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보이스’ 가족끼리 보기 힘들어…‘끝까지 간다’ 등 시사교양도 점점 자극적
저연봉에 비싼 물가로 허덕이는 시대에 20대 직장인 김신선 씨의 유일한 낙은 TV 시청이다. 퇴근 후에는 TV 앞에 앉아 ‘혼밥’을 먹고, 주말에도 친구와의 약속 외에는 주로 TV 앞에 앉아 있다. 즐거움을 얻고자 TV를 보지만 “요즘 TV를 보고 있노라면 무서워진다”고 그녀는 말한다. 워낙 자극적인 소재를 다룬 드라마와 시사 프로그램 등이 판치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의 궁금증에 불을 댕길 만한 소재이기 때문에 눈이 가지만 막상 보고 나면 불안해지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뒤흔든 최순실 국정농단사태를 다룬 뉴스를 보면 화가 나고 울화통이 치밀지만, 강력 범죄와 미제 사건 등을 디테일하게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본 후에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낀다. 김 씨는 “언제든 나에게, 또 내 주변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니 정치권의 문제보다 더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 드라마가 보여주는 살풍경
20%가 넘는 전국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SBS 드라마 <피고인>. 가족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쓴 검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드라마는 사이코패스적인 재벌 2세와 진실을 밝히려는 검사의 사투를 담았다. 악인으로 등장하는 재벌 2세는 골프채로 한 여성을 살해한 후 이를 감추기 위해 쌍둥이 형까지 죽이고 마치 형인 것처럼 행세를 하며 살아간다. 또한 진실을 파헤치려는 검사를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자신의 정체를 밝힐 증거를 찾은 이들을 차례대로 공격한다. 이성을 잃은 재벌 2세의 범행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는 그동안 수차례 등장했다. 그 연장선상에 있는 <피고인>은 존속살해 등 그 수위를 높여 가족이 함께 보기 힘들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사진 출처 : OCN 드라마 <보이스> 공식 홈페이지
케이블채널 OCN 드라마 <보이스>는 폭력의 수위가 더 높다. 112 신고센터를 배경으로 다양한 강력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을 그린 이 드라마는 주인공인 형사의 아내가 이유도 모른 채 괴한에게 얼굴뼈가 골절되도록 폭행당해 사망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됐다. 이 외에도 연쇄살인, 염산 테러 등 소름끼치는 사건들이 전개돼 시청자게시판에는 “보기 무섭다”는 반응이 적잖다. 결국 <보이스>는 폭력성이 도마 위에 올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소위원회 안건으로 상정되기도 했다. 이 드라마는 ‘15세 이상 관람가’로 고등학생 이상 시청할 수 있지만 미성년자들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잔인한 장면이 많다는 지적이다.
<보이스>를 연출한 김홍선 PD는 2월 15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사실감, 현장감을 살리려다 보니 좀 과한 장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며 “시청자들의 마음이 다칠 수도 있는 부분이라 고민이 많았다. 잘 조정해서 촬영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런 지적과는 별개로 <피고인>과 <보이스>의 시청률은 높다. <피고인>은 동시간대 방송되는 드라마와 비교해 시청률이 2~3배에 육박하고, 시청률 곡선이 여전히 상승세다. <보이스> 역시 OCN 드라마로는 이례적으로 5%가 넘는 시청률을 구가하고 있다. 결국 시청자들이 ‘공포에 떨면서도 보게 되는 드라마’라는 의미다.
한 드라마 외주제작사 대표는 “표현 수위를 조절할 필요는 있지만 시청자들은 재미있기 때문에 찾고 있다는 의미다. 잔인하고 자극적이기만 하다면 시청자들이 외면했을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TV는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는 만큼 청소년들의 정서에 악역향을 미칠 수 있는 표현은 자제하거나 보다 명확한 시청 등급을 매겨 규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미제 사건, 그것이 알고 싶은가?
범인을 잡지 못한 채 미궁에 빠진 미제 사건을 다루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은 SBS <그것이 알고싶다>다. 1992년 첫 선을 보인 후 25년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그것이 알고 싶다>는 약촌오거리 택시운전 살인사건 등을 파헤쳐 누명을 벗기는 등 적잖은 성과를 냈다. 최근에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된 소재로 초점을 맞췄지만 <그것이 알고 싶다>는 그동안 숱한 미제 사건과 미스터리한 사연들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그것이 알고 싶다>의 높은 퀄리티와는 별개로 ‘엽기토끼와 신발장’, ‘사라진 두 여인’, ‘토끼굴로 사라진 여인’ 등 공포감을 조성하는 소재들을 보며 두려움을 호소하는 시청자들도 많았다. 그동안 <그것이 알고 싶다>가 다룬 소재를 쭉 훑어봐도 살인, 강간, 납치 등 강력 범죄를 다룬 경우가 많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진 출처 : KBS 2TV <미제사건 전담반 끝까지 간다> 공식 홈페이지
최근에는 KBS 2TV가 4부작 <미제사건 전담반 끝까지 간다>를 신설했다. 이 프로그램은 ‘카센터 방화 살인사건’, ‘청주 검은 비닐봉지 살인사건’, ‘대전 택시기사 살인사건’ 등을 소개하며 시청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런 사건들은 현실에서 벌어진 실화라는 점 때문에 드라마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름 끼치게 만들곤 한다.
제작진은 “전국의 미제 사건 약 4만 1000여 건. 시간이 지나도 상처가 가시지 않았을 피해자 가족들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모든 일선 형사들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경찰청의 협조를 얻어 잊혔던 사건들을 전국의 장기미제전담팀들과 다시 조명하고, ‘정의’의 의미, 정당한 처벌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며 관심과 제보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공익적 프로그램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그것이 알고 싶다>와 포맷이 유사하고, 그 중 미제사건에 집중한다는 측면에서 더욱 자극적으로 흐를 소지가 있다. 이 프로그램을 봤다는 30대 직장인 김선영 씨는 “흥미로운 소재지만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며 “공익적 효과를 노린다고 하지만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소재를 통해 시청률을 높이려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