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면전보다 은밀한 저격 ‘더 무섭다’
▲ 지난 2월 12일 한나라당 공천 신청자들이 면접을 받기 위해 당사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친이 친박 큰 충돌은 없었지만
당초 이번 총선은 지난해 경선에 이어 친이계 인사들과 친박계 인사들 간에 ‘경선 2라운드’가 재연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그러나 일단 예비 심사를 마친 시점에서 보면 수도권의 경우 예상보다는 양측이 정면충돌하는 지역구는 많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좋게 표현하면 ‘상대에 대한 배려’였고, 나쁘게 말하면 ‘계파간 나눠 먹기’라고 할 만하다.
대표적인 예로 박근혜 측 대변인을 지낸 친박계 인사가 포진한 영남 지역 공천을 노리던 이 대통령의 측근 K 씨의 경우는 이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그 지역구는 건드리지 마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후문이다. 친이, 친박계 인사들이 정면충돌할 것으로 예상되던 서울 강서 갑도 교통정리가 끝난 상태. 박근혜 전 대표의 공보특보를 지낸 구상찬 당협위원장과 이 당선인의 공보특보를 지낸 배용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자문위원간 ‘대충돌’이 예상됐지만 배 자문위원이 청와대 춘추관장으로 내정되면서 승부는 싱겁게 끝났다. 친이 윤건영 의원과 친박 한선교 의원이 맞붙은 경기 용인 을도 ‘공교롭게’ 선거구 자체가 분리되면서 교통정리가 되는 분위기다.
그러나 영남권 곳곳에서는 친이 친박 간 대결이 벌어지고 있다. 부산 사하 갑에서는 친박 엄호성 의원과 이 당선인의 언론특보를 맡았던 김해진 인수위 전문위원의 대결이 불가피해졌으며, 경북 안동에서는 친이 권오을 의원과 박 전 대표 캠프의 공보특보를 맡았던 허용범 전 조선일보 기자의 맞대결이 펼쳐진다. 박 전 대표의 최측근인 유승민 의원(대구 동)은 친이계 서훈 전 의원과 혈전을 벌이고 있으며, 대구 북을에서는 터줏대감인 친이 안택수 의원이 친박 서상기 의원(비례대표)과 양보 없는 전투를 치르고 있다. 친박 이인기 의원(경북 고령·성주·칠곡)도 이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운 주진우 전 의원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중진들의 성적표
당내 중진들에게 이번 총선은 단순한 선거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번 총선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어떻게 확보해 나가느냐에 따라 짧게는 올 여름 당권경쟁에서, 길게는 차기 대선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강재섭 대표와 박 전 대표, 이재오 전 최고위원, 정몽준 최고위원 등은 각 지역 공천심사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예비 심사를 끝낸 시점에서 최대의 승리자는 단연 이재오 전 최고의원이라는 게 당 안팎의 중평이다. 17대 국회에서 이방호 사무총장, 진수희 의원, 정종복 의원, 이군현 의원 정도에 불과했던 직속 계보가 18대에는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관측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서울과 수도권에서만 10여 군데가 넘는 지역구에서 자기 사람을 예선통과시키는 데 성공한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K 의원, B 의원을 비롯해 과거에는 계보에 속해있지 않았던 일부 의원들까지 최근 들어 ‘자발적’으로 친 이재오계를 표방하고 나서는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와 관련 한나라당 관계자는 “경기도의 서울 인근 한 지역구가 이 전 최고의 ‘파워’를 여실히 드러내는 지역”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당초 이 지역에는 친이계 인사인 J 씨와 친박계 인사인 P 씨의 2파전을 예상했지만 두 명 다 예선도 통과하지 못했다. 반면 당초 주목받지 못했던 L 씨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데 바로 L 씨가 이 전 최고위원 사람”이라고 말했다.
▲ 이재오 전 최고위원, 정두언 의원, 김문수 경기지사(왼쪽부터) 등이 공천 과정에서 ‘세력 불리기’에 성공했다는 평이다. | ||
이 전 최고위원과 달리 중진 K 의원은 이번 공천 과정에서 아예 계파 자체가 사라질 것이라는 괴담이 떠돌고 있다. K 의원 자체가 공천이 위태로운 상황인 데다 계보 의원인 수도권 J 의원, L 의원의 공천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돌고 있다. 특히 J 의원의 지역구가 흔들리고 있다는 소문이 워낙 강하게 돌자 당초 강남행을 노리던 H 전 의원 등이 이 지역 입성을 준비하고 있다는 풍문도 나돌고 있다. 중진 K 의원의 친척인 모 당협위원장 역시 3배수 압축 후보군에도 들지 못한 상태다.
이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정두언 의원은 초선임에도 나름대로 자기 사람들을 곳곳에 심으며 실리를 챙겼다는 분석이다. 흔히 ‘서울시청팀’으로 불리는 이 대통령의 서울시청 인맥들이 곳곳에서 선전을 펼치고 있는 배경에 정 의원이 있다는 관측이다. 광진 을, 강서 을 등 수도권에서 정 의원의 후원을 받고 있는 후보들이 적지 않다.
의외로 ‘선전’을 하고 있는 중진은 김문수 경기지사다. 차명진 임해규 의원 등 최측근 의원들은 물론이고 허숭(안산 단원갑), 이명우(고양 덕양갑) 등 10여 명 가까운 측근들을 2∼4배수 압축 후보에 올려놓는 기염을 토했다.
거세지는 탈락자 반발
통상 공천 때마다 벌어지고 있는 ‘공천 후유증’이 이번 총선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클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일부 서울지역 원외 당협위원장들의 경우 ‘낙하산’을 타고 들어온 외부 인사들에게 자리를 내주며 예선조차 통과하지 못했다며 실력행사에 나설 태세다. 한 원외위원장의 경우 비례대표 출신인 경쟁 후보에게 “내가 탈락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협박을 한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일기도 했다. 예선 통과에 실패한 또다른 당협위원장은 “과거 당권 다툼 당시 한쪽 편을 들었는데 이에 앙심을 품은 상대측에서 이번 공천을 통해 보복을 하는 것 같다”며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서울 지역 모 당협위원장은 “지난 대선 당시 이상득 국회부의장이 따로 부르더니 ‘당신은 걱정말라’고 해 그 말만 믿고 정말 사재를 털어가며 열심히 이 당선인을 위해 뛰었다”며 “이제와 생각하니 그 말을 믿은 내 자신이 어리석었던 셈”이라고 한숨을 쉬고 있다. 이 위원장은 “이 지역은 워낙 호남 출신 유권자가 많아 지역기반 없이 낙하산을 타고 공천을 받아봤자 당선될 확률이 낮다”며 “아무나 공천만 주면 당선되리라는 이 대통령 측근들의 오만이 곧 처참한 결과로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탈락자들은 당 지도부에 재심을 청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하는 한편 무소속 출마나 자유선진당으로의 방향 전환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당 지도부는 ‘예선 탈락’한 원외 당협위원장들에 대해 재심 청구를 받아들이겠다며 한발 물러섰지만 이미 여러 지역구에서 당내 분란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