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뱀 보호법 막자” vs “짓밟고 꽃뱀 취급”
지난 1월 ‘억울하게 성범죄자 되지 않는 법’이라는 네이버 카페에 올라온 게시글의 내용이다. 이 카페는 헌팅을 통해 만난 모르는 여성과의 원나잇, 전 여자친구와의 성관계 이후 성폭행 또는 성추행범으로 피소됐다는 자칭 피해 남성들이 법률 자문을 구하기 위해 가입하는 곳이다. 이들은 현행 성폭력 특례법만으로도 충분히 고통 받고 있는데 또 다시 여성에게 유리한 법안이 나와 남성이 가진 최소한의 방어권이 훼손됐다며 입을 모아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대법원 전경. 일요신문 DB
이들의 하소연은 지난해 12월 20일 더불어민주당 정춘숙 의원 등 11명이 발의한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의 일부 개정 법률안에 대한 것이다. 이 개정안의 핵심 내용은 성폭력 범죄의 재판 확정 전까지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의 무고 고소를 수사기관이나 사법기관이 조사나 수사, 심리, 재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일부 남성들이 강하게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이 바로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가해자에 대한 ‘무고’의 어떤 가능성도, 이와 관련한 의혹 제기도 인정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제까지의 성범죄 고소 사건에서 피해자에게 무고의 혐의가 인정됐던 것은 사건 발생 전후 피해자의 태도, 사건 발생 이전부터의 피해자와 가해자 간 관계, 성(性)과 관련한 피해자의 평판 등 사건과 피해자의 배경에 집중해 적용돼 왔다.
특히 피해자가 가해자와 연인 또는 내연 관계였거나 성폭력 또는 성매매 범죄와 관련한 동종 고소 기록 등이 있을 경우에 피해자가 오히려 무고죄로 역풍을 맞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이 법안에서는 이와 같은 피해자의 성 이력이 재판에 적용되는 것 역시 방지함을 골자로 하고 있다. 성폭력 가해자에 의한 피해자의 2차 피해를 방지함으로써 성폭력 피해자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현행법상 성범죄 사건에서 성관계 또는 신체적 접촉이 합의 하에 이뤄졌다는 것을 증명할 의무는 가해자에게 있는데, 사진 영상 등 객관적인 증거가 마련되지 않았다면 가해자가 자신의 무혐의를 밝히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법조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그런 가운데 성과 관련한 피해자에 대한 모든 정보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배제되고, 심지어 무고의 혐의가 포착되더라도 이에 대응할 수 없다는 부분을 두고 피의자들이 억울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한 형사소송 전문 변호사는 “이제까지 성범죄 피해자들은 그들의 성적 이력이나 성관계 이후 합의금을 요구한 정황이 발견될 경우 공개적으로 ‘꽃뱀’ 취급을 받아왔다. 단순히 자신이 피해를 본 것에 대한 배상을 요구했다는 것만으로도 돈을 노린 파렴치범이 돼 온 것”이라고 지적하며 “더욱이 재판 역사에 비춰보면 가해자나 수사기관, 법원이 오히려 피해자를 꽃뱀으로 취급하는 데에는 무고 가능성이 악용된 사례가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개정안은 그러한 2차 피해를 막는 데에 있어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2015년에는 절친한 친구의 아내를 성폭행하려다 미수에 그친 50대 남성이 재판 과정에서 “(피해여성이) 합의금을 목적으로 허위 진술을 하고 있다”며 무고로 역고소를 하기도 했다. 이에 앞선 2011년에는 성폭행 피해자로 공판에 출석했던 20대 여성이 재판부로부터 “가해자가 성폭행을 한 사실이 없는데 무고한 것이 아니냐”고 추궁당해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살한 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
이와는 반대로 성범죄 피의자로 몰린 사람에게서 수사를 받을 정당한 권리를 앗아간다는 의견도 대두됐다. 한 성범죄 전담 변호사는 “성폭력 사건에서 허위 사실의 증명 여부는 객관적인 증거 자료가 없을 경우 피해자와 가해자의 증언과 수사관, 검사의 판단에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한계가 있다”라며 “이 때문에 피해자에게 일말의 무고 가능성이 존재함에도 이런 부분을 수사 종결까지 물을 수 없도록 법적인 제재가 가해진다면 피의자로서는 정당하게 수사를 요청할 기회를 빼앗기는 격이 된다”고 지적했다.
지난 2013년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됐던 ‘가출소녀 강간 무고 사건’이 실례라고 볼 수 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던 30대 남성이 일면식도 없던 16세 소녀로부터 ‘성폭행범’으로 지목되면서 그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검찰 수사 결과 다행히 혐의없음 처분을 받았지만 이미 이 남성은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회사에서 권고 사직을 당해야 했다. 졸지에 실업자가 된 남성은 소녀의 가족과 국가에게 1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지만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수사기관이 소녀의 진술의 구체성을 통해 신빙성을 인정했기 때문에 국가가 피해 남성에게 배상해야 할 책임이 없고, 소녀의 가족 역시 거액을 배상할 만큼 가정형편이 좋지 못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 사건은 성범죄 피의자로 지목된 사람을 위한 유일한 방어권으로서의 무고 소송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유명한 사건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수사기관이 성범죄 사건과 관련해 ‘성폭행 피해자의 태도’라는 프레임에 피해자들을 짜 맞추려 해 왔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제동 장치로서 개정안의 필요성도 대두되고 있는 상황이다. 서울의 한 여성단체 관계자 김 아무개 씨(여)는 “불과 7~8년 전만 해도 가해자가 남자친구거나 동거남, 별거 중인 남편 또는 내연남일 경우에는 동의 없는 성관계를 아예 성폭행으로 치부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라며 “심지어 언론에서조차 ‘알 만큼 아는 사람끼리의 일을 황당하게 고소하고 있다’며 비꼬는 일도 다반사였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2008년 한 40대 여성이 내연남을 성폭행 혐의로 고소한 사건에 대해 사건에 대한 상세한 취재 없이 “‘내연남과의 성관계’를 성폭행이라고 하다니 황당하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김 씨는 이어 “법안이 수차례 개정된다고 해도 ‘성폭력 피해자다움’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지지 않으면 피해자로서는 공정한 수사나 재판을 받을 수 없다”라며 “성범죄 피해자들이 무고로 역고소를 당하는 경우는 ‘좋아서 한 성관계였다’ ‘원래 성관계가 이뤄지는 자연스러운 사이였다’ ‘이전에도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이었다’ 등의 이유에서 기인하는데, 실제 사건과 관계 없는 피해자의 성(性) 이력이나 그 배경이 무고의 가능성으로서 수사 및 재판 과정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여전히 성범죄 사건에 말려든 남성들은 할 말이 많다. 앞선 ‘억울하게 성범죄자 되지 않는 법’ 카페의 회원 신 아무개 씨(35)는 “합의 하에 성관계를 했음에도 다음 날 성폭행범으로 고소하는 경우도 많은데 그런 경우에도 실제 재판이 종결될 때까지 손 놓고 있으라는 것은 벼랑 끝에 선 사람을 죽으라고 등 떠미는 경우가 아니냐”라며 “이런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상대방의 무고 가능성을 보고 역고소를 하는 것인데 그것마저 법으로 금지시키는 것은 너무나도 여성상위적인 생각”이라고 하소연했다.
한편 이 법안은 앞선 전안법, 교육공무직법과 마찬가지로 개정안이 발의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회 게시판에 찬반댓글 약 600개가 한꺼번에 달리는 등 논란에 휩싸였으나 현재까지 ‘남성연대’ 등 이 법안에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단체들의 두드러진 행동은 보이지 않고 있다.
실제 앞선 두 법안의 경우는 발의 직후 다음 아고라 등 청원을 통해 십수만 명이 폐지 서명에 동참했으나 이 법안의 경우는 2월 8일 현재 기준으로도 약 9명이 서명한 것에 그쳐 상대적으로 국민들의 관심을 적게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안법은 발의 일주일 만에 14만 명이 서명에 참여했으며, 교육공무직 법은 업계 관계자들의 지속적인 반대 의사 표명을 통해 지난해 12월 결국 철회됐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