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몰 관리자로 채용 “네 계좌로 거래해”…나도 모르게 범죄자 전락
학부모 모임 등서 인맥을 과시한 후 소개비만 받고 잠적하는 등 최근 취업 사기 범죄가 늘고 있다.
“국회의원 여럿 모신 분을 아는데, 대기업 임원들과도 가까워요. 취업 부탁은 어렵지 않지.”
서울의 한 고등학교 학부모 모임에서 만나 졸업 후에도 만남을 이어오던 엄마들에겐 솔깃한 이야기였다. 그동안 모임의 주제는 자식들의 취업 걱정뿐이었다. 대학 입시가 끝나고 한숨 돌리나 했더니, 이번엔 극한의 취업 대란이 버티고 있었다. 불안과 걱정의 틈 사이로 들려온 한 여성의 말에 엄마들의 귀가 한 곳으로 모였다.
조용히 말을 꺼낸 여성은 이 모임에 세 번째 참석한 A 씨였다. 학부모 가운데 한 명의 소개로 함께 식사를 하면서 얼굴을 익혔다. A 씨는 말수가 많은 편도 아니었고, 온화해 보여 첫 만남부터 학부모들의 호감을 샀다. 한 학부모는 “믿기 힘든 ‘은밀한’ 이야기였지만 A 씨가 이야기하니 신뢰가 생겼다. 다른 것보다 자식들 취업 이야기라 쉽게 지나치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A 씨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학부모들의 신뢰는 더욱 쌓여만 갔다. 그는 요즘 기업이든 공무원이든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인맥 없이는 취업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자신의 지인을 통하면 어렵지 않다고 했다. 지인은 몇몇 국회의원을 도왔던 보좌관 출신이며, 대기업과 계열사 고위 임원들과 친분이 두텁다고 했다. 특히 대기업 임원들의 실명을 언급하면서 지인과 동향이거나 동문이라고 설명했고 “친척과 친구 아이들 취업도 지인이 도와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A 씨는 “대신 ‘식사비’가 필요하다”며 돈을 요구했다. 며칠 뒤, 학부모들은 홀린 듯 각각 500만 원씩을 건넸다.
A 씨가 돈을 받아간 건 지난해 11월이었다. 이후 A 씨는 모임에 나오지 않았지만 지난 2월 6일, 뒤늦게 학부모들이 사기였단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 그를 의심하거나 신고한 사람은 없었다. 그동안 A 씨는 일부 학부모와의 전화통화에서 “‘최순실 게이트’로 정치권과 재계가 시끄러우니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만 전해오다 최근 종적을 감췄다. 피해자는 더 있었다. 앞서의 고등학교 학부모 모임을 중심으로 각종 계모임, 사교모임 등에서 A 씨가 받은 돈은 확인된 것만 1억 원이 훌쩍 넘는다. 일부 학부모들은 법률 자문을 받고 있고, 또 다른 학부모들은 조만간 A 씨를 경찰에 신고할 예정이다.
# 취업 사기 천태만상
지난 1월 통계청이 발표한 ‘2016년 12월 및 연간 고용동향’을 보면 2016년 실업자는 101만 2000명이었다. 2000년 이후 처음 100만 명을 넘긴 것으로, 과거에는 외환위기 때인 1998년과 1999년에만 100만 명이 넘었다. 이 가운데 청년 실업자(43만 5000명)는 전체 실업자의 약 43%, 청년실업률은 9.8%로 역대 최고치다. 현대경제연구원 등이 통계청과 별도로 국제노동기구 기준에 따라 낸 통계를 보면 청년 실업률은 34%까지 올라간다.
이 같은 최악의 고용한파와 동시에 절박한 구직자와 가족들의 마음을 악용해 벌이는 사기범죄도 늘고 있다. 대검찰청과 경찰 등에 따르면 취업 알선 사기로 경찰에 붙잡힌 사람은 2013년 3126명에서 2015년 3236명으로 늘었다. 지방은 더욱 극성이라, 지난해 광주지검은 6월부터 9월까지 단 3개월 동안 취업사기범 26명을 검거했다.
문제는 지인과 인맥 등을 활용하는 ‘전통적인 방식’의 취업 알선 사기뿐만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취업 사기 범죄도 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캐나다의 외국인 임시 취업프로그램을 악용한 사례가 발견되기도 했다. 지난해 12월 캐나다 연방 이민성은 취업비자 4년 연장 기한 규정을 폐지하고 취업 비자만으로 장기간 체류를 허용했는데, 이를 이용해 신종 취업 알선 사기를 벌인 것.
이들은 대부분 캐나다 대기업을 사칭한 뒤, 임시 취업프로그램으로 일자리를 갖게 해준다고 유혹하면서 알선 수수료를 요구한다. 캐나다 연방경찰 산하 사기범죄 전담센터 관계자는 <일요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캐나다에서 취업 사기는 오래전부터 이뤄져 왔으나 4년 제한 규정 폐지 전후로 상당히 늘었다”며 “캐나다는 외국인들에게 취업 선망 국가로 알려져 있어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확인되고 있다. 피해자 수는 아직 가늠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취업을 조건으로 구직자들도 모르게 범죄에 가담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동안 종종 적발됐던 젊은 취업 준비생을 유혹해 보이스피싱 인출책으로 활용하거나 금융정보를 빼내는 수법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유명 온라인 쇼핑몰로 위장해 거래 사기에 가담시키는 사례도 있다. 쇼핑몰 위탁업무 관리자로 채용한 뒤, 관리자와 통장명의자의 이름이 일치해야 한다며 계좌번호를 요구하는 식이다. 고객에겐 상품 대금을 앞서의 구직자 계좌로 입금시킨 뒤, 이 금액을 또 다른 대포통장으로 다시 입금하게 하는 방법이다. 고객과의 거래는 구직자의 계좌로 이뤄졌기 때문에 거래 사기가 발생하면 구직자는 한 순간에 가해자가 된다.
이 때문에 대포통장으로 돈을 챙긴 사기범이 잠적하면 계좌를 알려준 구직자도 경찰 조사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최근 이러한 신종 수법에 연루됐던 권 아무개 씨(31)는 “주문한 물건이 배송되지 않으니 고객들은 사기로 회사를 신고했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회사 사업자 등록증 등을 확인했는데 모두 허위였다”며 “경찰에 신고를 하려했는데 오히려 내가 곧 고소를 당할 것 같다며 일단 피해자들이 고소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더라”고 말했다. 그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잠적한 업체 측과 취업과 관련해 나눈 메시지들과 대포통장임을 몰랐다는 내용을 증거자료로 제출해 지난해 12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사건을 담당한 경찰 관계자는 “절박하고 다급한 마음을 악용하고 개인정보까지 범죄에 이용했다. 상당히 악질적인 수법”이라며 혀를 찼다.
취업 준비와 동시에 아르바이트를 하려는 취업 준비생도 범죄 대상이다. 짧은 시간에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아르바이트에 취준생들이 관심이 높다는 점을 악용하는 것. 최근 성행하는 수법은 ‘댓글 알바’다. 미용 상품, 쇼핑몰, 온라인 강의 등에 업체가 지정한 개수의 댓글을 달아야 하는 아르바이트로, 수익은 ‘포인트’라 불리는 가상화폐로 지급한다.
문제는 업체가 알려준 사이트에 일정금액을 내고 ‘유료회원’으로 가입해야만 아르바이트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여기에 추가로 또 다른 유료가입자를 모아 올 것을 권유하기도 한다. 사실상 ‘다단계’ 방식이다. 댓글 알바를 경험해본 한 취준생 B 씨(29)는 “유료 회원 가입비가 아까워 ‘본전은 찾아야지’ 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가 오히려 취업 준비에 방해가 될 정도로 아르바이트를 하게되는 악순환에 빠졌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경찰 관계자는 “다단계 판매가 성립되려면 이익을 보는 단계가 2단계 이상이어야 하는데, 댓글 알바는 1단계까지만 이뤄져 현행법상 다단계 판매가 성립되지 않는다. 불법이라기보다는 편법인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아르바이트나 취업 명목으로 금품이나 개인정보를 요구하면 사기를 의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