체제에 부정적인 정대철 고문과 김한길 염동연 의원 등 중진그룹 다수도 신당 대열에 합류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통합과 제3지대 신당론 등 범여권 세력재편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정 전 장관은 과연 어떤 승부수를 준비하고 있을까. 정 전 장관이 어떤 결정을 하든 그의 선택에 따라 범여권은 또다시 극심한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손 대표 역시 4월 총선에서 살아남고 대안 야당 대표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민주당과의 통합 등 마지막 승부 카드를 띄울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한 마리는 포기하고 나머지 한 마리를 사냥하는 데 총력전을 펼치는 게 낫다는 판단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정 장관이든 민주당이든 어느 쪽을 선택하든 손 대표가 구상하고 있는 통합작업 및 세력재편 과정은 피 말리는 대혈투장이 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