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주사기 테러’ 영화 속 단골 소재
북한은 이 사건의 배후임을 부정하고 있지만, 말레이시아 측은 북한이 이 사건에 연루돼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일련의 과정을 바라보며 대중은 두 가지 지점에서 크게 놀랐다. 백주 대낮에 수많은 인파가 붐비는 공항에서 이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 첫 번째고, 우리는 이미 여러 영화를 통해 독극물을 이용한 북한의 암살 공작을 봤다는 것이 두 번째다. 영화 속 설정으로 생각했던 일들이 ‘영화 같은 현실’로 재현된 셈이다.
2013년 개봉된 배우 하정우, 류승범 주연 영화 <베를린>. 냉전의 시대, 독일 베를린을 배경으로 각종 첩보 업무를 수행하는 남북한 요원들의 대결을 그린 이 영화에서 배우 하정우와 류승범이 각각 연기한 ‘표종성’과 ‘동명수’는 북한의 최정예 요원이다. 동명수는 노란색 독극물 주사를 주입해 상대방으로부터 원하는 이야기를 끌어내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김정남이 암살당한 직후 용의자로 지목된 여성이 주사기를 이용해 독극물을 얼굴에 뿌리거나 주입했을 수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던 만큼 이 장면은 다시금 대중의 기억 속에서 회자됐다.
영화 ‘베를린’ 홍보 스틸 컷. 북한 최정예 요원이 노란색 독극물 주사로 상대방으로부터 원하는 이야기를 끌어내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내용이 나온다.
<베를린>을 연출한 류승완 감독은 이 영화가 개봉할 당시, 과거 MBC 50주년 다큐멘터리 <타임-간첩 편>을 만들며 북한과 간첩 등에 대한 높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밝힌 적이 있다. 이렇듯 오랜 기간 사전 취재를 통해 만든 영화인 만큼 <베를린> 속 독극물 주사 장면 역시 실제 북한에서 행해지는 테러의 방법 중 하나일 것이란 설득력을 얻는다.
같은 해 개봉된 영화 <용의자>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북한 특수 공작원인 지동철(공유 분)을 챙기는 이북 출신 그룹 회장 박건호(송재호 분)는 극 초반 괴한에 의해 마취가스로 마취당한 뒤 주사를 맞고 사망한다. 이 주사기에 어떤 약물이 담겼는지 정확히 설명되진 않지만 순식간에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할 만큼 치명적인 독성분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박건호 회장을 죽인 용의자로 지목당한 지동철은 북한에서 내려 보낸 공작원뿐만 아니라 남한의 정보기관에도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러다 그는 무술에 능한 북한의 공작원와 맞붙게 된다. 이때 이 공작원 역시 독극물이 든 주사기를 찔러 지동철을 죽이려 한다. 결국 지동철은 격투 끝에 이 주사기 바늘을 북한 공작원의 목에 꽂는 데 성공하고, 이 공작원은 곧바로 사망한다.
또 다른 예로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는 러시아 연방보안국 출신 리트비넨코의 의문의 죽음을 다룬 적이 있다. 건강하던 그가 갑작스러운 중독 증상을 보여 병원 입원 후 곧바로 사망했는데 부검 결과 인체에서 방사능 물질 폴로늄-210이 발견된 것이다. 당시 이 사건을 수사한 영국 검찰은 리트비넨코가 연방보안국에서 함께 일하던 러시아인 사업가 두 명을 한 호텔에서 만나 1시간가량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 후 헤어졌고, 3주 후 그가 사망했다. 러시아가 배후로 지목됐지만 러시아는 영국 검찰의 수사 결과를 부정했다. 현재 북한의 행태와 똑같다.
영화 ‘용의자’ 홍보 스틸 컷. 주인공이 주사기를 휘두르는 북한 공작원과 격투를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이처럼 <베를린>과 <용의자> 외에도 북한 공작원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1998년 개봉된 영화 <쉬리>가 원조 격이라 할 수 있고, <이중간첩> <의형제> <동창생> <간첩> 등도 비슷한 결을 가진 영화다. 이런 영화 속에도 요원 암살 임무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 때 주로 쓰이는 소재는 ‘총’이다.
전 세계적으로 총기 소지 및 사용에 대한 규제가 비교적 느슨한 나라도 있기 때문에 총격에 의해 누군가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은 뉴스를 통해 간간히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치밀한 계획 하에 독극물을 주입하는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에 김정남 암살 사건이 더욱 주목받고 있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총은 일단 발사하는 순간 엄청난 소음이 발생해 현장을 빠져나가기조차 쉽지 않다. 하지만 독극물 테러는 이처럼 순식간에 주변 사람들이 모르게 진행될 수도 있다는 것이 입증됐다”며 “향후 이런 소재를 다룬 영화에서 독극물을 사용한 암살 행위가 더 자주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북한 백두혈통이라던 김정남이 자신의 이복동생이 통치하고 있는 북한의 사주로 살해됐을 것이란 추측이다. 영화 <이중간첩>의 주인공인 임병호(한석규 분)나 <베를린>의 련정희(전지현 분) 역시 북한이 파견한 공작원이었으나 충성을 다하던 북한 정부에 의해 제거됐다.
또 다른 영화계 관계자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자 3대 세습 체제로 외부와의 교류를 막고 있는 북한은 한국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제작하는 영화의 단골 소재다. 그리고 대부분은 북한을 부정적으로 그린다”며 “이번 사태는 북한을 바라보는 전세계의 시각을 더욱 싸늘하게 만들었고, 이런 시각이 또 다른 작품을 통해 투영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