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잘못 쓰면 ‘당’만 쪼갠다
▲ 한나라당의 공천 관련 잡음이 계파 갈등을 심화시켜 자칫 총선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사진은 안강민 공천심사위원장(왼쪽)과 이방호 사무총장. | ||
“눈먼 공심위 귀먹은 공심위 결국 돌았네.” 한나라당 당사 앞에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들고 서있는 현수막 문구 중 하나다. 공천심사위원회의 공천 결과에 불만을 품은 지역구 사람들이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앞으로 몰려들면서 ‘심사위원은 자폭하라’는 등 강도 높은 비판도 연일 이어졌다. 한때 당사 앞에는 금붕어가 한 마리씩 담긴 물통이 진열돼 있었다. 언뜻 봤을 때는 환경단체들의 시위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 “공천심사위원들이 입만 뻥긋뻥긋하고 있다”며 행해진 일명 ‘금붕어 시위’였다.
시위와 함께 공천 심사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만한 의원들에게 선을 대려는 ‘추태’ 행각도 나타났다. 이재오 의원은 공천심사위원들에게 찾아가 자신의 측근이라고 주장하며 “공천을 해 달라”고 떼쓰는 후보들로 골머리를 썩었다는 후문이다. 이 의원 비서실에서는 ‘이재오 의원 최측근이라굽쇼?’라는 글을 통해 “최근 공천 및 여러 인선작업에서 이재오 의원의 이름을 대고 이것저것 요구하거나 로비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서실에 알려주시길 바란다”고 협조 공문을 올리기까지 했다. 이 의원은 자신을 찾아오는 공천 탈락자들 탓에 사무실을 거의 비우다시피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갈등과 잡음은 역대 총선을 앞두고 공천 과정에서 벌어지던 정례행사와 같은 것. 공천자가 있으면 탈락자가 있게 마련이고 탈락자들은 저마다 억울함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한나라당 내에 벌어지고 있는 공천 과정의 ‘계파 갈등’은 심각한 수준이다.
1차 공천 과정에서부터 이런 기류는 엿보였다. 지난 2월 29일 서울, 경기, 대구 등에 대한 공천 확정자가 발표되면서 ‘친이’ 후보는 48명, ‘친박’ 인사는 12명밖에 되지 않았다. 4 대 1의 비율이었다. 특히 6일 발표에서 친박으로 분류되는 현역의원들이 공천에서 탈락하면서 진통은 정점으로 치달았다. 이날 임해규 공심위 위원은 “오늘 발표 지역구(경기, 제주)의 현역 의원 중 이재창, 이규택, 한선교, 고조흥, 고희선 의원이 탈락했다”고 밝혔다. 한선교, 이규택, 고조흥 의원은 대표적인 친박 의원으로 꼽힌다. 당일 발표한 경기지역 공천 내정자에 친이 측 인사는 12명이었고 친박 인사는 5명뿐이었다.
그동안 공천 문제에 말을 삼가던 박근혜 전 대표도 공심위의 결정에 드디어 침묵을 깼다. “표적공천이다”라며 공심위에 직접 이의를 제기하고 7일 일체의 공식 스케줄을 취소한 채 칩거에 들어가기도 했다. 박 전 대표는 “단지 나를 도왔다는 이유로 탈락을 시켰다”며 “이런 것은 표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이것은 정말 잘못된 일”이라고 말했다.
공심위에서는 당내 반발 기류가 거세지자 “계파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친박 측에서는 안강민 공심위원장의 여러 가지 발언과 행보를 들며 설득력이 없다고 반발하고 있다. 지난 5일 부산지역 공천 심사의 경우 공심위원들이 3배수에 든 후보들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가 비슷한데도 현역 의원과 특정 후보만으로 압축하자고 주장하고 나서자 안 위원장은 “못해먹겠다”며 뛰쳐나가기도 했다는 것이다.
공심위 측은 “의정활동 평가와 여론조사만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고 공천 심사기준을 밝히고 있지만 공천에 탈락한 친박 측 의원들을 납득시키기에는 부족했다. “공심위가 공천 평가 요소를 ‘여론조사’ ‘의정활동’으로 삼았다면 결코 낙천하지 않았을 의원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 친박 측 의원들의 주장이다.
공천에 탈락한 한선교 의원은 “수차례의 여론조사에서 내가 3배 이상 지지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고 3년 연속 국정감사 우수 의원으로 선정될 정도로 의정활동 평가도 높았다”고 주장했다. 한 의원은 그럼에도 자신이 친 이명박계 윤건영 의원에게 공천 자리를 뺏긴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충남 당진에 공천된 정덕구 전 의원에 대해선 인명진 윤리위원장이 ‘철새 정치인’이라며 문제를 삼았다. 정 전 의원은 김대중 정권에서 산업자원부 장관을 역임하고 노무현 정권에서 열린우리당의 비례대표로 의원을 지냈던 인물. 인 위원장은 이를 두고 “(공심위가) 새를 공천하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한나라당의 이러한 공천갈등은 향후 분당 사태까지 갈 수 있을 정도로 위태롭게 전개되고 있다. 이번 공천에서 탈락한 이규택 의원은 지난 3월 9일 한나라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공심위 결정에 대한 재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탈당과 무소속 출마도 불사할 것이다. 이번 공천 내정자 발표는 밀실 공천이자 보복 공천이다. 박 전 대표의 측근이란 이유만으로 공심위가 표적공천을 자행했다”라고 비판해 향후 만만찮은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영등포 갑에 공천을 신청했으나 전여옥 의원에 밀려 탈락한 고진화 의원도 “친형공천, 철새공천도 모자라 표절공천을 자행하고 봉건영주 가계정치를 하고 있다. 이제 국민들이 한 계파의 독식을 용인하고 지나가는 시절은 갔다”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앞으로 한나라당은 공천에서 탈락한 친박 의원들이 향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본 뒤 집단행동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공천을 둘러싸고 분당 등의 내홍으로 빠져들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