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전 감독 “장씨, 반성커녕 꿈나무 육성에 전념한 실무진에 모든 책임 떠넘기려”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를 실질 운영하면서 삼성 등에 후원금을 강요한 혐의로 재판이 진행 중인 장시호 씨. 최근 특검에 적극 협조하면서 ‘국민 조카’라고 불리고 있다.
최근 일본에서 열린 동계 아시안게임은 박재혁 전 감독에게 특별한 대회다. 그는 31년 전인 1986년, 제1회 동계 아시안게임 스키 ‘알파인 회전’ 종목에서 한국인 최초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대회가 열린 장소는 일본 삿포로. 올해 대회가 진행되는 곳이다. 기자가 박 전 감독을 만난 지난 2월 22일, 스키 국가대표 김현태 선수가 알파인 대회전 경기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박 전 감독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좋은 성적을 냈다. 내 일처럼 기쁘다”고 말했다.
박 전 감독은 올해 개인적 의미가 깊은 삿포로 대회에 가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방문은 엄두도 내기 어려웠다. 그는 당장 내년으로 다가온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의 조직위원회 소속으로, 알파인 스키 경기 위원장을 맡아 준비 중이다. 오는 3월 4일부터 열리는 여자 스키월드컵 등, 올림픽을 앞두고 국내에서 열리고 있는 테스트 경기 전반을 그가 담당하고 있다.
업무와 별개로 그가 바쁜 일은 또 있었다. 박 전 감독은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초대 회장을 맡았던 이유로 그동안 검찰 조사를 받아야만 했고, 지난 2월 17일엔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야 했다.
# 영재센터 비리에 깊숙이 연루?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는 최근 재판에 넘겨진 장시호 씨가 실질적으로 운영한 것으로 의심 받는 단체다. 지난 2016년 10월 ‘비선실세’ 최순실 씨 의혹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직후, 조카 장시호 씨가 새로운 권력으로 주목 받았다. 의혹을 수사 중이던 서울중앙지검 특수수사본부는 장 씨를 긴급체포해 조사했고, 같은해 12월 장 씨를 재판에 넘겼다.
장 씨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및 강요, 사기‧횡령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 공소장을 보면 그는 이모 최순실 씨, 김종 문화체육관광부 전 차관과 함께 삼성과 그랜드레저코리아(GKL)에 압력을 행사, 영재센터에 후원할 것을 강요했다. 검찰이 파악한 후원 자금 흐름을 화살표로 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최순실 → 장시호 → 김종·이규혁·박재혁 → 김재열 → 삼성전자 → 영재센터.’
박 전 감독이 입길에 오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장 씨가 영재센터 강요에 의한 부당한 후원금을 받는 과정에서 박 전 감독 역시 깊숙이 관여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재센터는 초대 회장인 박 전 감독의 명의로 사업자등록을 했고, 사단법인 허가를 받았다. 영재센터는 사무실이 서울과 강원도에 각각 하나씩 있는데, 강원도 사무실은 박 전 감독이 무상으로 임대해준 곳이었다. 센터 설립 자금 5000만 원도 장 씨가 마련해 왔지만, 박 전 감독의 이름으로 투입됐다.
여기에 박 전 감독은 지난 2015년 7월 14일 영재센터 설립일부터 2016년 4월까지 재직했는데, 센터가 2015년 10월 2일 삼성으로부터 5억 5000만 원, 2016년 3월 3일 10억 7800만 원을 후원 받은 시기와 겹친다. 또한 문체부로부터 2015년 9월, 12월 각각 4000만 원, 2억 원의 지원금을 받은 시점도 마찬가지다.
한국동계영재센터 초대 회장 박재혁 전 감독. 고성준 기자
박 전 감독은 2014년 겨울을 떠올렸다. 10여 년 전부터 스포츠계 후배들을 통해 장 씨를 만나 가깝게 지내오면서 함께 스키를 탔던 그는, 당시에도 강원도의 한 스키장에서 슬로프에 오르기 위해 장 씨와 나란히 리프트를 타고 있었다. 5분 남짓한 시간 동안 박 전 감독은 장 씨에게 자신의 ‘꿈’에 대해 말했다. “시골에서 태어나 공부도 잘하지 못했던 내가 오직 스키 하나로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국가대표 선수를 거쳐 감독까지 맡았다. 스키라는 한 길만 걸어오면서 많은 혜택을 받았다. 앞으로는 후배든, 일반인이든 많은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재능 기부하면서 스키를 알려주고 싶다.”
그리고 2015년 5월, 장 씨는 전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김동성 선수와 함께 박 전 감독을 찾아왔다. 장 씨와 김 씨는 “사업 계획이 있는데, 동계 스포츠계에 오래 계셨으니 초대 회장을 맡아 달라”고 했다. 박 전 감독을 찾아왔을 당시 사업 내용은 이미 상당 부분 구체화돼 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낯익었다. 전‧현직 동계 스포츠 스타들의 재능기부로 어린 꿈나무들을 육성한다는 내용이었다. 앞서 박 전 감독이 장 씨에게 설명했던 꿈이 구체화된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내 꿈이 이뤄지는구나 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박 전 감독은 흔쾌히 승낙했다. 장 씨가 “문체부에서 많이 도와주기로 했다”며 “대기업의 후원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신했지만, 별다른 의구심은 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정부에서 동계 스포츠 활성화에 나서주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취지가 좋은 문화‧스포츠 단체들에 지급되는, 일반적인 정부 지원금, 기업 후원금일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 장시호, 그리고 영재센터
장 씨와 최순실 씨가 영재센터를 실질 운영하면서 부당한 후원금을 챙긴 사실이 드러난 이후, 서울지검 특수본은 박 전 감독도 강도 높게 조사했다. 박 전 감독은 검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센터에서 작성된 문서들을 보고 상당히 놀랐다고 한다.
그는 “참석하지도 않은 회의 기록이나 회장 결재가 필요했던 문건에 내 도장이 모두 찍혀 있었다. 삼성 등 후원금을 받는 과정에서 작성된 서류 등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것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며 “조사 과정에서 본 모든 서류들에 대해 보고를 받거나 직접 결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2015년 7월 14일, 영재센터가 설립된 이후 박 전 감독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현직 스포츠 스타로 구성된 이사진은 ‘꿈나무 육성’에만 집중했다. 영재센터가 주관한 캠프나 행사 등에 참여해 무상으로 학생들이나 후배들을 가르쳤을 뿐, 센터 운영이나 후원금 등 모금 과정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박 전 감독은 “나를 비롯해 이사진들은 센터로부터 월급 등 단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장 씨가 그래도 회장이라며 법인카드를 하나 만들어줬는데, 내가 재직한 기간 동안 쓴 총 금액은 직원 식사비용 등 40만 원이 전부였다”고 말했다.
“센터 회장에게 정식 보고도 없고 결재 사인 요청도 없었던 이유에 대해 궁금하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박 전 회장은 “두 갈래로 나눠졌다고 보면 된다. 회장 직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는 꿈나무 육성에 집중했고, 센터의 전반적인 운영은 서울 사무실에서 장 씨가 주도했다”고 말했다. 그는 “공식직함은 없었지만 장 씨가 영재센터 서울 사무실 직원들을 채용했으며, 운영 및 행사 기획 등 크고 작은 부분들 모두 그가 관리했다. 모든 보고는 장 씨에게 들어갔다”며 “10여 년 전부터 가깝게 지내던 사이라 믿고 맡겼다”고 말했다. 이 내용은 지난 2월 17일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한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출신인 이규혁 전 영재센터 전무이사의 증언과 일치한다.
여기에 박 전 감독은 한 가지 일화를 들려줬다. 영재센터 직원들이 수시로 바뀌었는데, 그 이유가 장 씨 성화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박 전 감독은 “회장으로 8개월가량 재직했는데, 그 사이 직원이 많이 나갔다. 장 씨가 큰 소리도 많이 내고 욕설이나 막말이 심해 그걸 못 버티고 나간 것”이라며 “장 씨가 곧바로 새로 데려오거나 채용했지만,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센터에서 이야기가 많이 나와 장 씨에게 따로 타이른 적이 있다”고 말했다.
박 전 감독은 장 씨와 알고지내면서 최순실 씨 등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고 한다. 센터의 이사진뿐만 아니라 그동안 함께 알고지낸 스포츠계 선‧후배들 역시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했다.
다만 장 씨가 종종 별칭을 말하는 것은 들었다고 했다. 박 전 감독은 “삼성 전략기획실 관계자가 센터에 후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도대체 영재센터의 뒤를 누가 봐주는 거냐’는 식으로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었다. 후원 과정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어 장 씨에게 따로 ‘어떻게 대답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는데 장 씨는 ‘미스터랑 마담이, 그냥 뭐, 그렇다고만 말하면 돼요’라고 했다”고 말했다. 영재센터를 수사한 서울지검 특수본이 파악한 내용에 따르면 미스터는 김종 전 차관, 마담은 최순실 씨다.
# ‘국민 조카’의 거짓말
최근 장시호 씨는 최순실 씨의 제2의 태블릿PC 제출, 대통령 차명폰 번호 기억, 민정수석실 인사청탁 파일 제보, 최순실 대여금고 위치 진술, 미얀마 K타운 프로젝트 진술 등을 술술 풀어놓으면서, 특검에 적극 협조하고 있다. 최 씨가 부인하거나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들을 제보하면서 일각에선 그를 ‘국민 조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국정농단 사태의 주범 비선실세 최순실(사진 왼쪽에서 두번째)과 최 씨의 조카 장시호(사진 오른쪽에서 첫번째)가 지난 1월 17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 참석해 자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하지만 박 전 감독의 시각은 다르다. 장 씨는 여전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장 씨는 현재 진행 중인 자신의 재판에서 대부분의 혐의를 인정하고 있지만, 모두 이모인 최순실 씨의 지시에 따랐다고 주장하고 있다. 영재센터 설립부터 운영까지 주도적으로 개입한 게 아니고 그럴 수도 없었다는 얘기다.
박 전 감독은 “검찰 조사를 받고 온 영재센터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장 씨는 최순실 씨뿐만 아니라 센터 직원들에게도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실무진들이 대부분의 업무를 담당했고, 장 씨 자신은 잘 모른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이라며 “이 때문에 직원들이 검찰과 특검에 조사를 받으러 다니면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반성하고 인정하는 모습으로 보기 어렵지 않느냐”며 “결국 아직도 본인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며 씁쓸해 했다.
박 전 감독은 영재센터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영재센터는 검찰 조사, 재판과는 별개로 문체부의 감사 등을 받고 있어 상당 기간 활동에 차질을 빚을 전망이다. 박 전 회장은 “우리(박 전 감독 및 스포츠계 인사들)가 알고 있던 센터의 설립 취지는 동계스포츠 꿈나무들을 발굴해 열악한 국내 동계스포츠의 저변을 넓히려는 것이었다. 이런 단체는 국내에 단 한 곳도 없다. 전‧현직 스포츠 선‧후배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며 “장 씨가 단체 설립과 운영에서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센터 설립 취지와 관계자들 등이 비리 집단으로만 비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