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을 무기로 간섭하며 주체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꺾는 독재자가 리더일 때 자율적인 삶을 위협하고 찌르고 상처 내는 독재자와 그 앞잡이를 향해 모든 권력은 민(民)으로부터,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함성으로 저항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권력을 사유화하는 독재자에 저항해야 하는 시점에 그의 죄를 미워하되 그는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말은 들리지 않는 설교처럼 오히려 관념적이겠다.
잘나가던 안희정 충남지사가 말의 덫의 걸렸다. 이른바 “선한 의지” 논쟁이다. 우선 인문학적으로는 칸트의 ‘선의지’가 생각난다. 칸트의 선의지는 상식적인 개념은 아니다. 사랑스런 눈빛과 몸짓으로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행복한 엄마의 행위가 선의지일까, 아닐까. 칸트에 따르면 아니다. 자연스런 그 행위는 본능에 따른 감정적 행위일 뿐 이성적인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길을 가다 만난 불쌍한 걸인에게 적선하는 것도 선의지의 발현이 아니다. 역시 감정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칸트에게는 “‘너’의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게 하라”는 지극한 이성, 정언명령에 따른 행위만이 ‘선의지’일 수 있다.
칸트의 말대로 감성 없는 이성은 공허하고 이성 없는 감성은 맹목적인데, 이성적 행위와 감정적 행위를 엄격히 구분하는 칸트의 개념은 이 시대에 살아있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칸트의 선의지를 많이 변형한, 안희정의 ‘선한 의지’는 오히려 소통과 대화가 화두인 이 세대가 요구하는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처음에 뉴스를 들으면서는 깜짝 놀랐다. 이명박의 ‘4대강’이, 박근혜와 최순실의 ‘재단’이 선한 의지에서 출발한 것일 수 있다니. 선에 대한 모독, 자율적 의지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것은 분노해야 할 일에 의지를 꺾는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개념에 삶을 맞추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선한 의지’의 개념은 버리기는 아까운 것이었다.
정치를 하다보면 어깃장을 놓은 사람들도 많고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도 많고 주장이 강해 소통이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들도 많겠다. 그런 이들을 배제하고 학문을 할 수는 있어도 정치를 할 수는 없겠다. 정치를 한다면서 그런 이들을 틀렸다고 지적질만 하고 외면하면 소통과 통합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주장들, 우리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주장들도 모두 선한 의지의 발로였다고 믿어주고 시작하자는 것이겠다. 그래야 한 테이블에 앉아 함께 공생의 삶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를 인정해야 한 테이블에 앉아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다. 그렇게 마음을 열어야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야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면서 죄를 물을 수 있지 않을까.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