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6] 왕의 비밀 담긴 세계 최대의 단일 왕조 역사서
‘승정원일기’는 카메라 대신 글로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담아낸 다큐멘터리다. 사진제공=규장각한국학연구원
승정원이란 왕의 명령(왕명)을 전달하거나 신하들이 왕에게 올리는 글을 위에 전하는 일 등을 맡았던 국왕의 비서기관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대통령 비서실에 해당된다. 사극에서 왕이 명을 내릴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도승지가 승정원의 으뜸 벼슬이라고 할 수 있다. 승정원은 왕명의 전달 이외에 중요한 또 하나의 임무를 맡았는데, 그것이 바로 국왕의 일상을 날마다 일기로 작성하는 일이었다. 국왕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면서 이들 방대한 기록을 담당한 사람은 승지(承旨)와 정칠품 관리인 주서(注書)였다. 승정원은 시대에 따라 승추원, 승선원 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일기의 이름도 달라졌지만, 이를 통틀어 하나의 기록유산으로 간주해 <승정원일기>라고 부른다.
<승정원일기>는 조선 왕조에 관한 방대한 규모의 사실적 역사기록과 국가 비밀을 담고 있는 세계 최대의 단일 왕조 역사서라 할 수 있다. 원래 조선 개국 초부터 일기가 기록됐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인조 대부터 순종 대에 이르는 288여 년간의 일기(3243책)만이 현존한다.
<승정원일기>는 사실적 기록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이 왕의 사후에 여러 기록을 종합해 왕의 행적을 정리한 것이라면, <승정원일기>는 왕의 생전에 일어난 모든 일을 따라다니며 그대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왕이 어디에 머물렀는지, 신하들과 무엇을 논의했는지, 누가 어떤 내용의 상소를 올렸고 이에 대한 왕의 전교(명령)는 무엇인지 등이 일기에 상세히 담겨 있다. 한마디로 카메라 대신 글로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담아 낸 다큐멘터리인 셈이다.
이쯤에서 1623년 반정으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인조 1년의 <승정원일기>를 한번 살펴보자. 당시 폐위된 광해군은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었는데, 얼마 뒤 광해군의 아들인 폐세자(폐동궁) 이질이 땅굴을 파고 탈출을 시도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질의 처단을 요청하는 상소가 빗발치던 그 해 5월 26일 일기의 한 대목이다.
“신하들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폐동궁에 대해 매우 지극할 정도로 곡진하게 살려 주었는데, 폐동궁은 은혜를 저버리고 살려고 도망하여 스스로 하늘과의 관계를 끊었으니… 삼가 바라건대 의(義)로써 처단하시어 힘써 묘당의 의논을 따르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질이 굴을 뚫은 것은 그 고생을 감내하지 못한 소치이니 무슨 죄과가 있겠는가. 그 사정을 생각하니 어찌 가련하지 않은가. 지난번에 폐조(廢朝)에서 골육(骨肉)의 변고가 없는 해가 거의 없었는데, 이것이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이와 같은 논의를 하지 말고 성명(性命)을 보전시킴으로써 나의 지극한 뜻을 어기지 말라’고 하였다.”
이후로도 한 달 가까이 이질의 처단을 요청하는 신하들의 주청은 계속되었다. 인조는 그때마다 이를 거부하였으나 마침내 “마지못해 따라 주겠다”는 말을 남기며 이를 윤허하게 된다(인조 1년 6월 21일 일기). 그로부터 엿새 후 이질이 목을 매어 자진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승정원일기>에 담긴 상세한 기록들은 역사 저 너머의 스토리텔링도 가능하게 만든다. 광해군은 폐위된 뒤에도 이례적으로 18년간 생존했는데, 이것도 어쩌면 인조가 사촌형제인 이질의 죽음에 두고두고 마음의 부담을 느꼈던 때문일지도 모른다.
<승정원일기>는 임금의 거처, 날씨, 하루의 언행 순으로 기록되었다. 한 예로 고종이 아관파천으로 정동에 있던 러시아 공관에 머물게 된 1년여 동안 일기는 “임금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렀다”는 대목으로 시작된다. 일기 속에는 어의들의 입진을 거절하고 신하들의 빗발치는 환궁 상소에 “알았다”고만 답하는 고종의 모습이 담겼는데, 누구도 믿을 수 없던 당시의 처지를 보여주는 듯해 아련한 마음마저 든다.
다른 한편으로 <승정원일기>는 기상학적으로도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매일 매일의 기후가 마치 기상학자가 관측한 것처럼 상세히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유성(流星)이 나타났고, 안개가 끼었다. 밤 1경에 유성(流星)이 하고성(河鼓星) 아래에서 나와서 남방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 같고 꼬리 길이가 서너 자 정도이며 적색이었다. 진시(辰時)에 안개가 끼었다.” (영조 3년, 1727년 9월 3일) “밤 5경(更)부터 23일 동틀 무렵까지 비가 내렸는데, 측우기의 수심이 3푼이었다.” (고종 32년, 1895년 9월 22일)
<승정원일기>는 후대의 임금들에게 요즘으로 치자면 통치를 위한 ‘매뉴얼’과도 같은 책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신하들 간에 의전과 법규, 과거사 등에 대한 논란과 시비가 빚어졌을 때, 임금이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살펴서 보고하라”고 명하는 대목이 자주 눈에 띈다. ‘중종실록’(중종 24년 6월 23일)을 보면 백성들이 가뭄 피해를 입자, 이에 대한 구황의 조처도 <승정원일기>를 참고하도록 지시하는 내용이 담겨 있기도 하다.
<승정원일기>는 이처럼 귀중한 역사기록이었지만, 조선 초에는 종이를 다루는 공장의 남녀들이 종이를 재생해 팔기 위해 일기를 훔치는 일도 잦았다. 대사헌이 상소를 올려 중벌로 다스리지 않으면 문서가 남아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정도였다(‘세조실록’ 세조 12년 11월 17일). 기록물이란 기록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보존하느냐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기록’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